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장 13-14절]
여러분은 “예”할 때 “예”하시고 “아니오”할 때 “아니오”를 잘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제가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지난 주 목요일 새벽기도회 때 에스라 4장 3절 말씀을 묵상하다가 박윤선 박사님의 에스라 4장 1-3절 주석 해설을 보면서 이러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공통성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함께 하자고 할 때에 결단성 있는 거절 행위는 성경적입니다.” 물론 에스라 4장 3절 중심으로 묵상한 말씀에는 "유대와 베냐민의 대적"들(1절)이 유다와 베냐민 지도자들에게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2절)고 말하였지만 그들이 찾고 그들이 제사를 드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유일신)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것입니다(3절). 이렇게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단호한 거절 행위로 말미암아 그로부터(4절) 그들은 환난과 핍박을 당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환난과 핍박을 뻔히 당할 줄 알면서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처럼 단호하게 거절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상대방에게 “아니오” 하면 여러분이 고생을 하고 고난을 당할 줄 아시면서도 “아니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냥 상대방에게 “예”하기만 하면 고생도 할 필요가 없고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없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니오”면 “아니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3-14절과 연관해서 다시 질문을 드린다면 바로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아니오’라는 좁은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라는 넓은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 그 말씀을 그래도 제목으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시는 교훈을 받고 순종하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두 문이란 바로 “좁은 문”(the narrow gate)과 ‘넓은 문’(the wide gate)입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14절). 그리고 넓은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3절).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좁은 문”과 ‘넓은 문’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넓은 문이란 ‘큰 문’(the broad gate)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큰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many)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데 그 이유는 그 길이 넓기(wide)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 즉 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적다(few)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작은 문은 길이 좁기(narrow) 때문입니다. 여기서 ‘길이 좁다’는 말에서 “좁다”라는 단어의 원어 헬라어 문자적 의미는 ‘제한돼 있다’[“restricted”(Friberg)]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4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미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제한 돼 있다’라는 뜻입니다(Friberg). 그리고 한국어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라고(14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데 여기서 ‘협착하다’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 단어의 비유적인 의미는 ‘어려움을 당하다’(experience hardship) 또는 ‘고난을 당하다’(be afflicted)라는 뜻입니다(고후1:6)(Friberg). 즉,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은가 하면 그 이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제한돼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문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는 고난(환난)이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왜 많은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가고자 넓은 길로 걸어가는지 그 이유를 좀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그 넓은 길에는 고난과 환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넓은 길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넓은 길로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두 문(two gates), 두 길(two ways), 두 목적지(two destinations), 그리고 두 무리의 사람들(two groups of people)입니다(MacArthur). 첫 번째 무리의 사람들은 많은데 그들은 넓은 길로 걸어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목적지는 “멸망”(destruction)입니다(13절). 다시 말하면, 큰 문, 넓은 길을 걸어가는 많은(큰) 무리들의 목적지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무리의 사람들은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좁은 길로 걸어 작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데 그들의 목적지는 “생명”(life)(14절), 즉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큰 무리들은 누구이며 작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적은 무리들은 누구인가 입니다. 그 큰 무리들은 오늘 본문 배경을 볼 때에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그 큰 무리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서 “큰 거리”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큰 길을 말합니다(인터넷). 그 큰 길 코너에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그 길을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바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넓은(큰) 길로 걸어가는 많은 무리들입니다. 지금도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의 노력인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넓고 그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문은 큽니다. 예를 들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을 보면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의 노력(의지)으로 각자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불교를 들 수 있는데 불교에서 가르치는 구원론은 석가모니가 말한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수행 방법(팔정도)를 실천(행)할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불교는 자력구원사상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불교 신자들이 믿는 구원은 바로 고뇌의 순환적인 연속에서부터 벗어나는 (영원히 탈출하는) “해탈”(열반)입니다(인터넷). 또 다른 예는 이슬람입니다. 여러분, 이슬람의 구원관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슬람의 구원관도 자력 구원입니다. 즉, 이슬람교도(회교도)들은 코란경에 적혀 있는 계율들을 지키고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보다 더 많아지게 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각 개인의 책임인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면 힌두교는 어떻습니까? 힌두교에서 구원의 개념은 “개인의 영혼이 신적인 보편적 실재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데 힌두교도들이 믿는 신은 “브라만” 신인데 그 ‘브라만이 아트만 (인간)이다’라는 지혜를 깨달을 때, 윤회의 수레바퀴(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 육도의(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에서 벗어나 우주와 하나 되는 해탈의 경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힌두교의 구원 사상은 “인간이 곧 신이다”라는 것을 깨달아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과 아트만이 일치되는 길은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라가 요가(raga yoga)는 묵상이나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일치의 길을 제시하고; 카르마 요가(Karma yoga)는 행위를 통해서 브라만과 일치하는 길을 제시하며; 즈나나 요가(Jnana yoga)는 지식을 통한 일치를 시도하고; 그리고, 박티 요가(Bhakti yoga)는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신과 일치를 이루고자하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따라서 힌두교의 구원관은 결국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요가의 수련을 통해서 자신과 브라만의 일치를 깨닫고 자신을 구원하고자하는 자력 구원인 것입니다(인터넷). 여러분, 이들의 목적지는 결코 천국(영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목적지는 지옥(멸망)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는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성경 사도행전 4장 12절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무슨 뜻입니까? 천하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 이름(뜻: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뿐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예수님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누가 좁은 길을 걸으며 좁은(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무리들은 소수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그 소수의 무리들은 누구입니까? 이 소수의 무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적은 무리들은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신 오직 예수님(요14:6)을 믿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의 제한된(restricted) 무리들이라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제한된 소수의 무리들을 생각할 때 우리 개혁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제한적 구속”(Limited Redemption) 교리가 생각납니다. 여기서 “제한적 구속”이란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의 그 유명한 5대 강령 중에 세 번째 강령으로써 그 강령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한적 구속’의 교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시는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10장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셨는데, 어떤 양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양”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이 아닌 양을 위하여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내 양”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인터넷). “만일, 제한적 구속론을 반대하고 보편적 구속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위의 성경구절과 같은 잘못된 해석도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폄하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영혼, 한 명 한 명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면, 그 모든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멸망당할 영혼을 위해서도 죽으셨는데, 실상은,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니, 헛되게 죽으신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조금이라도 헛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이야기하면, 제한적 구속론은, 예수님께서 자기 양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셨으되, 그 죽으심은 그 죽으신 자를 위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효과를 갖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한적 구속론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는 어김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0장 28-29절로 돌아가면, 이 점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인터넷).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제한적 구속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의 가치와 능력에 어떤 제한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능력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 속에서 사랑하사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에게만 그 구원의 능력을 제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한적 구속을 믿는 우리들이 오해하여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 선택된 자에게만 구속이 일어나므로 일반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는 노방 전도 등 전도의 열정을 식게 해서는 인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정론과 제한적 구속을 철저히 믿는 우리 개혁주의 신앙인들은 이 점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인터넷).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 모르기에(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에)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모든 사람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이 소수임(제한돼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3-14절과 비슷한 말씀인 누가복음 13장 23-24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노력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안하는 자”가 아니라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어떤 사람이 던진 질문처럼 구원 받는 자는 결코 큰 무리가 아니라 소수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께서 그 좁은(작은) 천국 문을 한 번 닫으시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주여 열어 주소서”(Sir, open the door for us)라고 부르짖으면서 문을 두드려도(25절)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3장 25절을 보면 “집 주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그 결과 그 많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28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21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습니다. 사망의 길은 넓은 길이요 그 길로 들어가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은 쉽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Hagner). 그러나 생명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걷는 자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 좁은 문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9절).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0절).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