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행복 (5):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7절]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여덟 가지 행복 중에 네 번째 행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 복이란 바로 ‘배부름’ 또는 ‘만족함’입니다. 우리가 그 네 번째 복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좀 더 자세히 짚고 넘어가지 않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의”라는 단어의 3가지 의미입니다(Swanson): (1) 첫 번째 의미는, “(정)의”(righteousness), “옳은 것”(what is right), “공의”(justice)입니다. 그 한 예로 우리가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5장 6절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란 말씀 외에 또 다른 예는 바로 마태복음 5장 10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의”란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자기 의’나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 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대신 죽으시사 죄의 값을 다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에 근거한 의입니다. (2) 두 번째 의미는, “누군가와 옳은 관계에 두다/있다”(be put right with, be in a right relationship with). 성경 로마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으심과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다 함을 받으므로 이젠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옳은 관계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의미는, 종교에서 요구하는 법이나 의식을 행하는 것(religious observances such as practices required by a religion). 성경 마태복음 6장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의”란 바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2-4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하심을 얻고자 하였는데 그들이 힘써 지키고자 했던 율법 중 하나가 바로 구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구제함에 있어서 외식으로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보이게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처럼 그리 구제하지 말고 은밀하게 구제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한 삶은 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을 은밀하게 구제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의인이 구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바리새인들처럼 공로의식으로 의를 얻고자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5장 6절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란 말씀에 있는 “의”라는 단어가 그 본문에서 의도한 의미 외에도 2 가지 의미가 더 있습니다. 그 2 가지를 다시 요약한다면,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옳바른 관계에 있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하나님의 요구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7절부터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7절을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시는 여덟 가지 행복 중 다섯 번째 행복인 ‘긍휼이 여김을 받음’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긍휼”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헨리 나우웬이 쓴 책 “긍휼”이 생각납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긍휼”이란 라틴어로는 ‘파티’(pati)와 ‘쿰’ (cum)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 두 단어를 합치며 ‘함께 고통 받다’라는 의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영어로는 “compassion”). 즉 긍휼이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는 것입니다(나우웬). 또한 저자는 “긍휼”이란 히브리어로 ‘라카밈’(rachamim)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 자궁에 대해서 좀 인터넷을 뒤져 보다가 '자궁의 지혜'를 좀 알게 되었습니다. 한 3 가지로 요약을 해보았습니다(인터넷): (1) 자궁의 특징(지혜)은 “모든 신체 조직이 이물질을 거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자궁은 이물질에 해당하는 수정란(나팔관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된 란)을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후에 만들어진 태반혈관이 자궁 내막 속으로 파고드는 것까지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2) 태반 혈관의 침투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자궁내 혈관과의 소통을 이루게 해 영양을 공급하고 태반을 자라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태반 혈관의 침투를 무한정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태반 혈관이 어느 정도 파고든 다음에는 더 이상의 침투를 억제해 태반 혈관 이 모체 전신으로 도는 혈관과 소통하는 것을 막는다고 합니다. (3) 자궁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모든 세포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마련인데, 자궁 내막은 호르몬을 분비해 열 달 동안이나 세포의 자연사를 막아 준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자궁은 임신 초기 견고하고 두꺼운 모습을 보이나 임신 후기에는 얇고 부드럽게 돼 산모의 배 벽에서 태아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3 가지 자궁의 특징을 하나님의 긍휼과 비교해 보면서 한 3 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마치 자궁이 “이물질”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십니다. (2) 마치 자궁이 태반 혈관의 침투를 받아들이므로 태반을 자라나게 하도록 영양을 공급하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 침투까지 용납하시므로, 즉 죄를 대신 걸머지시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주님께서 더 이상 죄 침투를 당하지 않고 온 몸과 영혼을 더럽히지 못하게 죄의 소통을 막아주십니다. (3) 마치 자궁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동안 세포의 자연사를 자궁내막이 막아 주고 또한 임신 후기에는 산모의 배 벽에서 태아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고자 자궁이 얇고 부드럽게 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동력있고 주님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도록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 자”란 (지위, 중요도가) 낮은(하찮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보이는 자를 가리킵니다(Swanson). 이것을 헨리 나우웬의 라틴어 정의로 말하자면 (지위, 중요도가) 낮은(하찮은)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는 자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란 말입니다. 이러한 자를 가리켜 성경은 “자비로운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의 자비로움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6장 35-36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악한 우리에게도 인자하시므로 자비로우심을 베푸셨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2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로우심은 바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리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과 속량으로 죄 사함을 받아 주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긍휼)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긍휼)를 베풀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체적으로, 한 2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자비)을 베푼다는 말은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실제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7절에 나오는 “긍휼히 여기는 자”란 헬라어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자애로운 행동이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Kittel).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선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도 드립니다. 다시 말하면, 자비로운 사람은 이웃 사랑에 있어서 구제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 생활을 신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구제함”에 대해서 말씀 하신 후 5절부터 15절까지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 고넬료입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십시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31절). 즉,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경건은 기도와 구제라는 말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그것은 세상에서 낮은 곳에 있는 과부와 고아 등을 돌보는 것이요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으로 구제와 기도에 힘썼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또한 이웃 사랑에 있어서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행10:2). 그러므로 그는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던 사람이었습니다(22절). 우리도 고넬료처럼 이러한 칭찬받은 경건의 사람이 되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참고: 딤후3:5).
(2)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자비)을 베푼다는 말은 우리가 그 이웃을 불쌍히 여겨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8장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드신 것으로서 그 비유를 드신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라고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절)고 말씀하신 후 어떤 임금이 그 종들과 결산하는 비유를 들으셨습니다(23절). 그 결산 비유 이야기에는 임금(주인)에게 만 달란트 빚진 자와(24절) 그 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28절)가 나옵니다. 그 임금이 만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다 탕감하여 줬는데(27절) 그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30절).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자기가 불쌍히 여겨 만달란트를 탕감해준 종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절). 여기서 “불쌍히 여김”이란 단어가 바로 “긍휼히 여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핵심은 마음으로 부터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용서해 주신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죄진 자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엡4:32).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5장 7절을 다시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섯 번째 행복인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요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제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긍휼이 여기므로 그 이웃의 죄를 용서해 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되 우리가 외워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복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 즉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지 못하므로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불쌍히 여기므로 구제하며 도와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선행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한 600년 전에 영국에서 살았던 줄리안은 세 가지 상처를 받기 원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토저): (1) 회개의 상처입니다. 줄리안은 “오 하나님! 제가 회개의 아픔으로 상처를 받게 하옵소서. 제가 범죄 한 것을 슬퍼하게 하시고, 그 슬픔 속에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입니다. 줄리안은 “하나님! 하나님을 저에게 주소서. 하나님 한 분으로 저는 족하나이다. 하나님보다 못한 것을 추구한다면 저는 언제나 목마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오, 하나님! 불치의 향수병으로 저에게 상처를 주소서. 이 세상이 저의 고향이 아니오니, 어찌 이곳에 정착하리이까? 어찌 하늘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3) 긍휼의 상처입니다. 줄리안은 예수님처럼 세상을 불쌍히 여기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A. W. 토저 목사님은 오늘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물질주의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통교리를 믿지만, 긍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토저 목사님은 긍휼의 상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상처를 결코 치료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그들의 상처에 동참하고 싶다”(토저).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회개의 상처를 주시되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불쌍히 여겨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는 죄를 회개케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주시사 더욱더 천국을 그리워하며 이 땅에서도 천국 생활을 부분적으로 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의 상처를 입혀주시사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긍휼이 여겨 함께 고통을 느끼며 그들의 상처에 동참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