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행복 (3):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5절]
우리 한국 속담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이 속담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사촌이 땅을 사면 진정 배가 아프십니까?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속담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사촌이 땅을 사면 기뻐해야지 왜 배 아파해야 합니까. 여러분, 사촌이 땅을 사면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한 인터넷 블로그를 보니까 이 속담에 대하여 교훈될 만한 글이 있어 여러분과 나눕니다: “행복은 그냥 자신이 있는 그 자리, 그 곳에서 자족함을 느끼는 행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샘을 낼 필요도 없고 질투할 필요도 없다. 사촌이 땅을 사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니까 땅을 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땅에 농사라도 지어서 이웃과 나눠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또한 얼마나 기쁜가? 그 땅을 함께 일구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다면 마음은 더 부자가 되고 행복해질 것이다(인터넷).”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세 번째 행복은 바로 “땅”(the earth)입니다.
여러분, 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 종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축구나 농구나 야구도 아니고 바로 미식축구(football)입니다. 어느 정도로 미식축구가 인기가 있는가 하면 미식축구 결승전인 Super Bowl Sunday는 미국 최대 명절 중 하나인 Thanksgiving(추수감사절)의 바로 뒤를 잇는 음식소비량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먹으면서 함께 TV로 경기를 시청한다는 말입니다. 2011년 미식축구 결승전은 미국 TV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는데 약 1억 명 이상이 경기를 시청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도 매년 미식축구 결승전을 시청하고 있는데 운동을 별로 좋아 하지도 않는데 만일 이 미식축구에 대해서 그런 분들에게 설명을 하려고 한다면 규칙들이 너무나 많이 골치 아파보일 수도 있기에 간략하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미식축구는 간단합니다. 그 운동은 땅 따먹기 입니다.’ 실제로 어떤 네티즌은 미식축구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땅따먹기를 하는 게임이라고 말하면서 왜 그 스포츠가 미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가 하면 미국은 역사적으로 개척 국가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개척이라는 이념과 스포츠가 연관되면서 미식축구가 인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인터넷). 흥미로운 관찰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미국이 역사적으로 개척 국가인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동부에 도착한 후, 나중에는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미개척지인 서부까지 개척해 나아가 청교도 정신으로 이 나라를 세운 이 미국, 참으로 하나님께 축복받은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2008년 10월에 크리스천 포스트가 전국 1,4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사람의 80%가 그리고 미국인 61%가 ‘미국은 축복받은 나라’라고 응답 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저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을 보면 하나님께 축복 받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이 미국 땅을 생각할 때 성경 구약 모세의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과 연관해서 생각하고 또한 종종 그렇게 설교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보면 가나안 땅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출3:8; 민14:7), 젖과 꿀이 흐르는 땅(13:5; 민13:27; 14:8), 기름진 땅(출3:8)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신명기 8장 7절부터 보면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고 말씀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그들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절). 이 미국 땅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 부족함이 없는 가나안 땅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도 소산물이 풍성한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 신명기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장차 들어가면 먹어서 배부를 것이며(10, 12절)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될 것이며(12절) 또한 그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며 그들의 은금이 증식되어 그들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것이다(13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축복하셨을 때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그 땅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땅을 가리켜 이스라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한 땅(민14:23, 신31:4)이요 이스라엘에게 준 땅(민20:24, 삼상13:19, 대상21:4)이라고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가나안 땅을 가리켜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신3:20)이요 여호와의 땅(호9:3)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신명기 2장 12절을 보면 그 가나안 땅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업의 땅인 가나안은 상징적으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가나안 땅은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그의 교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진정한 가나안 땅인 천국입니다. 이 땅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히브리서 11장 8-9절을 보면 그 땅을 가리켜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8절) 또는 약속의 땅(9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과 함께 유업으로 받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는데(9절) 그 이유를 히브리서 11장 10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비록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지만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이 성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한 성(16 절), 즉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16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가 장차 들어갈 하늘의 성, 즉 천국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 천국의 복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누구입니까? 저는 “온유한 자”하면 구약 민수기 12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세가 생각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은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5절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어야 했는데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그곳 골짜기에 장사됩니다(신34:5-6). 왜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민수기 20장 12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 한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8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10절)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11절).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좀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아니 모세가 딱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다고 어떻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못 들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를 흥미롭게 해석한 글이 있어 나눕니다. 그 글 내용을 짧게 요약한다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모세”하면 우리는 “율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로 하여금 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을 때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시므로 유대인들이나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상징적인 교훈은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는 진정한 가나안 땅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십계명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는 곧 율법의 대명사이다. 모세 즉 율법은 가나안 땅 즉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기는 하지만 율법으로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즉 천국의 가는 길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인터넷). 흥미로운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상징적으로 율법으로는 진정한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 가나안 땅을 가리켜 심히 아름다운 땅이요 부족함이 없는 땅이요 좋은 땅이요 기름진 땅 등 이렇게 긍정적인 표현이 대부분이지만(출3:8; 민13:7; 14:7-8; 신8:8-9) 또한 성경은 가나안 땅을 ‘죄로 물든 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레18:15, 민35:34; 시106:34, 미2:10).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온전한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전한 약속의 땅은 오직 가나안 땅이 가리키고 있는 천국입니다. 이 천국 땅을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다시금 마태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을 쓴 저자 마태는 이 “온유한 자”라는 헬라어 단어를 마태복음에서 오늘 본문 외에 딱 2번 더 사용했습니다(11:29, 21:5). 그 두 번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에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예수님의 마음은 낮아졌음을 말하며 그 낮아진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고정돼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고정된 예수님의 낮은 마음은 이 땅에 오시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낮은 모습과 나약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Kittel). 저자 마태가 마태복음에서 “온유한 자”라는 단어를 또 사용한 곳은 바로 21장 5절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으로서 여기서 “네 왕”이란 참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종려주일에 익히 말씀을 들어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사건을 우리로 하여금 기억케 하지 않습니까. 결국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이 땅에서의 마지막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관한 성경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시작도 겸손이요 이 땅에서의 끝도 겸손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성경 빌립보서 2장 5-8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요 또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가 바로 온유한 자요 이 온유한 자가 받는 행복은 바로 진정한 약속의 땅인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천국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자녀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는 것을 말합니다(박윤선). 성경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제가 바로 하나님의 상속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어 장차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 시편 37편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실제로 성경은 천국 땅을 가리켜 “평화로운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단8:9). 비록 이 세상에는 전쟁과 싸움 뿐 진정한 평화가 없지만 다가오는 세상인 천국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합니다. 또한 성경은 천국을 가리켜 “좋은 땅”(왕상14:15)이요 “거룩한 땅”(슥2:12)이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나쁜 땅이요 더럽고 추한 땅이요 사단의 땅이지만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좋은 땅이요 거룩한 땅입니다. 이 약속의 땅인 천국을 시편 기자뿐만 아니라(시37:11) 예수님께서도(마5:5)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천국의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