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행복 (2):
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4절]
여러분은 슬프고 가슴이 아플 때 무엇이 또는 누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됩니까? 로버트 스트랜드의 “위로의 영성”이란 책을 보면 머리말에서 헨리 나우웬은 ‘돌봄(care of soul)은 같이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스트랜드). 우리 주위에 이러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주위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함께 하면서 울 때에 함께 우는 위로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는 위로 자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적어도 한두 명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괴롭고 외로울 때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 받기를 좀 거절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만이 우리 영혼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5장 1-12절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팔복 중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묵생했습니다. 그 묵상한 말씀을 다시 복습한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궁핍한 자, 즉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이요 그들이 받는 복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이란 복을 우리가 장소와 시간 개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해 봐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란 우리가 죽은 후 장차 들어갈 곳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성도 개인과 그의 가정과 섬기는 교회 또한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 천국의 복을 받는 심령이 가난한 자, 즉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는 누구인지 우리는 한 3가지로 배웠습니다: (1)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은 자기의 할 수 없는 처지와 하나님 밖에 도와 줄 자가 없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2)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의 박해를 받는 자들입니다. (3)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은 죄를 인하여 상심하며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특히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묵상해야 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성경 시편 34편 18절과 시편 51편 1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우리가 이 두 구절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묵상할 두 번째 행복인 애통하는 자의 복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마5:4).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4절을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뒤돌아보실 때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애통(통곡)해 보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만일 그런 적이 있으셨다면 왜 여러분은 그 때 그리도 통곡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란 곳이 있습니다. 왜 이름이 통곡이 벽인지 아십니까?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는 성지 중의 성지라고 합니다. 그 벽의 정식 이름은 “서쪽의 벽”(Western Wall)인데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연이란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이 로마 병들에 의해 두 차례나 불탄 후 남은 벽이 서쪽 벽이었고 로마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못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을 추방해 버렸으므로 유대인들은 로마, 북아프리카, 발리로니아 등지에 노예로 팔려가서 자그마치 1,870년 동안이나 뿔뿔이 흩어져 남의 나라를 전전하는 방랑의 민족이 되었습니다(디아스포라). 그 후 예루살렘이 비잔틴의 지배를 받게 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하나만 들어줄 것을 간청했는데 그 간청이란 솔로몬 성전의 유일한 유적인 ‘서쪽의 벽’에 모여 1년에 한번만이라도 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간청이 결국 받아들여져 전 세계 유대인들은 매년 성전이 파괴된 8월 ‘서쪽의 벽’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 서쪽의 벽은 원래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장소요 솔로몬 왕이 성전을 세운 장소였기에 서쪽의 벽에 매년 모이는 예루살렘 예배가 통곡의 바다를 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통곡할 이유는 그 자리에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큰 두개의 이슬람 사원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선 통곡할 이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통곡의 벽’이 있는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에 귀속되었는데 무슬림들은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유대인 예배마저 금지시켜 48년부터 67년까지 19년 동안 유대인들은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7년 ‘6일 전쟁’이 일어나자 이스라엘군은 특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한 맺힌 ‘통곡의 벽’부터 점령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점령한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웨스트 뱅크’는 다시 내놓으면서도 동예루살렘만은 죽어도 양보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이곳에 ‘통곡의 벽’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독립 이전까지 서로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내년에 예루살렘에서.” 이 인사의 의미는 “내년에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 만나 뵙기를”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이 통곡의 벽에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에스라 3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스3:8)의 기초를 놓을 때(1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이 첫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했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12절). 다른 여러 사람들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는데(12절) 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대성통곡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남북한을 갈라놓은 38선이 무너지고 남과 북이 통일되면 6.25. 전쟁을 겪으신 나이 많으신 분들은 감격 속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을 겪어 보지 않는 젊은 세대들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를 것이다.’
제가 제 인생을 뒤돌아 볼 때 대성통곡한 적이 딱 한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통곡하면서 사람이 숨넘어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제가 크게 통곡을 했는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 때 제가 그리 통곡하며 울었던 이유는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안아본 제 첫째 아기 주영이가 제 품안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저는 첫째 아기를 생각하면서 슬퍼하며 가슴 아파했던 이유는 그 아기의 죽음이 제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생각났던 말씀이 바로 사무엘하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윗이 충성된 군인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사 다윗에게 하신 말씀 중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 이다 하고.” 그리고 그 약속대로 다윗의 아기는 7일 만에 죽습니다(18절). 그래서 저는 저의 죄의 결과로 인해 제 첫째 아기 주영이가 죽었다고 생각되어 크게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란 자기가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자,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이러한 통회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 애통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애통은 세상적인 애통과 다릅니다(10절하). 세상적인 애통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그들을 근심하게 한 것을 기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 7장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편지로 근심케 한 것을 기뻐한 이유는 그들의 근신함으로 회개함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근신함(애통함)을 주신 의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입니다(9절하). 새 찬송가 486장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가사의 영문은 이렇습니다: “My soul in sad exile was out on life’s sea, So burdened with sin and distressed, Till I heard a sweet voice saying ‘Make me your choice’; And I entered the ‘Heaven of Rest.’ 이 영문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이렇습니다: ‘내 영혼은 인생의 바다에 슬픈 망명을 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괴롭습니다. ‘나를 당신의 선택으로 만들어 주세요’란 달콤한 음성을 내가 듣기 전까지. 그리고 나는 천국의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이 영문 가사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무거움과 괴로움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겸손히,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나서도 우리 마음에 무거움과 괴로움이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애통하여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수 없이 죄를 가볍게 여기므로 마음에 무거움과 괴로움이 없이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어느 한 사람과 만나 한 4시간 정도 대화를 한 후 그 다음 날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런 글을 제 개인 홈페이지에 써서 올렸습니다: “밑바닥 인생, 힘들고 지친 인생, 눈물이 많은 인생,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인생, 앞날이 보이지 않는 인생, 캄캄하고 어두운 인생, 살 소망이 없는 인생, 주님께 돌아오길 ….” 실제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그 사람은 살 소망을 잃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 인생의 위기를 만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위기는 기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무슨 기회입니까?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저는 그 사랑하는 영혼을 생각할 때 시편 32편 4절 상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 시편 기자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 자신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 주님의 손이 밤낮으로 자기를 누르셨다는 이 말씀처럼 지금 주님께서는 한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 영혼을 누르시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누르심은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누르시므로 우리의 마음이 무거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그 복은 바로 “위로”(comforted)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 자기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이란 바로 위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 위로는 바로 죄 사함과 구원의 위로입니다(MacArthur). 성경 이사야 40장 1-2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은 위로요 그 위로는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도 시편 32편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갈2:16) 저와 여러분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아 우리에겐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요 의의 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아가기보다 이 세상(사단의 나라)와 이 세상의 불의를 위하여 살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죄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거듭 행하는 죄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는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절망 가운데서 주님을 갈망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은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후7:6).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므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을 찔러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토설(자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애통하며 회개케 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잠24:16).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메시지란 바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마5:4).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 새 찬송가 190장 “성령이여 강림하사”를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삼아 하나님께 다 함께 찬양을 드리십시다: (1절)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2절) 성령이여 강림하사 크신 권능 주소서 원하옵고 원하오니 충만하게 하소서, (3절)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 강림 하옵소서 충만하게 하소서, (4절) 정케하고 위로하사 복을 받게 하소서 충만하게 하시오니 무한 감사합니다, (후렴)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여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