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3)
[요나 1장 11-17절 말씀 묵상]
21세기 선지자로 불렸던 고 에이든 토저(A. W. Tozer)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worshiper)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worker)로 만드신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요 4:23)가 되기 힘쓰기보다 마르다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드리고자 분주히 신앙생활(눅 10:40)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being)와 “행함”(doing)의 관계를 기억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행함은 우리의 존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선한 행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우리의 인격에서 나와야 합니다. 성경에는 참된 예배자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신격)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이러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에 나오는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기의 죄로 밧세바와 동침하여 난 첫째 아기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후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욥기 1장 20절에 나오는 욥을 보십시오. 그는 모든 재물과 자녀들까지 다 잃고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의 행하심(행동)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후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 사공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 바다의 뛰노는 것이 그친 것을 보고 사공들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예배(“재물”)를 드렸습니다(욘1:16).
저는 오늘 본문 요나 1장 7-17절까지 말씀 중심으로 “요나의 하나님 (3)”란 제목을 걸고 요나의 하나님은 셋째로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요나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예배자로 세움을 받은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요나는 사공들로부터 면책을 받고(1:8-10) 어떻게 해야 바다가 그들을 위해 잔잔하게 될 것인지 질문을 받습니다(11절). 그 때 요나는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였습니다(12절). 그 이유는 사공들이 큰 폭풍을 만나 이유가 다름 아닌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한 것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사공들의 반응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1) 사공들의 첫 번째 반응은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힘써 노를 저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흉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여기서 “돌리고자”란 단어의 뜻은 “to bring back”(되돌리다), to return(되돌아가다), to repent(회개하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지만 여기서 사공들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9절)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사공들에게 고백한 것은 요나의 하나님께서 바다와 육지를 지으셨다고 하였는데(9절) 사공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바다 위에서 폭풍과 싸워서 배를 되돌려 하나님이 지으신 육지로 돌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요나를 통하여 들었지만 그 하나님을 아직은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무지함 가운데서 사공들도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려고 하였습니다. 이 “돌리고자”란 이 단어는 요나서 3장 8, 9절에 또 나옵니다. 요나 3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여기서 “떠날 것이라” 단어는 ‘포기하다’ 즉, ‘회개하다’란 뜻입니다. 니느웨 왕이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들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조서를 내려 니느웨 선포하였습니다(7절). 이러한 니느웨 왕의 행동은 요나서 4장에 나오는 요나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당하길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를 통하여 임할 때에 이방인 니느웻 사람들이 왕부터 시작하여 다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개하는 모습은 왠지 요나서 1장에 나오는 요나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들이 힘써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고자 했고 사공들은 힘써 노를 저었습니다. 요나 3장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니느웨 왕이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고자 하는 모습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 사공들이 하나님의 뜻인 요나가 바다에 던진바 되는 것을 돌이키고자 힘써 노를 저는 모습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니느웨 왕은 자기 백성을 위했고, 사공들은 요나를 위해서 그리했습니다. 뭔가 니느웨 왕과 사공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고자 했던 반면에 요나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이방인 사공들의 반응입니다. 한번 대조해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의 약 12만 명의 영혼을 아끼지도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배 안에 있던 선장과 사공들을 아끼지도 아니했던 반면에 이방인 선장과 사공들은 요나 한 사람을 아끼는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더 놀라운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사실을 알고도 요나를 탓하지 않고 살려보려고 흉흉한 바다와 싸우는 이방인 사공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왠지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보다 이방인 사공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더 본 받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공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 났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1장 13절을 보십시오: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흉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비록 사공들이 하나님이 던지신 대풍을 이겨서 요나를 구하고자 하였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면 그럴수록 바다는 점점 더 흉흉해졌기 때문입니다[참고: “바다가 … 점점 더 흉흉하므로”란 문장과 똑 같은 문장이 이미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두 문장에 흥미로운 히브리어 단어는 “continuing”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바다의 흉흉함이 지속적이며 점진적임을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2) 사공들의 두 번째 반응은 기도였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4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방인 사공들의 기도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요나 1장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던 이방인 사공들이 오늘 본문 1장 14절에 와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나 1장 5절과 오늘 본문 1장 14절에서 사용된 ‘부르짖다’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두 다른 단어입니다. 요나 1장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신들에게 부르짖을 때 쓰인 단어는 무엇인가 필요해서 구할 때 쓰이는 단어이고 오늘 본문 요나 1장 14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쓰인 ‘부르짖다’란 단어는 1장2절(“… 그것을 쳐서 외치라”)과 3장4절(“… 외쳐 가로되…”)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라기보다 하나님께 선포(proclamation)하는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요나 1장 6절에서 선장이 잠자는 요나를 깨워서 “일어나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하였는데 거기서 쓰인 단어 “구하라”는 오늘 본문 1장 14절에 쓰인 “부르짖어”와 똑 같은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이방인 사공들이 요나의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었는가?”라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추측하였습니다: “그들이(사공들이) 요나와 이야기하는 중, 본서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여호와 종교에 대한 사상을 그에게서 받았을 것이다”(박윤선). 제 생각엔 9절에서 요나가 이미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사공들에게 알려 준 사실을 확정시켜주는 구절이 오늘 본문 1장 14절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박윤선 박사님 말대로 요나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요나와 사공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하여 더 많은 대화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추측이 맞던지 틀리던지 상관없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공들이 요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9절에 나타난 사공들을 향한 요나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전달된 것을 확정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방인 사공들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였습니다(14절). 이것은, 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지는 말아달라는 뜻입니다(박윤선).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동을 범죄의 응보로 판단하시며 또한 그 사람은 재판에 상소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볼드윈). 이방인 사공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14절). 여기서 “무죄한 피”란 말은 “요나가 사공들에게는 잘못한 일이 없었으니 만큼, 이제 그들이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면 무죄한 사람을 죽이는 셈이란 말입니다(박윤선). 14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 이다”. 이방인 사공들은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할 때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꼭 그렇게 하도록 작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사공들의 세 번째 반응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여기서 ‘던지다’란 단어는 4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던지시매”(4절), “사공들이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5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2절), “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매”(15절). 하나님께서 대풍을 바다에 던지시므로 결국엔 사공들을 통해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시게 만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뛰노는’(맹렬한, 격노한)란 단어가 바다에 쓰인 곳은 여기 밖에 없습니다. 그 단어는 분과 화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바다는 거의 인격화되어서 그의 창조주께 순종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성경 이사야 30장 3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하나님은 바다를 사용하셔서 그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케 하므로 맹렬한 폭풍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나로 하여금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매 어떠한 일이 있어났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1장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대작하였던 폭풍이(4절), 맹렬한 폭풍이 요나를 삼킨 후 잠잠해 졌습니다(15절).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것은 요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사실을 확정시켜 줍니다.
(4) 사공들의 마지막 네 번째 반응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6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기서 ‘두려워하다’란 단어는 요나 1장에 4번이나 나옵니다: “사공이 두려워하여”(1:5),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1:9), “심히 두려워하여”(1:10),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1:16). 요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이방인 사공들에게 고백했지만 진정으로 그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했는지는 그의 행동을 볼 때에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방인 사공들은 대풍으로 인하여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을 때 두려워하다가 요나의 고백을 듣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16절에 와서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 바다가 잔잔해 지는 것을 보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요나와 사공들 중 누가 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사공들은 진정한 경외심 속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요나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사공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하게 하시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사공들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여기서 ‘예비하다’란 단어는 요나 4장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4: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4:7),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4:8). 무엇을 말씀해 줍니까? 우리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또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창세기 22장 1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요나를 통해서도 이방인 사공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그 사공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시고 또한 책임을 지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흉흉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사공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로 세우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씨름”을 하였던 이방인 사공들,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케 하셨던 하나님,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패하게 하시사 요나를 바다에 던지도록 순종케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사공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므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이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1:9). 결국 이방인 사공들은 귀로만 듣던 창조주 하나님을 씨름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로 하여금 매트 레드먼(Matt Redman)의 “마음의 예배”(The Heart of Worship)란 복음성가를 하나님께 찬양 드리게 하셨습니다:
(1절) “찬양의 열기 모여 주 앞에 나와 더욱 진실한 예배드리네 주님을 향한
노래 이상의 노래 내 맘 깊은 곳에 주께서 원하신 것
화려한 음악보다 뜻 없는 열정보다 중심을 원하시죠
주님께 드린 맘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2절) “영원하신 왕 표현치 못할 주님의 존귀
가난할 때도 연약할 때도 주의 모든 것
노래 이상의 노래 내 맘 깊은 곳에 주께서 원하신 것
화려한 음악보다 뜻 없는 열정보다 중심을 원하시죠
주님께 드린 맘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주님께 드린 맘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후렴) “주님께 드린 마음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주님께 드린 마음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합당한 예배자로 세움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불순종하고 불충성한 요나와 같은 자를 통해서도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