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신 바를 이루어 나아가시는 요나의 하나님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요나 1장 15절).
이번 주 저는 “다시 불길로 타오르게 하라”(From Embers to a Flame: How God Can Revitalize Your Church)][저자: 해리 L. 리더(Harry L., III Reeder)]라는 책을 읽다가 ‘기도와 예정’(Prayer and Predestination)란 부분에서 좀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기도와 예정의 연관성을 저의 마음에 자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기도와 예정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제가 저희 교회 식구들에게 도전했던 기도 방식이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 기도 방식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proclamation)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제가 섬기는 승리장로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을 붙잡고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옵소서’라고 주님께 부르짖곤 합니다. 또한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교회 대학부 수련회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말씀인 요한복음 6장 1-15절(오병이어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면서 나가갑니다. 비록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와 같은 참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주님 앞에서 항복(surrender)하며 나아가 주님의 손안에 있을 때에는 오병이어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나아가고자 애쓰곤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 저는 리더 목사님의 ‘기도와 예정’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 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칼빈의 예정론을 믿는 저에게 있어서 기도조차도 하나님의 예정을 믿고 간구해야 한다는 리더 목사님의 글은 공감대만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참 제 마음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저를 사랑하사 선택하시고 또한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저의 삶을 통하여 지금도 신실하게 이루어 나아가고 계심을 생각할 때 제 마음에는 큰 힘이 되었고 안심과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귀한 은혜를 입은 후 저희 교회 지도자 성경공부 모임 때 요나서 1장 7-17절 말씀을 공부하다가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요나를 통해서도 작정하신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렇게 다시한번 공부한 요나서 말씀을 토대로 “작정하신 바를 이루어 나아가시는 요나의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요나의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시사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명이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욘1:2).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보다 그 주신 사명의 불복종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니느웨로 가지 않고 오히려 니느웨의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3절). 아마도 요나가 니느웨의 반다 방향인 다시스로 행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목적지인 니느웨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가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렇게 니느웨로부터 멀리 멀리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자기 생각에 멀리 멀리 도망가면 하나님께서 자기 말고 다른 종을 들어 일으켜 쓰실 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나의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무너트리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그의 종 요나를 사용하시사 뜻을 이루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요나를 통하여서도 작정하신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고자 도망가는 요나의 삶에 역사하셨습니다. 그 역사란 먼저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타고 있었던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거의 깨어지도록 대풍을 바다에 던지시므로 폭풍이 대작하게 하셨습니다(4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징계의 폭풍을 요나에게 내리신 이유는 요나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 니느웨로 가서 그 큰 성읍을 쳐서 외치길 하나님께서는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 상황에서도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자고 있었습니다(5절). 이렇게 깊이 잠들어 있는 불순종하는 종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고자 이방인 선장을 사용하셔서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상기 시켜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역사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이방인 선장은 잠자는 요나에게 가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6절)고 말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선장을 말을 통하여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인 “너는 일어나 … 가서 외치라”(2절)를 생각나게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명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 도망갔고 또한 도망가되 다시스로 내려갔고, 배로 내려갔고 또한 배 밑층으로 내려가 깊은 누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깊이 잠들어 있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의 말을 통하여 다시금 일어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외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들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니느웨로 가기에 앞서 요나는 징계의 폭풍을 통해서 자신의 불순종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며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방인 선장뿐만 아니라 이방인 사공들도 사용하셔서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을 통하여 깊이 잠들어 있었던 요나 잠에서 깨우셨을 뿐만 아니라(물론 요나는 잠에서 깨어 선장의 말대로 곧장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씀은 요나서 1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요나서 2장에 가서야 요나는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하였음) 이방인 사공들을 통하여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불순종의 죄를 이방인 사공들 앞에서도 자백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방인 사공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고자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자신들에게 임했는지 알고자 제비를 뽑았는데 그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 것입니다(7절). 그 때에 사공들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8절)리고 물었는데 이 질문들이 분명히 요나의 양심을 찔렀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공들이 요나에게 “네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요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9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고 있었어야 하는데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불순종하는 주님의 종의 양심을 찌르는 말입니까. 그래서 요나는 사공들이 자기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라는 물었을 때 요나는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 인줄을 내가 아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2절).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 이방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요나, 결국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습니다(10절). 이렇게 요나의 하나님은 요나에게 향하신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고자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요나로 하여금 불신자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고자 요나로 하여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2절)고 이방인 사공들에게 말하게 역사하시므로 말미암아 입술의 자백에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요나로 하여금 철저히 회개의 행동을 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 때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했습니다(13절).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12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를 살려보려고 창조주 하나님께 ‘씨름’하는 모습이 말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오히려 요나를 살려보려고 노를 힘써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했을 때 바다로 하여금 더 지속적으로 또한 점진적으로 흉융하게 하신 것,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요나처럼 도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징계의 폭풍을 허락하시사 우리의 인생의 배만 거의 깨어지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폭풍도 일으키시되 우리가 입술의 죄의 자백과 더불어 회개의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 마음속에 폭풍이 점점 더 흉융하여 절대 우리는 평안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결코 흉흉한 바다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의 행동을 보이기 전까지는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임한 폭풍은 점점 더 흉융해 질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 사공들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9절)께 백기를 들고(항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우리는 요나서 1장 14절에서 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처음에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을 때 자기들의 신들에게 부르짖었던 이방인 사공들이(5절) 14절에 와서는 요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놀랍지 않습니까? 요나의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고 있는 요나를 통해서도 이방인 사공들에게도 하나님을 선포하게 하셨고(9절) 또한 이방인 사공들로 하여금 자신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신 것입니다. 니느웨에 가서 외쳐야 할 요나, 그러나 불순종하여 도망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시사 배 안에 있었던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포케 하시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작정하신 바를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요나에게만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요나를 통하여서도 이방인들에게도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입니까? 결국 이방인 사공들은 더 이상 주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13절) 요나의 하나님께 “…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라고 기도한 후(14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15절). 그 때 바다는 뛰노는 것이 곧 그쳤습니다(15절). 그 흉융한 바다가 요나를 삼키더니 즉시 잠잠해 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작정하신 바를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사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들어 일으켜 사용하시고자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고 도망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즉시 자백하고 회개하여 돌이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지 않고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징계의 폭풍을 던지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요나처럼 내리막길 신앙생활 속에서 배 밑층까지 내려가 깊이 잠들어 있으면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의 푹풍조차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으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우리 마음에 울려 퍼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마음을 두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말한 이방인 선장의 말처럼 우리는 잠자는데서 일어나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께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죄를 자백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흉흉한 바다와 우리 마음에 흉융한 바다는 즉시 잠잠케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명을 회피하고 싶은 자를 통해서도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작정하신 바를 이루어 나아가시는 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