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요나 선지자

 

 

 

“(그러나)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1-3).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는 이성보다 감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영역에서 감정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감성주의입니다. 저는 이 감성주의의 문제가 많이 있겠지만 크게 한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 하나는 우리의 감정이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우리의 이성에 이끌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감정이 견고한 성품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실(Fact)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Faith)안에서 이끌림을 받지 못하고 그저 감정(Feeling)에만 이끌림을 받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견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품도 견고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바른 교훈(sound doctrine)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고 불안정한 느낌(unsound emotion)을 의지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아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기보다 우리의 마음은 우왕좌왕하면서 변질될 위험이 많습니다. 어떻게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상대주의, 다원주의 그리고 혼합주의에 빠져 신앙의 정도를 걷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변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요나 4장1-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를 생각할 때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하나님의 종이였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한 예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은 알았지만(2절) 자기 자신은 심히 분노하고 있었습니다(1절).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은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은 알았지만(2절) 자기 자신은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없었기에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멸망당하기를 심히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노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1-3절) 니느웨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습니다(5절). 요나는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고 자기의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시고자 하신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께 분노가운데 기도한 후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으시사 다시 뜻을 돌이켜 니느웨 성읍에 재앙을 내리시길 니느웨 성읍 동편 초막에 앉아 기대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처럼 니느웨 백성들을 향하여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나의 마음은 이성에 이끌림을 받기보다 감정에 이끌림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마음은 그가 이성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지배를 받고 있지 못하고(2절)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니느웨 백성들을 미워하는 감정(3절)과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 하나님을 향한 분노(1절)에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러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은 그로 하여금 원수 나라 앗수르의 수도에 살고 있는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요나 자신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여(1:1-3)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기도를 한 후(2:1-9)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했으면서도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내리시고자 하셨던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용서했건만 요나가 누구기에 자기의 뜻을 돌이키지 않고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택받은 종으로서 사명을 회피하고 도망갔다가 회개한 후 용서를 받은 요나가 누구기에 감히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원수를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요나에게는 니느웨 성읍에 있는 십 이만 명이나 되는 죽어가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그 죽어가는 영혼들을 아끼셨는데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그 영혼들을 아끼기보다 자기 자신을 더 아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께 분노하면서 기도했습니다(1-3절). 과연 그의 성냄이 합당한 것이었습니까?

 

미움과 분노의 감정에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로우심, 노하기를 더디 하심과 크신 인애를 니느웨 백성들에게 베풀지 못했던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변질된 종이였습니다. 그는 이성으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지만 그는 그 이성의 이끌림을 받지 못하고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미워하는 미움의 감정과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분노에 이끌림을 받아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기도(2-3절)와 행동을 하였습니다(5절). 한 마디로,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그의 종 요나를 크신 은혜와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할지라도 자기의 성냄이 합당하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던 요나에게(9절)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2절) 사랑하기를 속히 하셨습니다(3-11절). 왠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십 이만여명과 많은 육축보다 자신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종 요나 한 사람을 더 아끼신 것 같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요나와 같은 우리를 아끼시사 크신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고 계십니까?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워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복음성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1:8) 한 영혼을 사랑하며 사모하는 자로 세움 받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