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4)
[요나 2장 1-10절 말씀 묵상]
이랜드 회사의 “직업 속의 어려움”이란 글을 보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직장의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일이 주는 어려움입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일이 주는 어려움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이 없는 직장을 소원하지만, 일속에서의 고통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며, 죄의 대가일 수도 있습니다(인터넷).
하나님 안에서 직업의 의미를 정리한 부분 6가지입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 (2) 둘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답게 훈련시키시고 성공하게 하는 수단, (3) 셋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 수단, (4) 넷째,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섬기게 하는 수단, (5) 다섯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게 하는 수단, (6) 여섯째, 죄를 기억하게 하여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수단입니다(인터넷). 여기서 다섯째와 여섯째의 의미를 통해 볼 때, 직업 속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고, 죄를 기억하게 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는 수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직업의 의미를 찾는 그리스도인 직장인이라면 직업 속의 어려움과 고통을 잘 견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곳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수준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나서 2장 1-10절을 보면 요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1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여기서 “기도”란 단어의 히브리 원어 “이트팔렐”은, 감사 기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삼상 2:1; 삼하 7:27)(박윤선). 요나가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통하여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요 (2) 둘째 이유는 고난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요나 2장 1-10절을 묵상하면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회개케 하고자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며 또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요나를 통하여 도전을 받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2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은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경은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죄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에서 인간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극명하게 진술하고 있니다. 인간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행복이고, 자유이며, 고통의 극복입니다(인터넷). 고통을 대한 우리들의 처음 반응은 ‘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가?’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자녀에게 고난을 겪게 하시는가?’란 질문을 충분히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한 사실 중 하나는 고난 가운데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 옥한음 목사님이 쓰신 책 “고통에는 뜻이 있다”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책을 보면 옥 목사님은 ‘고통은 포장된 축복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든지 아니든지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위해서 임을 믿습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를 들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 우리는 이미 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의 던진 사실을 묵상하였습니다(1:15). 그런데 오늘 본문 요나 2장 3절에선 주님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케 하시고자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바다에 대풍을 던지시고 그 대풍을 잠잠케 하기 위해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실 것을 사공들에게 요나의 고백을 통해 알려 주시사 사공들로 하여금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젠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요나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징계의 폭풍’과 같은 고난을 허락하시사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켜 순종의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요나의 고난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4 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요냐의 첫 번째 고난은 “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이 고난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히브리어 “min”(… 에서)를 무시하면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에서 이 히브리어 단어가 한 3번 나옵니다: (1) “From inside the fish”(물고기 뱃속에서)(1절), (2) “In(from) my distress”(고난을 인하여)(2절), (3) “From the depths of the grave”(스올의 뱃속에서)(2절). 이 세 문구는 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상황이란 다름 아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하면, 2절에 두 “min”문구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난”이란 단어는 “좁음”과 “공포”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면으로 생각해 보면 요나는 좁은 물고기 뱃속에서 공포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란 말씀은 혹은 지상은 팔레스타인 매장 동굴의 본을 딴 지하의 동굴로 상상되었습니다. 물고기 안에서 요나는 갇혀서 거의 죽음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깊은 속 바다에 던지시므로 요나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습니다(6절). 요나는 어느 면으로 보면 전적 무능력상태에 있었습니다. 동서남북 다 막혀있는 물고기 안에서 그는 감옥과 같이 갇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기도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나오는 동사들인 “둘렀으니,” “에웠고,” 그리도 “쌌나이다”는 요나가 감금의 공포에 휩싸여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소망이 없이 이 모든 일에 뒤얽히게 되었습니다.
(2) 요나의 두 번째 고난은 ‘주님의 파도’였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큰 물결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여기 ‘파도’라는 말은 실상 깨뜨리는 자들(breakers)이라는 뜻이니 곧, 자신을 깨뜨려 부수는 파도를 이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도구들인 대풍이나 선장, 사공들을 통해서 요나의 강퍅한 마음을 부서트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 시편 88편 7절을 보십시오: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또한 성경 시편 42편 7절을 보십시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3) 요나의 세 번째 고난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느낌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여기서 ‘쫓겨나다’란 단어는 창세기 3장24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 요나의 느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불순종과 강팍한 마음에서 회개치 않으려는 가운데서 받은 징계의 폭풍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임한 고난들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느낌과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보고 계시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진 듯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요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도 그러한 느낌 속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43:2),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44:9).
(4) 요나의 네 번째 마지막 고난은 그의 영혼이 그 속에서 피곤해 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여기서 ‘피곤하다’란 단어의 뜻은 ‘쇠퇴해가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는 극도의 낙심 지경에 있음을 알려주는 단어입니다. 요나에게 임한 고난의 지경은 전적 무능력함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혹은 구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러한 상황이 3일이나 되었다는 것은 극도의 낙심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헨리 나우웬(Henry Nowen)의 책 “춤추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고난에 대에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슬픔을 맛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슬픔의 원인은 고통과 아픔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 고통과 아픔을 극복해 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는 것을 봅니다. 부인(deny)도 해보고 무시(ignore)도 해보고 또한 원망 및 불평도 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첫째로 고통과 아픔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춤의 첫 스텝인 것입니다. 춤의 두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마비시켜 부정과수치와 죄책이라는 옥에 가둔 은밀한 상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춤의 세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나 막대한 에너지를 부정하는 데 쏟아 부어서는 아니 됩니다. 춤의 네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나우웬). 여러분, 고통은 성숙을 가져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어두운 밤에 별이 더욱 빛나듯 고난 중에 영혼이 더욱 고상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 가운데서 깨닫고 회개의 삶을 힘쓰게 될 때 우리는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고통은 당시에는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때로는 죽음과도 같고, 죽음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래를 씹는 고통 속에서 진주가 만들어 지는 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고난(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더욱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시119:71). 하나님은 성실하심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7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그릇행하다가 돌이켜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67절).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요나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왜 요나는 자기가 주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요나가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동서남북이 같이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의 죄인임을, 그리고 자기의 불순종을, 특히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한 죄(1:3, 2x)를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낯을 피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에게 임한 부르심과 사명인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1:2)를 듣기를 피하였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도망가되 될 수 있는 대로 지리학적으로 자기 자신과 하나님이 지명하신 니느웨와 거리를 많이 두고자 한 결과로 그는 이젠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로부터 멀리 떠나셨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가운데 요나의 결심은 무엇이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언젠가 제 신앙생활 속에서 저의 죄로 말미암아 진정한 회개의 기도도 드리지 못하므로 제 자신에게 실망과 낙심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서 말씀 중 특히 “yet I will look again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란 말씀에 은혜를 받고 힘을 얻어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7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는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느낌 속에서 그의 영혼이 극도로 낙심해 있었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요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어느 정도로 내려갔는가 하면 깊음 속 바다(3절)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6절)을 때에 요나의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간 것입니다. 불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징계로 내리막길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요나의 이 결심은 저로 하여금 시편 42편 5절 말씀을 기억하게 하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징계인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받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요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요나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Salvation comes from the Lord)(욘2:9).
나를 위하여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고난을 통해서라도 나와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