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마태복음 715]

 

 

지난 주 월요일 한 선배 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그 분이 섬기시는 교회에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강사 목사님이 한국 교계에서 나름대로 연구한 후 내린 한국 교회 문제에 대한 진단이라 하시면서 한 3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믿음)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불교, 유교 및 샤머니즘 등 섞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2) 한국 교회 교인들은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3) 지금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이 순수하지 못한 것이요 또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진단을 생각할 때 아모서 8장 11절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기갈은 먹을 것과 물이 없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로서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배고프고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간지러운 귀를 긁어주는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아고 있기에 지금 우리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못(아니)하고 우리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딤후4:3). 그 결과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스승의 거짓 교훈에 쉽게 노출돼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들은 이단의 미혹에 너무나 쉽게 노출이 돼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한국 대전에 사시는 어느 자매님에게 이 메일을 받았는데 그 분이 사랑하는 따님과 아드님을 생각하면서 신앙의 본이 되시고자 결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고자 세 번 정도 가보신 교회에 등록하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의아해 했던 것은 그 분이 등록한 교회에서 새신자 교육을 받고 집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그 교육의 시작이 “이단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의아해 했던 이유는 주로 새신자 교육의 주제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그 분이 행하신 일은 무엇이며 믿음과 성경, 기도 등등 이런 기초적이면서 근본적인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 대전에 있는 교회에서는 새신자들에게 이단에 대해서 먼저 가르칠까 생각해 보니까 그 교회가 구원파 부류인 박옥수 집단과의 명예훼손 시비로 약 4년간 법정 투쟁 끝에 2007년에 승소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전기독교연합회의 이단대책위원장이 그 대전 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는데 아마도 고생 끝에 최종으로 대법원에서 승소한 것입니다. 그 교회 웹사이트에는 이런 글이 올려져있었습니다: “이번 ______교회의 대법 승소는 단순히 개교회나 지역 교회의 승리가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에 박옥수의 이단성을 증명시켰으며 진리 파수가 얼마나 힘든지도 보여줬다. 그러면서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한국교회에 할 수 있다는 의지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일깨워 줬다. 교회사는 이단과의 투쟁이 언제나 멀고도 험한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 총회는 이단과의 싸움에 단호히 대처하여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인터넷).

 

여러분, 우리는 진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14:6)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벧후3:18; 엡 4:13, 골 1:10, 빌3:8). 그리고 지난주일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13절).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14절; 눅13:23). 우리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은 그 좁은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역경과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줄 믿고 믿음으로 그리고 담대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담대하게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 수요 새벽기도회를 운전하고 나오면서 차 안에서 이 찬송을 부른 후 또한 새벽기도회 때에도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그 찬양을 하나님께 불렀습니다 - 새 찬송가 401장 “주의 곁에 있을 때”: (1절) “주의 곁에 있을 때 맘이 든든하오니 주여 내가 살 동안에 인도하여 주소서, (2절) 피난처인 예수여 세상 물결 험할 때 크신 은혜 베푸사 나를 숨겨 주소서, (3절) 세상 풍파 지난 후 영화로운 나라와 눈물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저는 오늘 지난 주일에 묵상한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이어서 15절 한 절 말씀 중심으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말씀 그대로 제목을 삼고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고 또한 들은 음성에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13-14절에서 “두 문”(two gates)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묵상했었습니다. 그 두 문이란 바로 좁은 문과 넓은 문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15절에서 “두 동물”(two animals)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Willmington). 그 두 동물이란 바로 “양”(sheep)과 “이리”(wolves)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즉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며 조심하라’(Friberg)고 말씀하시면서 “양”과 “이리”를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이 두 동물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여러분, “양”하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양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양”하면 “순결하다”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밀가루처럼 흰 털로 덮인, 흠하나 점하나 먼지하나 없는 순백의 양이 상상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양”하면 “순진하다, 눈곱만큼의 악의도 그 눈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미지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은 자기에게 칼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을 정도로, 어찌 보면 이 세상의 온갖 악한 것들로부터 근본적으로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인터넷).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아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 볼 때에는 양 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선지자들의 양의 탈을 쓰고 양처럼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 거짓 선지자들은 양 같이 보여서 우리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을 것(harmless)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습니까?

 

아직도 기억납니다. 한 22-3년 전 제가 대학을 따닐 때 같은 기독교 동아리에 있었던 한 후배가 있었는데 그 후배가 이단에 미혹에 넘어가 거기서 빠져 나오느라 매우 고생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그 후배가 그 이단에서 빠져나온 후 기독교 동아리에서 간증을 한 것 같은데 그 후배가 한 말은 처음에 그 이단 사람들이 자기에게 너무나 nice하게 잘 해줬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이단 사람들은 그 후배를 집까지 초청해서 아주 잘 대접을 해준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속해 있는 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제 기억에는 그 교회가 속해 있었던 이단 교단 이름이 이단이 아닌 다른 교단과 이름이 같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교단과 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들이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특히 거짓 목사나 거짓 교사들이 양을 탈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가 힘들 때에 이것저것 베풀어 주고 잘해주고 사랑해 준다면 우리는 그들을 믿고 그들을 따를 위험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며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들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wolves)이기 때문입니다(마7:15). 여러분, 이리가 어떠한 동물입니까? 성경에서 “이리”하면 귀중한 양에게 해를 입히는 잔인한 동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창세기 49장 27절을 보면 야곱은 그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마지막 아들 베냐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의 잔악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양으로 박해하는 사람들을 “이리”로 비유하셨습니다. 즉, 양을 물어가는 짐승을 가리켜 “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가짜 목자가 바로 이리라고 지적하셨습니다(마7:15)(인터넷). 여러분, 여러분은 참 목자와 가짜 목자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요한복음 10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선한 목자, 즉 참 목자이신데 참 목자는 그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리와 같은 가짜 목자는 어떠합니까?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짜 목자를 “삯꾼”이라고 묘사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2-13절을 보십시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여러분, 삯꾼은 목자도 아닙니다. 그는 양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 결과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한 헤칩니다. 오히려 가짜 목자는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돌봅니다(겔34:2). 그리고 가짜 목자는 양 떼를 버리는 못된 목자(the worthless shepherd)라고 스가랴 11장 1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9-3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17절) 그들에게 한 말들 중 한 부분으로서 그는 그가 에베소 교회를 떠난 후 “사나운 이리”, 즉 거짓 선지자, 거짓 지도자 또는 거짓 목자가 그들에게 들어올 줄을 예상하였습니다. 그 거짓 목자의 특징은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 목자는 양 떼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가짜 목자를 “도둑”으로 묘사하시면서 그 거짓(가짜) 목자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양 떼를 아끼지 않는 거짓 목자가 왜 도둑질하는 아십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는 “노략질”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노략질”이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에는 ‘강도나 사기꾼과 같이 극심하게(난폭하게) 탐욕스러운(욕심 많은)’이란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Friberg). 여러분, 혹시 지난 주 인터넷 중앙일보 신문에 전북 익산의 한 보육원에서 장폐색 증상을 6개월 동안 앓았으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 상태에 있다가 지난 6월 1일 숨진 6살 난 장애아동의 사진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인터넷) 저는 그 사진을 보고 놀랐습니다. 뼈 밖에 남지 않은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말라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본 후에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사건에 대한 기사가 다른 신문이 매일경제에 6월 4일 날짜로 나와 있어 보았는데 그 기사 제목이 바로 “양의 탈을 쓴 나쁜 목사”였습니다(인터넷). 왜 기사 제목이 그런가 하면 그 죽은 아이가 살고 있었던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김모 목사(52살)란 사람인데 그는 선천적 뇌병변장애로 지속적인 병원치료가 필요한 그 죽은 6살난 장애아동을 6개월간 방치해 놓으면서까지 보육수당 1억 4000만원을 챙겨(원생 29명에게 지급되는 생계금여와 장애수당, 인건비 등의 명목) 개인생활비 등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의 딸과 백모 장로(57살)가 허위로 보육교사로 근무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월급 명목으로 1억 1185만원을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 유학 중인 딸에게까지 월급으로 1180만원을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김모 목사란 사람이 “두 얼굴의 목사”였다고 합니다. 즉, “앞에선 존경 받는 목사였는지 몰라도 숨겨진 뒷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10년 넘게 돌봐오면서 명성을 쌓아오던 교회 목사였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왜 “두 얼굴의 목사”, “양의 탈을 쓴 나쁜 목사”라는 제목의 뉴스 기사가 나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책임을 맡고 있는 아이의 생명보다 돈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짓 선지자(거짓 목사)는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마7:15).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흉악한 이리와 같은 거짓 목사는 하나님의 양 떼를 아끼지 않습니다(행20:29). 오히려 거짓 목사는 성도들이 정성 것 헌금한 돈까지도 도적질합니다(고전6:10). 그 이유는 그는 탐욕을 부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10절).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16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우리는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자들과 같이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욕심과 탐욕에 가득한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거짓 목사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거짓 목사를 주의하고 경계하며 조심해야 합니까? 저는 그 대답을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10장 16절 하반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먼저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로워서 사람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며 조심해야 합니다(17절). 왜 우리가 사람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며 조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1절에서 예언하셨듯이 지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마13:22)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로워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및 거짓 목사, 거짓 선생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데 지혜로워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16장 19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선한 데 지혜로워야 하지만 악한 데는 미련하고 또 미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마10:16). 여기서 “순결”이란 단어의 헬라어 문자적 의미는 ‘섞이지 않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오염되지 않은) 깨끗한’(unmixed, pure)이란 뜻입니다(Walvoord). 즉,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시12:6)을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벧전1:22).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 베드로후서 2장 1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지금 이 예언의 말씀대로 초대 교회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중에도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밀리에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이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단의 핵심은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이단을 이끌고 있는 교주들은 자기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 이단 상담소 협의회장이며 합동 이단 대책 위원회 전문 강사인 진용식 목사님은 2011년 5월 27일 LA 언약교회에서 “LA 이단대책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신도수가 몇 천 명 되는 재림주가 40명이 넘는다. 통계청 통계에 860만 명이 개신교인인데 그 중 200만 명이 이단 사이비에 빠져 있다. 20여 년 전에는 100명 이상 되는 이단 교회가 많지 않았는데, 요즘은 1000명 이상 되는 대형 이단 교회가 엄청 많다. 앞으로 10~20년이 지나면 한국교회는 정통교회보다 이단 교회가 더 많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인터넷).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단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단들을 좇는 사람들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요한1서 4장 1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