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행복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10-12절]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못살게 괴롭힘을 당하여 해를 입으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과 신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해를 입으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주 화요일, 저희 교회가 소속돼 있는 노회 모임 때에 한 선배 목사님의 사모님이 노회원들에게 허락을 받고 ABC 교육위원선거에 출마하는 것에 대해서 짧게 말하셨습니다. 그 사모님의 말로는 지금 캘리포니아 공립학교에서 성전환 학생들이 자신이 선택한 성에 따라 화장실을 선택해 사용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고 합니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시사인 제리 브라운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법안(AB1266)에 서명했으며 2014년 1월 발효된다고 합니다. 그 사모님은 이것을 반대한다는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하니까 아마 선거하시면서 이런 저런 힘든 일들을 접하시는 것 같아 제가 그랬습니다, ‘사모님, 이젠 사모님은 원수들이 많이 만드시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짝하여 타협하지 않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라 살려고 하면 원수들을 많이 만들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 말씀의 진리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비방하며 해하려는 사람들이 당연히 생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뻔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을 당하며 박해를 받을 줄 알면서도 여러분은 계속해서 여러분이 믿으시는 예수님을 따라 가시겠습니까? 계속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계속해서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0-12절을 보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여덟 가지 행복 중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인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4 가지 요구(명령)들 중 마지막 네 번째 요구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네 번째 요구는 바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라’입니다.
지금 21세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데이비드 바렛 선교사와 해외선교연구센터(OMSC, Overseas Ministries Study Center)가 발표한‘20세기와 21세기를 배경으로 한 2003년도 선교동향’에 의하면, 올해 기독교 순교자의 숫자가 16만 6000여명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3년 전인 2000년의 순교자 수는 16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최근 3년간 연평균 순교자의 숫자는 1.24%씩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라면 2025년에는 한해 21만 명이란 엄청난 숫자가 순교를 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순교자 발생지역은 대부분 기독교 박해국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남 라오스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부탄 몰디브 소말리아 등등. 여러분, 왜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이 아닙니까? 아랍계 회교 국가들의 대부분이 종교적 극단주의로써, 기독교 박해에 적극적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기독교 탄압이 가장 심하고 가장 폐쇄적인 회교국가입니다. 모든 국민들은 국가로부터 무슬림이 될 것을 강요받고 있으며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고 합니다. 무장 이슬람 단체들에 의한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파키스탄, 수단,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취약지구에서 빈발하고 있습니다. 중국, 북한, 라오스, 베트남, 쿠바 등 잔존하는 공산주의 국가들 또한 기독교 교회를 위협하고 압박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런데 이렇게 위협과 압박과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서 박해를 받지 않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국과 같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회교도나 공산국가에서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아니잖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이나 박해를 받는 것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정화되기 때문에 고난이야 말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또한 고난과 박해가 축복인 이유는 고난과 박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의를 위하여”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5장 6절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란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미 배운 것처럼 “의”라는 단어는 크게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3 가지 의미 중 첫 번째 의미인 “(정)의”(righteousness), “옳은 것”(what is right), “공의”(justice)가 바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정의, 또는 옳은 것, 또는 공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의를 행하는 것, 즉 정의(공의)를 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한다면 당연이 우리는 옳은 일을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이것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옳은 일(정의/공의)을 행함에 있어서 머뭇거릴 때가 있고 또한 우리는 심지어 많은 때에 이 세상과 타협까지 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 적어도 ‘내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옳은 일(정의/공의)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있어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2장 19-2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말씀 외에도 성경 베드로전서 3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러분, 당연한 말씀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당연히 나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의를 위하여 부당히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과 고통을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5장 11절을 봐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11절 말씀은 10절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말씀은 “나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의 삶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박해를 받으며 거짓으로 그들이 우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하는 것 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뒤돌아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들로 부터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은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로마 황제들 중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재위 기간 54-68)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학살하였고, 사도들의 살해를 맹렬하게 추진한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Dominus et Deus·주主와 신神)’라 칭하고 황제 숭배를 명령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기간 81~96)는 불복종하는 성도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박해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는 일절 금지되고 맙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기간 284~305) 때에는 네 차례에 걸쳐 칙령이 반포됩니다. 그 반포된 칙령은 이랬다고 합니다: (1) 기독교의 예배당을 헐어버리고 기독교의 책을 불태워 버릴 것, 그리고 신앙을 공언하는 자는 관직을 박탈할 것, (2) 교회의 목사와 직원을 전부 잡아서 옥에 가둘 것, (3) 제사하는 날에는 감옥의 문을 열고 여러 신들에게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기독교인은 석방할 것이며 거절하는 자는 고문할 것, (4) 로마 제국의 모든 인민으로 하여금 여러 신들에게 절하게 할 것이며, 희생의 제물을 바치게 할 것. 이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참한 고문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채찍질을 당한 뒤 피에 굶주린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거나 화형을 당하고, 사지가 찢기는 등 끔찍하고 야만적인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시신은 방치되었다가 불에 태워지거나 강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결국 로마 제국은 정부의 위력으로 그리스도교를 박멸하려 했던 것입니다(인터넷). 성경의 히브리서 11장 33-3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러분,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심지어 죽임(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환난과 핍박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날마다 어디에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삶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인 모세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므로(히11:26)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이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해야 합니다(25절).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26절)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모든 박해(마5:11)를 이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야 합니다(히11:26). 그리할 때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여덟 번째 행복인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마5:10).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몇 주 전에 제 딸하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제가 그 아이에게 고 주기철 목사님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기억으로는 제가 제 딸에게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까지 하게 된 이유가 그녀가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기 때문으로 기억합니다: ‘아빠는 어떻게 할거예요?’ 그녀가 저에게 그리 질문한 이유는 제 전도 대상자 친구가 그 전 주말에 만났을 때 저에게 ‘만일 동성연애자가 너에게 와서 주례를 서 달라고 하면 너는 뭐라고 할거냐?’는 질문을 제가 그녀에게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을 들은 제 딸은 저에게 ‘아빠는 어떻게 할거예요?’라는 식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기에 이 아빠는 “No”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해주면서 저는 어릴 때 제가 본 고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영화를 기억나서 예리에게 우리 한국 신앙의 귀한 본이 되는 순교하신 고 주기철 목사님에 대해서 말해준 것입니다. 고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25일 태어나셔서 1944년 4월 21일, 47세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옥사한 분이십니다(인터넷). 그 분의 넷째 아드님이신 주광조 장로님이란 분이 아버지의 순교증언 내용 중에 이러한 글을 쓰셨습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닌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더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고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기도문입니다. 다섯 기도 제목 중 특히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첫 번째 기도 내용과 네 번째 기도 내용 그리고 다섯 번째 기도 내용을 여러분과 나눕니다(인터넷): (1)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 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모른다고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열백 번 죽음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죽이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리이다.” (4)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우상 때문에 정절을 잃어버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 피할 수가 있사오리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에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5)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에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