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행복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태복음 56]

 

 

여러분은 지금 만족감을 느끼시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도 측정을 위해 미국의 에드 디너 박사가 개발한 퀴즈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 퀴즈에는 5개의 질문이 있는데 그 질문을 답하실 때 점수를 매겨야 하는데 답 1은 “확실히 아니다”, 답 2는 “아니다”, 답 3은 “약간 아니다”, 답 4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답 5는 “약간 그렇다”, 답 6은 “그렇다” 그리고 답 7은 “확실히 그렇다”입니다. 이렇게 1에서 7까지 각각 다섯 개 항목의 질문을 답하신 후 그 숫자를 다 합해서 31-35점이 나오면 “극도로 만족”, 26-30점이 나오면 “매우 만족”, 21-25점이 나오면 “약간 만족”, 20점이 나오면 “중간”, 15-19점이 나오면 “약간 불만”, 10-14점이 나오면 “매우 불만” 그리고 5-9점이 나오면 “극도로 불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그 다섯 항목의 질문을 던집니다:

 

(1) 전반적으로 내 인생은 내 이상에 가깝다. 1 2 3 4 5 6 7

(2) 내 인생의 여건은 매우 좋다 1 2 3 4 5 6 7

(3) 나는 인생에서 원하는 중요한 것들을 이미 얻었다 1 2 3 4 5 6 7

(4)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바꾸고 싶은 게 거의 없다 1 2 3 4 5 6 7

(5) 앞으로 삶의 틀을 바꿀 생각이 별로 없다 1 2 3 4 5 6 7

 

제가 이 행복도 측정을 위한 5가지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보고 1에서 7까지 점수를 매긴 후 다섯 항목의 모든 점수를 합해 보니까 30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30”이면 뭔가 보았더니 “매우 만족”(26-30)이었습니다. 그러나 “극도로 만족”(31-35)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행복도 측정을 위한 5가지 질문의 퀴즈가 진정으로 제 자신의 행복도를 다 측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다섯 가지 질문의 답이 저에게 있어선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질문인 “전반적으로 내 인생은 내 이상에 가깝다”고 할 때 저에게 있어서 그 “이상”은 예수님이요 두 번째 질문인 “내 인생의 여건이 매우 좋다”와 세 번째 질문이 “나는 인생에서 원하는 중요한 것들을 이미 얻었다”고 할 때 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을 다 받았기에 제 여건은 매우 좋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제일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주님 한 분만으로”라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모든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인터넷).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네 번째 행복은 바로 ‘배부름’입니다. 여기서 ‘배부름’이란 달리 말한다면 ‘만족함’(be content)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네 번째 행복은 바로 만족(contentment or satisfaction)입니다. 미국(Harvard Mental Health)에서 실시된 정신건강 관련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행복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2008년 18세에서 85세 사이의 성인 34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응답 조사에서 연구진들은 응답자들의 나이, 대인관계, 건강, 수입 등에 대한 인생의 만족도를 1에서 10까지 응답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응답자들에게 인터뷰 전날 느낀 행복, 슬픔, 분노, 스트레스, 근심과 같은 감정적 경험에 대해서도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를 통해 연구진들은 중년(특히 50세-53세 사이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분노나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50세가 되면 어떠한 것에 대하여 근심을 덜하게 되고 행복감과 기쁨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인생의 만족도는 18세에서 50세까지 감소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실제로 82세에서 85세의 사람들은 18세와 21세 사이의 사람들보다 인생의 만족도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연구진들은 50세에서 53세까지가 인생 만족도의 전환점이 되는 이유를 확실히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사람들은 중년이 되면서 감성지능이 높아지고 큰일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등 부정적인 것들보다 긍정적인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이 조사의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생각에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의 만족도가 높아져서 더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조사 결과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또한 공감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에게 공감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의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을 수 있는 원인은 바로 욕심(소유욕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 모세 시대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수시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그리도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까? 마음에 불만족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만족이 있었습니까? 성경 민수기 11장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워 먹게 하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한 이유는 불만족이요, 그들의 마음에 불만족이 있었던 원인은 바로 탐욕(greedy desires)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했기에(시106: 14) 하나님과 모세에게 수시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에 탐욕이 있으면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갈 것이기에 결코 행복을 느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이 탐욕을 버리고 또 버리므로 만족감을 느끼면서 자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나이가 들만큼 들은 어른들 중에도 아직도 마음에 이 탐심,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만족하지 못하고 자족하지 못하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네 번째 행복은 “배부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만족할 것이요’라는 뜻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누가 무엇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 상반절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를 것이다(만족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의(righteousness)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의”란 단어는 구약에 500번 그리고 신약에는 225번 나옵니다(Achtemeier). 그리고 이 “의”란 단어는 크게 한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Swanson): (1) 첫 번째 의미는, “(정)의”(righteousness), “옳은 것”(what is right), “공의”(justice). 성경 마태복음 5장 10절을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2) 두 번째 의미는, “누군가와 옳은 관계에 두다/있다.” 성경 로마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 세 번째 의미는, 종교에서 요구하는 법이나 의식을 행하는 것. 성경 마태복음 6장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는 첫 번째 의미로서 “정의” 또는 “공의”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의는 바로 “자기 의”(self-righteousness)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다 지키므로 이 율법의 의인 자기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자기 의입니다. 여기서 “자기 의”란 자기의 종교적인 행실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인터넷).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의지하였던 종교적인 행실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말씀에서 나오듯이 바리새인이 의지하였던 자신의 종교적인 행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12절).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6장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행하였는데(1절) 그 의 중 하나는 구제함이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듯이 구제하였습니다(2절). 결코 그들은 은밀하게 구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5절). 그들은 금식할 때에도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했습니다(16절). 이렇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 행하므로 자기가 의롭다고 굳게 믿었습니다(눅18:9).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의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성경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결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란 바리새인들이 믿고 추구했던 “자기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켜(선을) 행하므로 얻는 “자기 의”는 결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란 누구의 의입니까? 그것은 우리 사람의 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 로마서 3장 21-22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란 구약 성경이 증거 하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의입니다(김창세). 여기서 “속량”이란 예수님 당시 노예를 살 때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였는데 “속량”이란 말은 ‘값을 지불했다’ 또는 ‘대가를 치렀다’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값없이 의롭다 하셨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25절)를 근거로 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사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행13:38).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27절). 그 이유는 우리가 행한 어떠한 근거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덧 입혀 주시사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바로 복 있는 자요 그가 누릴 복은 바로 배부를(만족할) 것입니다(마5:6). 새 찬송가 526장 “목마른 자들아”란 찬송이 생각납니다: (1절) “목마른 자들아 다 이로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4절) “이 생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 빛 같이 늘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잖네.” 저는 이 찬송가를 생각할 때 이사야 55장 1-2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이 주님의 초청에 응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여러분, 더 이상 우리는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7).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한다는 말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여러분,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죄 사함(속량)을 얻었습니다(골1:1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 주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하므로 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 받아(행10:43)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자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