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5)

 

 

 

[요나 21-10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으십니까?

 

요나의 기도는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원수인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서 그 성읍을 쳐서 외치라(1:2)고 명하셨는데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결국 이런 저런 고생을 한 후 물고기 뱃속에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욘2장). 그러한 상황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과연 감사의 기도였을까요 아니면 니느웨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원망과 불평 속에서 한 숨 쉬면서 한 번쯤 발버둥 쳐보려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본문 1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란 문장을 보면 거기 나오는 기도’란 단어가 히브리 원어인 “이트팔렐”인데 그 단어는 감사 기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요나 2장 1-10절 말씀 중심으로 제목을 “요나의 하나님 (5)”로 잡고 한 2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생각하려는 것은, 어떻게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었는가 입니다. (2) 둘째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입니다. 이 두 가지를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어떻게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까?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요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구원은 여호와께로 서 말미암아나 이다.” 현재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느낌 가운데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나의 기도를 우리는 한 2가지 좀 분석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요나의 기도는 과거 구원의 근거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요나 1장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바다에 던진바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사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바로 이 과거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2) 요나의 기도는 미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성경 요나 1장 2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과거에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처해있는 상황인 스올의 뱃속과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그 확신 속에서 오늘 본문 2절 말씀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전에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어떻게 서든지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고자 앞으로도 또 구원해 주실 것을 요나는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나의 구원의 확신, 소망을 생각할 때 바울의 견고한 소망을 나타내는 고린도후서 1장 1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어디에서 구원하신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2장 1-2절에서 히브리어 “min”(… 에서)이란 단어의 3번 나타남의 연관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From inside the fish” (물고기 뱃속에서)(1절), (2) “In(from) my distress”(고난을 인하여)(2절), (3) “From the depths of the grave” (스올의 뱃속에서)(2절). 이 세 문구는 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과 6절을 보십시오: “깊음 속 바다 가운데”(the deep, the very heart of the seas)(3절), “산의 뿌리, 구덩이”(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the pit)(6절). 깊고 깊은 “구덩이”(v.6) 일수록 하나님을 향한 간구는 뜨거울 것이며 더 나아가서 기도 응답인 구원의 경험은 얕은 구덩이 보다 더욱더 놀라울 것입니다. 요나의 그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요나처럼 동서남북 갇혀있고 전혀 인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구원자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경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요나서에 나타나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요나서에 3번 나옵니다:

 

(1) 첫 번째는 사공들의 구원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대풍으로 말미암아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어 흉흉한 바다에 배가 침몰하여 죽을 뻔 한 상황에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므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2) 두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의 구원의 간증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9절을 보십시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3) 마지막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재앙으로부터 얻은 구원의 간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나서 3장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의 간증들 3개를 들어 볼 때 제 생각엔 번째인 요나의 구원의 간증이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방인 사공들이나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의 간증들은 궁극적으로 요나의 구원의 간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공들의 구원은 요나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으며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은 요나의 구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구원 경험을 통하여 놀라운 구원의 간증인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을 고백케 하시사 결국은 3장에 가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기가 직접 경험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즉, 요나는 자기의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만난(체험)한 구원자 하나님을 니느웨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자기 같이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할 때 얻은 구원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감사의 노래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욘2:9). 언제 요나는 이렇게 감사의 노래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까?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과거에도 구원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가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한 후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능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해 주시면, 즉 구원해 주신 후에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를 드리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어두운 물고기 뱃속과 같은 위기에 있는데 감사로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를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8-9절을 보십시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그러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기 8절에서 우리는 요나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거짓된 우상들에게 숭상하는 자들이 얼마나 잘못 지도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우상들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던지 없던지 간에 오직 자기들을 숭배하는 자들만 속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우상들은 빈껍데기 일 뿐이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볼드윈)[단어 공부(8절): 우상 숭배자들 à 히브리어로 두 단어로 묘사하고 있음: (1) “헤벨” à 속히 증발하는 호흡; (2) “써” à 텅 빔, 공허]. 그러나 요나는 9절에서 우상숭배자들과 대조적으로 자기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목소리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리지(상실하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단어 공부(9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God worshippers) à 한 단어로 묘사되고 있음: “은혜” à 신실한 사랑, 긍휼, 인자란 뜻(의미)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 “헤세드”, 즉,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킴]. 여기서 요나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 다녔던 자기의 전의 삶, 즉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삶을 기도하는 중 하나님 앞에서 뒤돌아보면서 그 삶이 호흡처럼 속히 없어지고 텅 빔처럼 헛된 것임을 고백하면서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호 4:12; 암 5:26). 결국 요나는 큰 물고기 안에서 기도하면서(2:7)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므로(2:4)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자기의 거짓되고 헛된 것을 좇았던 어리석은 죄를 보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원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대조 하나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나서 1장 16절을 보면 사공들은 먼저 요나의 하나님께 제물(제사)을 드렸습니다. 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요나의 하나님, 즉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1:9)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공들의 두려움이란 요나가 1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경외”와는 다른 뜻입니다. 사공들은 공포 속에서 하나님께 재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기에 하나님을 공포심에서 두려워하기보다 감사의 노래로 제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언젠가 단기 선교 팀 멤버 중 한 자매가 기도 제목을 적어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거기에 적힌 기도 5개 기도 제목 중 2개가 미래에 대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주님께 맡겨 드릴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길 열어 주(시)기를.” 이 자매뿐만 아니라 저 또한 미래에 대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여러분 중 대다수가 미래의 대한 기도제목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가 묵상하게 된 고린도전서 1장26절 상반 절 말씀이 저에게 귀한 도전이 되고 있어서 여러분과 나누길 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영문을 제가 번역해 보았습니다: ‘형제들이여,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당신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헬라어 번역: 형제들이여 당신의 부르심을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과거보다 미래가 더 많이 남은 저와 여러분은, 미래의 꿈과 비전과 목표를 향해서 정신없이 달리는 가운데서 한 번쯤 멈추어 서서 과거를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은 순간,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잠겼던 순간, 아무 쓸모없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자녀로 삼으신 그 순간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의 기준(고전1:26)으로 볼 때에 미련하고 약하고, 너무나 부족한 우리를 구원해 주시사 오늘 이 시간까지 오게 하신 은혜를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