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8)
[요나 4장 1-11절 말씀 묵상]
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그의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 책 7장에서 “영성 개발과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말들을 우리에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저는 세 가지 귀한 교훈과 적용이 되는 말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 첫 번째 교훈과 적용의 말: “격한 감정을 표출하거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이성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감정(feeling)보다 사실(fact), 즉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the Word-driven)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삶이란 한 마디로 믿음의 삶(life of faith)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교훈과 적용의 말: “자제력이란, 설사 ‘기분 내키지 않아도’ 자신이 선택하거나 결단한 행동과 인격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 지속적 능력을 말한다. 내키지 않는 (또는 하기 싫은) 일도 필요하다면 하고, 하고 싶은(기분 내키는) 일도 필요하다면 단호히 하지 않는 것이 자제력이다. 견고한 성품이 없는 이들에게 감정은 자제력의 치명적 적이다.” “견고한 성품이 없는 이들에게 감정은 자제력의 치명적 적이다”이란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 그 말씀을 순종하므로 말씀 인격화 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아(다시 말하면 자제력을 잃어) 내키지 않는 일은 안하고 하고 싶은 일은 하는 기분 내키는 대로 살게 됩니다. 성경 로마서 7장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3) 마지막 세 번째 교훈과 적용의 말: “오늘 사탄은 감정을 통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는 감정을 우리 삶에 실제보다 더 중요하게 만들며, 특정 감정이 있거나 없는 것에 대해 엉뚱한 죄책감을 대거 유발시킨다.” 사탄이 추구하는 것은 감정의 역할을 극대화하여 감정을 우리의 행동이나 성품 변화의 기초로 삼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기초는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와 확신의 몫인데 말입니다. 예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기보다 필요의 감정에 떠밀려 헌신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4장 1-1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감정에 이끌림을 받는 ‘성내는 요나’가 나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절), “...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절 하반절). 이렇게 스스로 죽기를 구할 정도로 화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오늘 본문 4절과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4절),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9절 상반절). 오늘 저는 “요나의 하나님 (8)”란 제목 아래 성내는 요나에게 “너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묵상하는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요나의 하나님은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욘4:1-4).
요나서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 선지자에게 두 번째 임했을 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그 성에 있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3:4). 그리하였을 때 니느웨 백성들의 반응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까지 해가면서 회개를 하였습니다(5절). 성경은 그들의 생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9절). 그들의 생각대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10절). 그랬을 때 요나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4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요나는 심히 싫어하였고 또한 분노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선지자가 되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가 선포한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었으면 기뻐하고 좋아해야지 어떻게 싫어하고 분노할 수 있을까?’ 왠지 요나 선지자는 자기가 선포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이 성취되기를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무너지기는커녕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내리시려고 했던 뜻을 돌이키시사 재앙을 니느웨에 내리지 아니하시므로 말미암아 요나는 분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는 여로보함 2세 시대 때(782/781-753 BC)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그 때 상황은 이스라엘 앗수르란 거대한 나라의 종으로써 그 나라에 돈을 바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요나가 선지자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여로보함 2세 시대 때에는 앗수르에 대한 반항이 아주 심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무너지는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닌까 요나는 화가 났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분노한 상태에서도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4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이 기도 내용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인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1:2)에 왜 불순종하였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갔다는 변명을 하나님께 기도로 하였습니다.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려는 뜻을 돌이키실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요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요나 4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요나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을까 이해가 안됩니다. 왠지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인 니느웨 백성들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미워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요나서 4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 중 2절 말씀에 나오는 기도 내용을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저는 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나 자신도 회개하였을 때(2:2-7)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9-10절) 요나는 하나님께서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에게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에 대해 죽고 싶을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입니다. 적어도 자기도 회개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종 선지자라면 아무리 이스라엘의 원수라해도 회개하고 돌이켜 재앙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 분노의 기도를 드리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서는 죽기를 간구할 정도로 분노하였습니다. 그러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4:4). 과연 요나의 노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입니까? 만일 요나가 진정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 자기가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만일 요나가 진정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과 자비와 크신 사랑과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면 어떻게 그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할 정도로 성낼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요나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면서 만나 뵙고 그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진정 마음으로 체험하였다면 어떻게 요나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할 정도로 분노할 수 있습니까? 왠지 요나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지 않으셨을 때 결코 하나님께 분노하면서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2절). 한 마디로,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 받지 못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뜻, 곧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해 분노하는 요나의 모습을 볼 때 저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그의 종 요나 선지자는 자기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않고 니느웨가 멸망받기를 원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요나의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여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뜻을 돌이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제임스 패커 목사님은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7장 –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변하지 않습니다(시102:26-27). 하나님의 성품도 변하지 않습니다(약1:17). 또한 하나님의 진리도 변하지 않습니다(사40:6-8).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들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들과 행동 원리들은 일관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라도 그 분의 성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들은 변하지 않습니다(민23:19). 그런데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혹은 ‘후회하셨다’라는 말씀이 요나 3장10절 외에도 창세기 6장6-7절(“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사무엘상 15장 11절(“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사무엘하 24장 16절(“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요엘 2장13-14절(“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고 그분의 계획을 번복하게 만드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경우입니다: (1)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선경지명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2) 그것들을 시행하기 위한 선견지명이 부족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선견지명을 가지셨으므로 우리 사람들처럼 자신의 마음을 바꾸시고 계획을 번복하시지 않습니다.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케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니느웨를 멸망시키는 것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뜻, 곧 멸망시키려는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원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멸망시키시려는 뜻을 돌이켜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요엘 2장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 회개 기도케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탕자처럼 방황하는 가운데서도 뜻을 돌이켜 회개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에스겔 36장 3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그의 크신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거룩한 뜻)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또한 받아주십니다(사랑의 뜻)(패커). 이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며 품어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뜻을 돌이키시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요나의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욘4:5-8).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 뜻을 돌이키시사 니느웨에게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므로 싫어하고 분노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 그는 니느웨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5절). 요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기회 때 하나님의 말씀에 결국은 순종하여 니느웨 성으로 들어갔을 때 가는 니느웨 성 서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요나서 4장 5절에서 그가 동편에다 초막을 진 것을 보면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는 자기를 위하여 니느웨 성 서편에서 초막을 짖지 않고 동편에 초막을 지었습니까? 그 이유는 요나는 그 초막 그늘 아래 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5절). 얼마나 화가 났으면 니느웨 성에서 나가서 동편에다가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았겠습니까? 이 정도로 분노 속에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준비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3가지를 준비하셨습니다:
(1) 첫째는, 박 넝쿨(a vine)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4장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요나에게 박 넝쿨을 공급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요나에게 그늘을 주시므로 그의 괴로움을 면케 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6절). 얼마나 화가 났으면 요나는 초막을 준비했어도 해가 쨍쨍 비취는 곳에서 괴로움을 당하면서 니느웨 성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괴로움을 면케 하시려고 요나를 위하여 박 넝쿨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도 인정 안하고 회개도 하지 않는 요나에게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앉아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는 요나에게 박 넝쿨을 준비하사 그의 괴로움을 면케 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과연 편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요나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괴로우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요나는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해 주시므로 그늘 속에서 괴로움이 면케 되자 심히 기뻐하였습니다(6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회개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믿은 사실에는 기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는 박 넝쿨로 인하여 괴로움이 면케 되자 심히 기뻐하는 것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 뜻대로 안되면 화내고 자기에게 유익을 주면 기뻐하는 이 요나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지는 않습니까?
(2) 둘째로, “벌레”(a worm)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4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제가 다녔던 풀러 신학교에는 벤 엔겐(Van Engen)란 교수님이 계십니다. 제가 그분이 가르치시는 과목을 택하여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저희 학생들에게 성경책 다음으로 사랑하는 책이 있다고 하시면서 소개한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질 브리스코(Jill Briscoe)의 “요나와 꼬마벌레”(Jonah & The Worm)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불순종한 요나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벌레와 대조를 이루면서 순종하는 벌레를 통하여 우리에게 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벌레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은 니느웨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박 넝쿨을 씹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느린 발걸음으로 멀리서 와서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벌레의 모습은 왠지 요나의 모습과 대조적이란 느낌을 줍니다. 요나를 위해서 박 넝쿨을 준비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젠 벌레를 준비하시사 박 넝쿨을 씹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박 넝쿨은 시들게 되었습니다(7절). 박 넝쿨이 시들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늘(요나에게 있어서 편안함)이 없어졌다는 것과 괴로움의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3) 셋째로, “뜨거운 동풍”(a scorching east wind)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4장 8절을 보십시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안 그래도 박 넝쿨이 없어져서 요나는 괴로워하고 있었을 터인데 이젠 뜨거운 동풍이 불므로 말미암아 요나는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요나 1장 4절에서 불순종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대풍”을 준비하시사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요나가 타고 있었던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었는데 오늘 본문 요나 4장 8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시사 해가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죽고 싶은 정도까지 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7절에서 벌레가 박 넝쿨을 씹었을 때 거기서 “씹게”(chewed)란 단어가 8절에 나오는 “쫴매”(blazed)란 단어가 같은 히브리어 단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벌레나 동풍 둘 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밀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종 요나를 치신 것을 말해 줍니다. 성경 에스겔 7장 9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그의 자녀들을 치시는(strike)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치시매 요나는 스스로 죽기를 구한 것입니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4:8).
마지막 셋째로, 요나의 하나님은 아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욘4:9-11).
스스로 죽기를 구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4장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 이 말씀의 요나의 대답은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9절 하반절)였습니다. 아마도 이젠 요나는 화가 나도 끝까지 난 것 같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하나님께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요나는 화가 난 것입니까? 바로 없어진 박 넝쿨 때문이었습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박 넝쿨 하나 때문에 심히 기뻐하다가(6절) 이렇게 박 넝쿨 하나 때문에 심히 분노하는 요나의 모습(9절)이 우습지 않습니까? 이렇게 요나가 성내어 죽기까지 아끼는 박 넝쿨에 대하여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10-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아끼는 박 넝쿨과 하나님 자신이 아끼시는 니느웨 영혼들과 대조를 하셨습니다. 요나는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수명이 하루밖에 되지 않는 박 넝쿨을 아낀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수고하신 니느웨 영혼들, 배양한 니느웨 영혼들, 수명이 이 땅에서 짧은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고 계셨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아끼는 박 넝쿨이 없어지므로 말미암아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말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니느웨 큰 성읍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 이만 여명의 영혼들과 많은 육축을 아끼시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요나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요나서를 1장에서 4장까지 보면 이상하게도 요나의 변화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요나서는 끝을 맺습니다. 요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 받기보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는 모습을 요나서는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살이인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어 죽기까지 할 정도로 화가 난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요나서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요나가 끝까지 하나님께 분노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당하여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니느웨 영혼들을 아끼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 요나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를 아끼고 계셨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요나서를 묵상할 때마다 종종 마음속으로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십 이만 여명이나 되는 니느웨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는가 아니면 한 하나님의 종 요나를 더 사랑하셨는가?’. 죄를 금식까지 해가면서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니느웨 백성들, 이들과 대조적으로 죄를 범하고 회개하는 듯하나 또 다시 죄를 범한 후 회개치 아니하는 요나, 감히 하나님께 성내되 죽기까지 화를 내는 하나님의 마음과 신격을 닮아가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불순종하는 요나, 과연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셨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미련하고 불순종하는 종 요나를 니느웨의 십 이만 여명의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요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하나님의 선택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요나는 그 이름 뜻처럼 미련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본 받지 못한 모습과 원수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의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2:8).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라고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으셨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면서도 예수님의 향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고 우리 죄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진노를 독생자 예수님께 쏟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께 준비해 놓으셨던 것은 바로 저주의 나무 십자가였습니다(신21:23, 갈3:13).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십자가를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을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더 사랑하시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저와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아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돌이키시고, 준비하시며 또한 아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