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6)
[요나 3장 1-10절 말씀 묵상]
제가 전에 한국 교회에서 섬겼던 새 가정부에서 한 번은 3부(청년부와 새가정부) 예배 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름 수련회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같이 한 후 자매들은 정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형제들은 족구 시합을 하였습니다. 4팀으로 나뉘어서 시합을 했는데 족구 시합이 치열해 지면서 결국 결승전에 가서는 삼세판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기 족구를 하다 보니 치열해 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던 자매들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결승전에서 형제들은 족구에 부부관계까지 걸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8월 달은 자매의 달로 정하고 미안함 마음으로 주일에 형제들은 아이들을 영아부실에서 돌보고 자매들은 3층 공연 실에서 영화구경을 하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자매들이 본 영화가 “청혼”(Bachelor)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남편들에게 맡기고 영화를 본 후기를 사랑 마을 웹사이트에 “사랑 마을 자매들의 소중한 경험 담”이란 제목아래 글을 한 자매가 올렸는데 제가 거기다 이렇게 리플을 달았습니다: “자매들의 리플이 10개가 안되면 별로였다는 전제 아래 자매들만의 영화 시간은 더 이상 같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남편들이 같을 것 같습니다. 자매들이여 리플을 많이 여기서 달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랬더니 사랑 마을 자매들이 리플을 달았는데 2 자매가 하나씩, 또 다른 2 자매가 리플을 2개씩 또 경험담 글을 올린 당사자 자매가 3개 리플, 도합 9개 리플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남편 형제의 리플 “한 사람당 한 개씩만 인정합니다.“ 그랬더니 참석하지 못했던 자매가 “부러버랑~ 다음에도 꼭 해요!”라고 리플을 달은 후 감사의 글 리플을 달았으므로 자매들의 리플 도합 11개였습니다. 물론 형제 말대로 한 사람의 하나씩 치면 6개 리플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담당 목사가 자매들의 리플 10개를 되면 또 한 번 자매의 달을 갖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물론 다 합치면 11개이지만 한 사람당 한 개씩만 인정하게 되면 리플은 도합 6개 밖에 되지 않는데 또 한 번의 기회를 사랑 마을 자매들에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내기 족구 해서 이긴 팀은 모르지만 진 3팀 남편 형제들은 돈도 좀 잃고 저번 주일에 아이들까지 2시간 넘도록 보고 또 한 번 자매의 달로 정하고 아내들이 영화 보도록 적극적으로 추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가정부 형제들이 부인 자매들에게 또 한 번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도 자매들끼리 영화 보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생엔 기회라 그리 자주 오는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계신 분들에겐 이 사실을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요나의 하나님 (6)”이란 제목을 걸고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두 번째 요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요나 3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 2장에서 요나는 당한 고난을 인하여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2:1). 그의 기도의 결론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였습니다(9절). 결국 하나님의 요나의 기도를 응답하시사(1절) 그 물고기에게 명하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10절). 이렇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3장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 임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나에게 임한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3장 2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에게 임했던 첫 번째 말씀인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1:2)와 비교해 보십시오. 같은 점은 처음 일곱개 단어는 똑 같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다른 점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에선 왜 요나가 니느웨에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 반면에(“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선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무엇을 선포(내용)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요나에게 “명한 바”입니다(3:2). 여기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한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입니다(4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했을 때 요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요나의 반응은 순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3장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 이 말씀을 1장 3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1장 3절에서는 “그러나”로 시작하여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였지만 본문 3장 3절에 와서는 ‘(그리고)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갔었던 요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계명)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려고 하였었지만 결국 오늘 본문 3장 3절에 와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시사 그 말씀을 또 주시므로 요나의 심비에 깊이 적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하룻길을 행하며 이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4절).
과연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씀인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란 메시지는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40일”은 노아의 홍수(창 7:17; 8:6), 모세가 시내산에 있었던 기간(출 24:18), 호렙을 향하여 갔던 엘리야(왕상 19:8) 등등 성경에선 40일이란 기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너지리라”는 단어의 선택는 좀 의미심장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첫 번째 이유는, 이 단어는 창세기 19장 21, 25절에 나와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 쓰여진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이유는,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란 문구는 더 좋게 변화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엔 어느 면으로 보면 요나가 하나님이 주신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니느웨에 가서 “사십일이 지니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선포했을 때에는 니느웨 백성들에게도 멸망되기 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제 생각엔 니느웨 백성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1) 요나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무너져서 회개하던지 아니면 (2) 성읍이 무너져서 멸망하던지.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그 가능한 이유를 3절에 나타난 “극히 큰”이란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한글 성경에는 “극히 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에 문자적 번역은 “하나님께 큰”(great to God)’이란 뜻으로 그 성읍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영어 성경 NIV에서는 “a very important”이라고 쓰여 있음]. 여기서 중요성이란 니느웨가 종교적으로 중요한 성읍이란 말씀입니다. 와이즈만(Wiseman)이란 학자에 의하면 ‘요나의 니느웨’를 보면 니느웨에는 우상인 나부(Nabu), 앗술(Assur), 아다드(Adad) 그리고 닌으루타(Ninurta), 니느웨의 이슈타르(Ishtar)등 여러 신들에게 헌신된 신전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와이즈만). 하나님이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에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그것을 쳐서 외치”(1:2)게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종교적으로 우상숭배로 가득 찬 성읍으로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요나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케 하시므로써 하나님의 공의(거룩)를 나타내시며 또한 그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므로 구원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공의(거룩)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좀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 임하였는가?’입니다. 처음 1장2절에서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맞고 죄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하며 2장 가서는 회개한 후에 구원, 즉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임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예레미야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한, 두 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부지런히(여러 번)(렘 11: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어도 목이 굳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그에게 임했을 때 그의 반응은 순종이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맞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한 후 구원(건지심)의 경험을 한 자에겐 두 번째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맞고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선포되고 그에게 임할지라도 순종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마다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하며(행2:37) 또한 그 말씀에 “우리(내)가 어찌할꼬”(행2:37)란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의 반응입니다. 그리할 때 진정한 회개(행2:38)가 있으며 그러한 회개한 마음은 또 한 번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옥토의 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종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또 한 번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요나처럼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한 번 기회를 놓친 저와 여러분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또 한 번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희 영어사역에 마크라는 미국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 이 분은 건강 상태가 않 좋아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현데 밀워키 병원에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십니다. 이 분이 요번 주 수요일에 갑자기 한국을 떠나게 되셨는데 그 날 새벽기도 때 기도하면서 마크 형제가 항상 원했던 세례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세례를 받기 전 저랑 세례 준비 성경공부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월요일 그 집에 찾아가서 대화를 하는 동안 예수님이 자기의 구세주며 주님이란 고백을 또 한 번 들었으며 교회에서의 모든 봉사와 섬김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을 들었기에 목사의 판단에 세례를 주어도 좋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떠나는 당일 수요일 오전 9시에 영어사역 몇몇 형제, 자매들과 함께 마크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세례식을 거행하려고 했던 계획을 이행하지 못한 채 마크 형제를 미국에 들여보냈습니다. 과연 저에게 두 번째 세례를 베풀 기회가 주어질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두 번째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기회를 주셨지만 저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전 마크 형제가 그렇게도 원했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이 기회가 또 주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셔서 마크 형제가 죽기 일주일 전에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죄인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는 일에 관하여 두 번째 기회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그토록 사랑하시사 구원해 주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두 번째 말씀(명)하실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로운 자가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위기는 기회임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