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요나 4장 4절).
과연 우리의 성냄이 합당합니까? 과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화낼만한 권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짜증을 낼 일들도 얼마나 많은지 저는 사람들에게서 ‘짜증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또한 이 세상엔 참으로 성낼 일들 너무 많습니다. 왠지 분노가 폭파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적으로 또한 외적으로 분노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불만족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만족이 없기에 감정의 균형을 잃어버리므로 말미암아 분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4장의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성내고 있습니다. 그가 성내고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양을 내리길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3:2-3) 듣고 회개하므로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므로 말미암아(10절)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양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10절). 그러므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습니다(4:1). 이러한 성냄 가운데서도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그는 하나님께 분노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 분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 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 이다”(2-3절). 이 요나의 기도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요나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인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1:2) 란 말씀이 자기에게 처음에 임했을 때 불순종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었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합당한 불순종의 이유입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요나는 하나님께 심히 분노 하는 가운데 죽기를 간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과연 요나의 성냄이 합당한 것이었습니까?(4:4).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첫 번째 임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었던 요나, 두 번째 임한 하나님의 계명에(3:2-3) 순종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데로 니느웨를 멸망시키시지 않으시자 심히 성낸 요나, 과연 그의 성냄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까? 요나는 심히 분노한 가운데 니느웨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였습니다 (5절). 이렇게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대로 고집을 피우고 있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게 하시므로 요나로 하여금 괴로움을 면케하셨습니다(6절). 그 때 요나는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습니다(6절). 이 얼마나 대조적인 요나의 반응입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자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던 요나(1절)가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해 주시사 요나로 하여금 괴로움을 면케 해주시니깐 그는 심히 기뻐하였습니다(6절). 이 얼마나 하나님의 인애(2절)와 거리가 먼 요나의 이기적인 마음입니까?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 백성들은 망해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 자신은 편안해야 하고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셨고(7절) 또한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시사 요나의 머리에 쬐게 하셨습니다(8절). 그 때 요나는 혼곤하여 분노 가운데 스스로 죽기를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8절).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셨습니다(9절). 요나의 대답은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였습니다(9절). 요나가 죽기까지 성난 이유는 자기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 넝쿨을 아꼈기 때문이었습니다(10절). 하나님은 큰 성읍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 이만 여명을 아꼈거든(11절) 요나는 그 죽어가는 십 이만 여명의 영혼들보다 자기의 괴로움을 면케 해주는 박 넝쿨을 아꼈던 것입니다. 과연 요나의 성냄은 합당한 것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욘4:4). 과연 우리의 성냄이 합당합니까?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볼 때에 죽기까지 합당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심히 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니느웨의 십 이만 여명의 영혼들이 망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괴로움을 면케 해주는 박 넝쿨이 없어졌기 때문입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을 아끼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아끼시는 영혼을 아끼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내 마음을 준비시키고 계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드리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