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마십시다.

 

 

 

[마태복음 71-6]

 

 

여러분 생각엔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신뢰가 점차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엔 왜 한국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012년 11월 16일, 한국기독교자교수협의회에 개최한 종교개혁 포럼(주제: ‘두 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에서 왜 한국 교회가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는지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이렇게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분리된 삶과 신앙 때문.’ 연세대 한인철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가 ‘신앙과 삶의 분리’임을 지적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되 굳이 예수님처럼 살 필요도 없다고 믿고 있다고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를 믿되,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지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천당 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처럼은 살고 싶지 않기에, 아니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싫어하기에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인터넷).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생각엔 왜 우리 기독교인들이 비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비판하지 마십시다”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3가지 교훈을 받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여러분, 혹시 “비판”과 “심판”의 차이를 아십니까? 인터넷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비판”이란 단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 그리고 유의어는 “비평, 판단, 평”이 있습니다(인터넷). 그리고 “심판”이란 단어는 “문제가 되는 안건을 심의하여 판결을 내리는 일”이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기독교에서는 “심판”이란 단어를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의 죄를 제재합니다.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인터넷). 제가 이 두 단어의 정의를 찾아 본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의 뜻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비판”은 네이버 사전에서 말하는 “비판” 즉 “사물의 옮고 그럼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인물 채용과 관련된 인격 비판을 금함도 아니고, 건덕상 유효한 인물 비판(비방이 아님)을 금함도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금하신 것은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재판장 격이 되어 남을 폄론 혹은 정죄하는 것입니다(인터넷). 실제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비판”이란 단어는 헬라 원어로 “크리네테”(κρίνετε)란 단어로 그 의미는 “심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인터넷). 즉,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심판과 정죄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11-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여러분, 우리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합니까? 우리가 누구이기에 우리 이웃을 심판합니까?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사도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야고보는 “비방”(slander)과 “판단”(judge)이란 단어를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서 이웃을 판단(심판)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비방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말은 네이버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면 ‘서로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지 말라’는 말인데(인터넷) 원어 헬라어적 의미로 해석하면 ‘서로 개인적인 비난(condemn)을 하지 말라’ 또는 ‘서로 단절/결점을 찾지 말라’(find fault with)는 말입니다(Friberg).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어기고 서로의 결점을 찾아 비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는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 이웃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로마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2장 1-3절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러분, 왜 로마 교회 성도들은 서로 판단하였습니까? 왜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형제들을 정죄하였습니까? 그 원인은 유대인 성도들이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교만했기에 이방인 형제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만했기에 자기들이 같은 일을 행하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 착각했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상대방의 행동을 보고 마음으로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였는데 후에 나 자신도 그 사람과 동일한 행동이나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을 깨닫게 된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와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내 자신이 상대방 보다 낫다고 착각하면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상대방을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깔보고 심지어 판단하며 정죄까지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리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영적 우월감이 드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마음에 특권의식과 공로의식 등이 은혜 의식을 대치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로마 교회 성도들처럼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하나님께 범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2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1절). 우리가 판단(정죄)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이웃을 판단(정죄)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가 저울질 당하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이웃을 저울질 하지 말아야 합니다(2절)(현대인의 성경).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 3-4절에서 한 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게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나 불신자들의 판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은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는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왠지 바울의 말이 교만하게 들리지는 않나요? 바울은 그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자기를 심판하실 이는 오직 주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바울은 재판장의 자리에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로 하여금 앉게 하지 않고 마땅히 앉아계셔야 할 주님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앉게 하였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복음 6장 37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는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서 14장 10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둘째로, 우리는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러분, 외식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주로 외식하는 자라 하면 위선자라고 생각합니다. 즉, 외식하는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는 겉과 속이 다른데 그는 속 보다 특히 겉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의 겉모양은 사람들 보기에 좋을지 모르지만 그의 속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는 죄악 된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을 좀 더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입니다(딤후3:5). 구약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욥 8:13; 15:34-35; 17:8; 사 9:17; 33:14). 그리고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와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는데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그들이 가진 목적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원했습니다(우리가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6장 2절을 보면 외식하는 자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는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음). 이러한 외식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는 판단하면서 자기 자신의 결점은 무시해 버렸습니다(마 7:1-5). 그러면 예수님 당시 누가 대표적으로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까?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종종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외형적인 태도와 내면적인 태도 사이에 모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마 15:1-9). 외식하는 자에 대한 언급이 제일 많이 나와 있는 장이 바로 마태복음 23장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설교한 대로 행하지 못하였습니다(23:3).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내부는 더러우면서 속만 깨끗한 척 꾸미는 회칠한 무덤과 비교하셨습니다(23:25-28)(인터넷). 그런데 질문은 과연 이러한 외식하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는가 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외식하는 자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혹시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하는 자들은 아닌지요? 특히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혹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는 판단(정죄)하면서 우리 자신의 결점을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큰 결점이나 죄는 보지 못하면서 교회 안에 다른 형제의 지극히 작은 결점이나 죄는 잘 보고 우리 마음으로 정죄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 속에 있는 “티”는 톱밥의 티나 나무나 깨진 유리 조각을 말합니다. 여러분, 톱밥의 티나 나무 조각 또는 깨진 유리 조각이 얼마나 작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외식하는 자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그 티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외식하는 자는 그리도 작은 형제의 흠(결점)을 잘 볼까요? 그 이유는 외식하는 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식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큰 결점을 보지 못하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지극히 작은 결점을 잘 보는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교회 안에 있는 다른 형제, 자매의 흠(결점)이 잘 보인다면 그 만큼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흠(결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점을 알고 있다고 말로는 하지만 마음으로 그 결점을 무시할 정도로 상대방 형제, 자매의 결점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외식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 사람들을 의식하여 우리의 겉모양은 깨끗하고 거룩한 척하고 있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그리 깨끗하고 거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형제, 자매에게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려고 할 것입니다. 외식에 대한 좋은 예가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곧,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유대인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그들을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12절). 그것을 본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대면하여 그를 책망하였습니다(11절). 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의 외식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14절).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책망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베드로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참 유대인이면서(16절)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이방 죄인”(15절)처럼 행한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베드로가 참 유대인(그리스도인)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떻게 이방 죄인들로 하여금 참 유대인(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저는 이 책망을 이렇게 한번 우리에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면서 왜 그 은혜 의식을 버리고 공로의식을 가지고 여러분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바리새인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선행이나 섬김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그 선행들을 마음속에 기록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것이며 우리의 속사람과 겉 사람의 간격은 더욱더 벌어져서 경건의 모양은 사람들 보기 참 좋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마음과 속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께 죄를 범하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양심은 화인 맞아서(딤전4:2) 자책감도 느끼지 못하면서 익숙한 종교 생활과 위선적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25-26절에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우리는 먼저 우리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야 합니다(7:5).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 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그 영적 거울로 우리 마음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 죄를 들추어내시고 우리의 양심을 찌르실 때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외식하는 자들처럼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지 않을 수 있습니다(막7:6). 그리고 우리는 외식하는 자들처럼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에게 보이는 구제나 봉사 등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겉으로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마23:28).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판단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재판장 격이 되어 남을 폄론 혹은 정죄하면 아니 되겠지만 우리는 올바른 판단은 해야 합니다. 여기서 올바른 판단이란 요한복음 7장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롭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롭게 판단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판별(discern)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자들로서 모든 것을 판단하되 특히 우리는 “영적인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13절).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 세상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으로 분별해야 할 영적인 일은(14절) 무엇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고 무엇이 이 세상에서 온 것인지(12절)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2장 16-1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야고보서 3장에 나와 있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와 이 땅 위로부터 온 지혜를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 땅으로부터 온 지혜는 우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여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것입니다(14절).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17절). 우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레10:10).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면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개나 돼지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더러운 동물들로서 오늘 본문에서는 악한 자들을 가리킵니다(MacDonald). 그리고 이 악한 자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권해야 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Keener). 성경 잠언 11장 22절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여러분, 돼지 코에 금고리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어울립니까? 돼지가 금고리를 귀하게 여깁니까? 돼지는 금고리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귀하게(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악인들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거룩한 것”(what is sacred)은 무엇일까요? 구약 성경을 보면 “거룩한 것”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말씀들을 보면 “거룩한 관유”(a sacred anointing oil)(출30:25), “성회”(a sacred assembly)(레23:7, 35; 신28:18, 25), “거룩한 세마포”(the sacred linen tunic)(레16:4), “거룩한 패”(the sacred diadem)(출 29:6), “거룩한 옷”(sacred garments)(출28:2), ‘거룩한 제단’(the sacred stones)(출34:13)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베드로후서 2장 21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거룩한 것”이란 “거룩한 명령”(the sacred command)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명령 또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악인들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근거는 사도행전 13장 46-48절에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했지만 그들이 그 거룩한 말씀을 거절하므로 스스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였기에 그들은 이방인에게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한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바울과 바나바처럼 지혜롭게 판단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거절하는 악인들에게 그 말씀을 주지 말고 돌이켜 그 말씀을 귀하게 여겨 듣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판단력(분별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신32:28).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한 예로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우리 가운데 형제간의 분쟁하는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원인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개”와 “돼지”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5절).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주님의 판단력을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72: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판단력으로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눅12:57).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선을 보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너나 잘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우리의 외식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외식을 인정하고 자백하며 회개한 후 버려야 합니다(벧전2:1). 더 이상 우리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진심(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해야 합니다(참고: 막7:6).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겉으로만 그리스도인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겉과 속이 일치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돼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것입니다(행11:26). 그러므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