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행복 (6):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8절]
혹시 여러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중에 “바.보.”가 있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서 ‘당신은 바.보.야’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으십니까? 여기서 “바.보.”란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이 ‘바보’라는 은어의 의미를 듣고 ‘나는 바.보.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라보면 볼 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보고 싶은 사람을 보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도 못 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잠들었다면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더욱더 사랑하는 고인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하는 고인을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5장 7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요구는 바로 ‘긍휼이 여기라’는 것입니다(마5:7). 긍휼이 여기라는 말씀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받되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다섯 번째 행복은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 배운 말씀을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마음은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요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가난하므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는 마음이요 또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용서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두 번째 요구를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 중심으로 배우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 두 번째 요구는 바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두 번째 주님의 요구를 생각할 때 제가 2007년도에 처음으로 쓴 책 제목인 “마음이 정결한 자”가 생각납니다. 그 때 책 제목을 그리 정하게 된 제일 큰 이유는 제가 시편 73편을 묵상하다가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란 이 죄악 된 세상에 우리 마음을 미혹하여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모든 죄악 된 것들로 부터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 아삽이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고 고백하였는데(1절) 그 자신조차도 한 3 가지로 말미암아 거의 실족할 뻔한 것을 묵상하면서 저(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음의 정결함을 지키지 못하게 실족케 하는 이 3 가지 요소를 경계해야겠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 3 가지 요소란 (1) 악인의 형통함을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삽처럼 질시하여 실족할 수 있다는 것(3절), (2)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삽처럼 고통당하여 실족할 수 있다는 것(6절), 그리고 (3) 악인을 좇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우리도 아삽처럼 실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11절). 시편 기자 아삽은 이러한 악인의 형통과 악인의 교만과 악인을 좇는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면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고 했습니다(13절). 다시 말하면, 그는 악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기 마음을 정히 한 것이 헛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곤고한 삶을 한탄했습니다(14절). 그는 자신은 정결한 마음을 지키고자 의롭게 살았는데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악인은 교만하고 죄를 범하는데도 형통한 것을 보고 시기하여 거의 실족할 뻔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시편 기자 아삽처럼 거의 실족할 뻔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왠지 모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이 옷에 먼지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뭐 그리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한 부분으로는 마음이 자책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의 한 부분은 뭐 이 정도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하는데 그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를 볼 때 우리는 입술로는 칭찬과 존경을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줄 모르는 무지하고 미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의 내용 중 고린도후서 11장 3절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지금 사단은 그의 간계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는데 그 미혹의 목적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얼마나 많이 떠나 있습니까? 여러분이 볼 때 여러분 주위에 ‘아 저 사람은 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저 사람은 참 깨끗한(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몇 사람이 있습니까?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미혹을 받아 마음의 진실함과 정결함을 잃어버렸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진리와 거짓이 섞여 있으며 또한 세상의 죄악된 것들로 오염돼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까? 여기서 마음이 청결한 자란 말은 원어 헬라어의 의미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범법행위에서 자유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 죄 없는 사람입니다(Friberg).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청결한 자”란 죄의 책임과 죄의 오염으로부터 영적으로 깨끗함 또는 정결함을 받은 자를 가리킵니다(Zodhiates). 여기서 영적으로 정결함 또는 깨끗함을 받았다는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선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 발 씻기시는 말씀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마음이 청결한 자”란 헬라어 단어가 요한복음 13장 10절에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3장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목욕한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목욕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온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주시사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찬송가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절)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후렴)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에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4절)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라.”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김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요 죄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청결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그리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범하고 또 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원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장차 죽을 때까지 지을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아직도 질적으로 우리는 불의를 행하며 죄를 범할 수 있는 이 육신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의 의복을 입어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원하는 의는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불의를 행하는 옛 사람의 본능이 아직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전가”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전가”하면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데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은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 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의로우신 예수님께 전가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대속 죽으셨다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죄가 있으신 분입니까? 그것은 절대 아니잖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은 받았지만 우리가 완전한 의로운 사람들입니까? 그건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죄를 범하고 있잖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행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해야 할 두 번째 의는 바로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한 3가지로만 생각해 봅니다:
(1) 우리는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5장 4절 말씀처럼 “애통하는 자”가 돼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괴로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하고 부서진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통회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날마다 그리고 순간순간 마다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는 삶에 기본이요 근본입니다.
(2) 우리가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둬야 합니다.
성경 시편 119편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주님께 죄를 범치 아니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둬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둘 수가 있습니까? 성경 시편 119편 9절을 보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기 위해선 그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 그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56절).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1:22). 그렇게 하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청결을 추구해야 합니다.
(3) 우리가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기 위해선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돼야 합니다(마5:3).
우리는 영적 궁핍을 느끼되 우리 스스로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하나님 밖에 도와주실 분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그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 기도 내용 중 시편 51편 10절을 보면 이러한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복음성가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가 생각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2x)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에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며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이렇게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 행복은 바로 장차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5장 8절을 다시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성경 요한일서3장 6절을 보면 “범죄하는 자마다 그(주님)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요한삼서 1장 11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악을 행하며 죄를 범하는 자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와 여러분 같이 죄인이었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아 장차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게 되데 성경은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3:12). 상상이 되십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는 사실이 상상이 되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마음의 청결한 자에게 이 행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마5:8). 여러분, 이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주 목요일 새벽에 목양실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새벽 4시쯤에 깨었습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는데 그 날 꿈속에서 그리운 고 김창혁 목사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김 목사님께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원로 목사님이 왔다 가신 후 목사님께서 저에게 한 성경구절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인용하신 성경구절이 바로 창세기 33장 10절 하반절 말씀이었습니다: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 그 때 목사님은 목사님의 형님이신 원로 목사님을 뵙고 나신 후 이 말씀을 저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 목요일 새벽에 꿈속에서 뵌 고 김창혁 목사님의 얼굴이 저에겐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의 밝고 환한 인자한 미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미소의 얼굴로 저에게 다가오신 목사님을 제가 꿈속에서 꼭 포옹했습니다. 그러면서 꿈속에서 울었는데 잠에서 깨보니 제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여러분, 시편 17편 1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여러분, 우리는 의로운 중에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마음이 청결하게 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주님을 뵐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올라가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집에서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 때에 먼저 잠든 성도님들과 함께 우리가 모여 영광중에 계신 주님께 할렐루야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빛난 하늘 그 집에서 주님의 얼굴을 뵈는 그 날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인 영혼들을 긍휼이 여기며 또한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며 살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