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장 9-13절]
우리는 “너는 기도할 때”란 제목 아래 마태복음 6장 5-8절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첫째 교훈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유대인들의 공중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김세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위선적인 기도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둘째 교훈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신 후 그들에게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3) 셋째 교훈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신 후 8절에 와서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방인들처럼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아시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기도할 때 의미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8절에 와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공중 기도나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교훈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9절에 와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이 기도가 바로 우리가 종종 하나님께 드리는 “주기도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9-13절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한 4가지로 주기도문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받아 우리가 모두가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이십니다. 지난 주 월요일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기념하는 공휴일 가족 식구와 함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운전하고 가고 있는데 저희 집 막둥이 예은이가 가는 길에 도넛츠 집을 보고 저에게 ‘아빠, 저 도넛츠 사 줄 수 있어요?’라는 식으로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은이에게 우선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얘기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은이는 저녁 식사 도중에도 여러 번이나 도넛츠 얘기를 꺼내는 것을 제가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좀 끈기 있게 주실 때까지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저는 식사하다가 식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이 아빠가 예은이에게 도넛츠를 사준다는 확신이 있느냐?’ 결국 저는 식사를 다 한 후 그 식당 근처에 있는 도넛츠 숍에 가서 drive thru로 도넛츠 12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운전하고 돌아오면서 제가 예은이게 ‘너가 아빠에게 도넛츠란 말을 몇 번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조용하기에 알고 보았더니 자기 머리로 세고 있었습니다. 하하. 그러면서 나중에 하는 말이 ‘8번’이라고 하더군 ㅎㅎ 여러분, 누가복음 11장 11-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어느 아빠가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안다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면서 이러한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에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아빠’란 무슨 표현입니까? 그 표현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언어로서 성경에서는 언약 신학의 표현입니다(김세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여러 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을 목자로, 이스라엘은 양 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빠’로 표현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아들, 딸(자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독특한 관계는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5-16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5-1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우리가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상속자란 말은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그 모든 부유함을 상속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세윤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상속받는다는 것은 결코 모자람이 없는 그 하나님의 부요를 내가 끌어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 그것이 기도입니다”(김세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은 친근감을 강조하지만 ‘하늘에 계신’이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김세윤). 즉,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친근감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분이기도 하시지만 우리가 마땅히 경외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의존하며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김세윤). 이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마태복음 6장 8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기르시는 분이시요(26절) 우리에게 있어야 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32절). 우리는 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주기도문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3개의 ‘당신’ 청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보면 9절과 10절에 3개의 ‘당신’ 청원이 나옵니다: (1)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 (2)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10절), (3)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
- 첫 번째 ‘당신’ 청원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9절).
여기서 ‘이름’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 분으로서(출3:13) 하나님을 이름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김세윤). 그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기에 초월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기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스스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김세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겸손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 땅에서 높이면서 살아가야 함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 생각해 볼 때 저는 에스겔 36장 2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는 에스겔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므로 우리 자신들을 더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 에스겔 36장 21-2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정결케 하시되 우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당신’ 청원은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마6:10).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들 중에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 형제의 기도와 ‘18번 축복 기도’ 즉 ‘세모네 에스레(Shemone Esre)라는 긴 형태의 기도문이 있었다고 합니다(김세윤). 그 18번 축복 기도를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렸던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를 좀 알 수가 있는데 그들은 메시야가 오면 유대 민족을 로마 제국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이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 민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김세윤). 그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생각에는 메시야가 오시면 과거 유대 역사의 황금기의 회복과 유대의 공의로운 심판 시스템을 회복하고 지혜로운 현군의 통치가 있게 할 것을 믿었습니다(김세윤). 그리고 그들 생각에는 메시야가 오셔서 이단자들에 의해 섞이거나 부정해지지 않는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 즉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의 백성의 공동체로 지탱케 해 주실 줄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의 통치라고 보고 있었습니다(김세윤). 과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그저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유대 민족주의적 회복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 민족의 정치적 해방과 사회적 공의와 경제적 풍부함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0절 상반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 내용 중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가 오길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즉, 이 기도는 ‘오게 하소서. 당신의 통치가 오소서”라는 기도입니다(김세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결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렸던 민족주의적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의 공동체로서 로마 제국의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죄와 영원한 죽음과 사단에서의 해방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모든 풍성한 영적 축복들을 누리면서 영원한 나라의 공의가 실천되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 “(당신의) 나라이 임하시오며”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3) 세 번째 ‘당신’ 청원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10절하).
이 기도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입을 여시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기 전날 밤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저는 지난주에 요한복음 말씀을 듣다가 요한복음 12장 27-28절 말씀에 좀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던 예수님은 그러나 자신이 이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음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2:8).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의 본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이루어 드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계신 주기도문처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그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 로마서 12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롬12:2). 그리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주기도문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3개의 ‘우리’청원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1절에서 13절을 보면 3개의 ‘우리’ 청원이 나옵니다: (1)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첫 번째 ‘우리’ 청원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11절).
이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으로서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김세윤). 성경 출애굽기 16장 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 당시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2-3절)라고 말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4절).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시사(8, 9, 12절)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려주셨습니다. 내려주시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사 날마다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16절).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양식)을 남겨두지 말라고 명했습니다(19절).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그 양식을 두었으므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20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을 내려주시되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을 거둘 수 있도록 내려주셨습니다(5, 22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 다음 날 일곱째 날이 하나님께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23절).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엿새 동안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거두되 여섯째 날에는 갑절로 거두어 드리므로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아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6장 2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식사기도 할 때 ‘오늘 우리(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혹시 여러분 중에 식탁 앞에서 마치 어린 아이처럼 음식투정을 부리면서 왜 이렇게 먹을 것이 없어 등등 말하면서 불평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는 출애굽기 16장을 새벽기도회 때 묵상하면서 놀랍고 감사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 없어 주려 죽는다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원망함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40년 광야에 있을 동안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공급해 주셨다(35절)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과연 그 40년 동안 수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뭔가를 잘해서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40년 동안이가 계속해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시78: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계속해서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별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 탐욕으로 인하여 일용할 양식을 매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기보다 불만족 속에서 불평이나 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순종하지 않을 때가 수 없이 많지 않습니까? 특히 마태복음 6장 25절과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1-32절)고 말씀하고 계신데 실제로 우리가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것으로 염려하여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이러한 염려 가운데 이런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32절). 이 불신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만족 속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신 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이 모든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에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33절).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2) 두 번째 ‘우리’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12절).
이 기도를 자세히 주목해서 보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는 저자 마태가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 11장 4절에서 저자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 “빚들”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니면 “죄들”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풀러 신학교 신약 교수이신 김세윤 박사님에 의하면 원래 예수님께서는 저자 마태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2절에서 말한 것처럼 “빚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원어 헬라어로 누가복음 11장 4절 하반절을 보면 저자 누가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 모두를 용서합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원래 용어가 “빚들”인데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 11장 4절 상반절에서 “우리의 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누가는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기에 이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 누가는 유대인들이 생각한대로 죄를 하나님의 빚으로 보고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기보다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한 것입니다(4절). 그가 유대인적 숙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그리 쓴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는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김세윤).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죄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빚진 자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웃이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9-13절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후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드린 후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잘못을 한 사람을 용서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한 사람이나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잘 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죄 용서가 우리를 통해 우리 이웃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많이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적으면 우리는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범한 죄를 적에 용서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여 사랑함이 많으므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3) 세 번째 ‘우리’ 청원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마6:13).
이 기도는 유혹에 빠져 가지 않도록 허용하지 말아주시고 사단(악)에게서 건져(구원해)달라는 기도입니다(김세윤). 여러분, 왜 우리가 유혹에 자꾸만 빠집니까?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14-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욕심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욕심에 끌려 살아가면 우리는 유혹의 욕심으로 인하여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라 옛 사람(엡4:22)의 라이프스타일로 죄를 지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고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케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3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3가지 영역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단은 우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고 유혹하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 것들을 구하는 삶을 살게 하므로 죄를 짖게 하여 죄로 장성케 하여 사망을 낳게 만듭니다(약1:15). 그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입니다. 성경 창세기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육체의 정욕),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또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이생의 자랑)는 것은 바로 그녀는 사단의 유혹인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우리가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이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 사단의 나라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마6:33). 결코 우리는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의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26:41). 우리는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로부터 지금 여기서 건져냄을 받게 하여 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해야 합니다(김세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완성되길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해야 합니다(김세윤).
마지막 넷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주기도문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송영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주로 “송영”이라고 부릅니다. 송영이란 무엇입니까? 송영이란 문자적으로는 외워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서 주로 예배 시작이나 마지막에 들어가는 기도 형식의 송가입니다(김세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3절 마지막 부분에서 송영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원래 유대교의 기도 관행에 의하면 하나님을 축복하는 ‘송영’없이 끝나는 기도가 없다고 합니다(김세윤). 이 송영의 문자적 의미는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니다(김세윤). 여기서 “왜냐하면”(For)이란 접속사는 13절 상반절에 나와 있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란 기도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송영과 관련해서 우리의 이해를 도을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디모데후서 4장 17-18절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8절 말씀을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3절에 나와 있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단의 나라에게 건져주시사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와 하나님의 권세(power)와 하나님의 영광(glory)을 송영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이 시간 다 일어나서 새 찬송가 635장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다 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