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못한 주님의 종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 4장 10-11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가 되고자 준비함에 있어서 거쳐야 할 과정 중 하나는 바로 신학교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신학, 조직 신학, 역사 신학, 실천 신학 등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생들은 목사가 되고자 힘을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이 신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평신도 보다 못해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보다 성경적 지식과 신학적 지식 등은 더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교만해 졌을 뿐만 아니라 더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저는 신학교에서 머리는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웠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지식에 변화는 있었는데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준비되지 못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에 그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신실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제일 사랑하시기에 그 교회를 위하여서라도 준비되지 못한 목사를 준비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를 준비시키실까요?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머리로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있었지만(욘4:2) 요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은혜롭지 못했으며 자비롭지 못했고 또한 그는 성을 냈으며 인애가 결핍되어서 니느웨를 향한 자기의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니느웨가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3:4). 그래서 그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을 때(1절) 일어나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2절) 하루 동안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4절).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5절)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8절). 그리고 그들은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습니다(8절).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니느웨 사람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0절). 그러나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4:1).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읍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던 것입니다(5절). 혹시나 자기가 선포한데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을까(3:4)해서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4:5). 아니,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는데 하나님의 종 요나가 무엇이관대 자기의 뜻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종이라면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요나가 무엇이관대 성냄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2절)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절)라고 하나님께 자기의 간구를 아뢸 수 있습니까? 참으로 준비되지 못한 하나님의 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내면서 기도하고 자기의 뜻을 고집하는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박넝쿨(6절)과 벌레(7절)와 그리고 뜨거운 동풍(8절)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지 못한 요나 선지자에게 이 세 가지를 준비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종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시고자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니느웨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과 많은 가축도 아끼시는 마음입니다(11절).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요나는 자기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리 버린 박넝쿨을 아낀 반면에(10절)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영혼들뿐만 아니라 가축들까지도 아끼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사람들을 아끼지 않고 자기에게 그늘을 지게 하여 자기의 괴로움을 면하게 한 박넝쿨(6절)을 더 아낄 수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요나 선지자는 그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면서(6절)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내리고자 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니깐 심히 싫어하고 성낼 수가 있습니까?(1절) 이렇게 준비되지 못한 주님의 종을 하나님께서 심히 아끼시사 그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을 준비시키십니다. 비록 여러모로 준비가 안 된 목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사 부르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십니다. 준비시키시되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의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사람들에게 보내사 그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섬기게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에 그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여금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케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을 준비하시되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만 품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하늘에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나아가십니다. 온전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새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의 준비시키시는 손길로 인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마음의 변화를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