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대접하십시다.

 

 

 

[마태복음 712]

 

 

여러분은 대접을 잘 받고 살고 계십니까? 포항 사는 이승길 선생님이란 사람이 쓴 “대접 받는 방법 7계”가 있어 나눕니다. 아마 원제는 “나이 먹었어도 대접 받는 방법”인데 나이를 먹었든 안 먹었든(노인이든 젊은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터넷): (1) Clean Up - 집과 환경을 깨끗이 하라. 분기별로 정리-정돈하여-불필요한 물건은 과감히 폐기하라 귀중품-패물을 장롱 속에 감춰두어 녹슬게 하지 말아라. 유산으로 남겨보아야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살아 있을 때 친구나 이웃에게 선물로 주어보라.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 얼마나 멋있는가, (2) Dress Up -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하여 구질구질하지 않도록 하라. 옷을 아끼지 말라. 머리 염색을 하라. 유행하는 컬러의 옷을 입어라. 구두를 닦으라, (3) Shut Up - 입을 닫으라. 말하기보다 잘 들어라. “왕년에 내가...”, “옛날에 내가...”, “한 마디만 덧붙이면...” 하지 말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잘 알고 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 항상 내가 할 말이 꼭 필요한 말인가? 스스로 묻고 말하라, (4) Show Up - 모든 모임에 빠지지 말고 참석하라. 교회, 동창회, 향우회, 이색 모임, 동아리 모임...등등 아무튼 빠지지 말고 참석하여 부대껴라. Out of sight, out of mind(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귀찮더라도-가고 싶지 않더라도-가서 만나라, (5) Cheer Up - 언제나 밝고 기쁘게 살라. 밝을 일 없고 기쁜 일 없어도 밝은 척하고 기쁜 척하라. 신기한 일이다. 그리하면 없던 밝음, 없던 기쁨이 생겨난다, (6) Pay Up - 돈을 써라. 돈 이 없으면 몸뚱이로 내라. 몸뚱이도 시원치 않으면 입으로 덕담이라도 하라. 얻어먹지 말고 베풀어라. 베푸는 자가 복이 있다. 어디서나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입은 열수록 품위가 떨어진다. 지갑은 열수록 품위가 올라간다. 입은 닫고 지갑만 열면 그 품위는 하늘을 찌른다”, (7) Give Up -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포기 하라. 부부-친척-자식-친구-이웃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뭔가 미련을 두고 기다리지 말라. 바라지 말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음을 이제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미적미적 미련을 두지 말라. 그리하여 마음을 가볍게 하여 너의 길을 가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남을 대접하십시다”란 제목을 걸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어느 한 인터넷 칼럼을 보니까 “국제 거래 시 외국인 접대 어떻게 할 것인가?”란 제목아래 글이 있어 한번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그 글을 읽게 된 이유는 글을 쓴 사람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도 언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25년 이상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적도 문화도 다른 숱한 외국인들을 만나 접대하면서 외국인을 접대할 때 변치 않는 보편적 진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과 같이, 상대방을 말로서 뿐만 아니라, 정성으로 대접을 하면, 상대방으로부터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어느 누가 정성으로 대접을 받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대접을 받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 개인적 생각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 잘 못된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가 남을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나는 상대방에게 정성껏 대접을 받았는데, 그래서 나는 기분이 참 좋았는데 나는 그 상대방에게 정성을 들이지 않고 대충 대접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리 대접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축복의 원리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는 받는 기쁨은 알지 모르겠지만 주는 기쁨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남을 대접을 하긴 하는데 기쁜 마음으로 하기보다 불평, 원망하면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나와 있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마르다는(38절)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40절). 그런데 자기 동생인 마리아는 자기를 도와주지도 않고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39절). 그 때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마르다처럼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을 때 그래도 주님의 종을 영접하여 대접해야지 하고 집에 목사님에게 집에 오시라고 초청은 했는데 준비하는 일이 많으면 마르다처럼 반응하지 않겠습니까? 손님이 집에 왔는데 나 혼자 일하게 두는 내 남편이나 내 자녀들을 볼 때 가정주부들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마 그래서 분주한 이민 생활에 즐거운 마음으로 또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집에 손님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일을 자주 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베드로전서 4장 9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3절에서 이렇게 명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여러분, 이 두 성경구절 말씀만 생각해도 우리가 남을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원문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박윤선). 과연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7절 말씀과 유사한 누가복음 6장 31-32절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았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즉,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사랑해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사랑해 주는 것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을 생각할 때 복음성가 두 곡이 생각납니다. 물론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라는 복음성가도 있지만 특히 저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성가와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라는 복음성가입니다. 제가 “사랑”을 생각할 때 두 복음성가를 유난히도 생각하는 이유는 그 노래들의 제목 자체가 저에겐 위로와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태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에겐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그 하나님의 사랑. 저 같은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전하기 원하시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여러분, 태초부터 항상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 (이 세상에)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대로 우리가 우리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2절과 유사한 누가복음 6장 31-36절 말씀 중심으로 한 3 가지로 묵상하며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누가복음 6장 32-3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우리를 선대하는 자만 선대하는 것, 죄인들도 그리 한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분은 동의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자기들에게 선대하는 사람을 선대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랑만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들이 더 큰 사랑, 더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Radmacher). 우리 자매님들에게 한번 질문하고 싶습니다. 자매님들,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을 사랑해 주고 좋게 대해주면 당연히 여러분도 여러분의 남편을 사랑하고 좋게 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사랑을 안 해주고 있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을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를 선대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대한 자만을 선대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선대는 결코 주님께 칭찬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받기를 바라지 말고 사람들에게 꾸어주어야 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6장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우리가 은행에서 돈을 대출(융자) 받으면 우리는 그 대출 받은 금액뿐만 아니라 그 금액에 대한 이자를 은행에 갚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대학교나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집안이 재정적으로 그들을 도와줄 수 없으면 그들은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공부를 마치면 그 빚을 갚고자 직장을 잡아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빚은 융자한 돈 외에 이자도 붙어서 실제로 그 빚을 갚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구약 당시에 유대인들은 꾸어준 것에 대하여 이자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 성경이 이자를 붙이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레위기 25장 35-37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그리고 유대인들의 법에는 7년째 되는 해에는 모든 빚(debts)을 면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참고: 신15:9)(아마 지금은 우리가 은행에 융자한 돈은 우리가 죽으면 무효화 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음). 그러니 많은 유대인 채권자 입장에서는 7년째가 가까웠을 때 재정적으로 힘든 유대인들에게 돈을 꾸어주는 행위는 자기들의 투자를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꾸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꾸어준 것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조그마한 농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농부들은 당연히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 선생들은 이 법을 피하기 위하여 가나한 자들이 빌릴 수 있도록 하게 하되 그 조건은 빌린 것을 갚을 수 있을 때 유대인 채권자들에게 빌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무슨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며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6:34). 즉,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꾸어줄 때 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꾸어주라는 말입니다. 꾸어주되 꾸어준 돈을 받지 못하여 그 돈을 잃어버릴지라도 꾸어주라는 교훈입니다(Keener).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구약 성경 신명기 15장 7-9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모세의 율법에는 가난한 형제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은 넉넉히 꾸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꾸어주되 일곱 째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하여 아무 것도 (꾸어) 주지 않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그의 제자들에게 하라고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5장 43-44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구약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란 하나님의 말씀에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자기들의 옳지 않은 사상을 붙여 유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그것을 정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박윤선). 이 사랑의 본질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 여기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의 요점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선대하되 그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는 것입니다. 아니 가난한 자도 아니고 원수에게까지도 바라지 말고 돈을 꾸어주라고 하시는 이 예수님의 교훈을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선대하여 그에게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35절). 즉,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선대하여 아무 것도 바라지 말로 꾸어주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상이 클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자비로운 자가 돼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6장 36절을 보십시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를 묵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는 어떤 율법교사가(25절)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라고 여쭈었을 때 하신 말씀으로서 강도들을 만난 “어떤 사람”(30절)의 참 이웃이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니요 바로 그에게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입니다(33-37절). 예수님의 질문과 그 율법교사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36-37절).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 36절 말씀은 마태복음 5장 48절과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러분, 흥미롭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사랑에 대해서 말하다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적은 후 결론적으로 48절에 와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원수 사랑의 교훈을 말하다가 36절에 와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 두 구절을 함께 묵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연관돼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온전하신 사랑으로 원수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에게 자비(긍휼)를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는 아버지처럼 원수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런 잠언이 있다고 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보다도 위대한 일이다”(인터넷).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접이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기도와 예배로 부르는 교회의 종소리는 우리 귀에 아주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 대문의 초인종 소리도 실은 우리 귀에 친숙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손님 대접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베풂의 흐름이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로 계속되도록 이어주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감사가 사라지는 순간 이 거룩한 흐름은 거기서 중단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절하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사람들을 반겨주고 다정하게 대해줄 때 우리에게 흘러온 인생의 선물들은 다시 세상으로 흘러나가게 되며 그리하여 마침내 최초의 근원지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일상 속의 베풂이라는 흐름을 타고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선물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교훈 –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 – 이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데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여 선대해야 합니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기를 좋아하며 자비를 베풀므로 주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비추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