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2)
[요나 1장 7-17절 말씀 묵상]
우리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왜 그렇게 거짓말들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상대방을 배려해서 하는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일진데 왜 그렇게 ‘선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거짓말이 들통 난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계속 끝까지 우기는 모습을 볼 때 왜 그리 행동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인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더라도 일단 한번 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이후의 사죄에도 용서를 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가 봅니다. 예를 들어 한국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한 경우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끝까지 우기는데 아마도 이것은 정직하게 고백하더라도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에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한국인들 가운데는 핑계가 발달한 것 같습니다. 미국인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한 거짓말이 들춰졌을 때 끝까지 우기기보다 그들은 '정직'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아마 문화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니탓'을 많이 하고 일본인은 '내 탓'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기업이 도산할 때 사장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만 한국의 기업체에서 사장이 책임을 자인하면 용서되지 않고 매장 당하므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잘 합니까? 아니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문화, 정서)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서도 진정으로 자기의 죄(잘못)를 고백했을 때에 용서하지 않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또한 우리 한국인들은 ‘내 탓이오’ 말하기보다 ‘당신 탓이오’(당신 때문이야)란 말을 더 많이 합니까? 과연 우리 성도들은 지금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정적인 일들을 보면서 이것은 ‘내 잘못입니다,’ ‘내 탓입니다’, ‘내 책임입니다’ 라고 말하는 책임의식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나서 1장 1-6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3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은 그의 미션에 우리가 동참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미션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심에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저는 오늘은 본문 요나 1장7-17절까지 말씀 중심으로 “요나의 하나님(2)”란 제목을 걸고 요나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한 2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요나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순종의 결과를 책임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요나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첫째로, 요나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순종의 결과를 책임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7-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오늘 본문 말씀 배경을 보면 요나가 타고 있던 배가 하나님이 내리신 대풍으로 말미암아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을 때에 이방인 사공들이 각자의 우상 신에게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니까 결국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그들에게 임하였는지 책임을 묻고자 제비를 뽑게 됩니다(7절). 제비를 뽑는 행동은 그 옛 시대 때에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누구의 잘못인지 죄를 발견하는 것이요(삼상 14:41-42), 둘째는 신적 인도(에 3:7; 잠16:33)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 사공들이 제비를 뽑은 이유는 첫 번째 의미인 누구의 잘못인지 죄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요나와 대조적으로 이방인 사공들은 책임을 묻고자 제비를 뽑은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책임”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4번이나 나옵니다(욘 1:7, 8, 12; 4:10).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요나처럼 불순종하고 도망 다닐 때에 우리의 책임을 묻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1장 7절을 보십시오: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이방 도시 니느웨의 죄를 책망하러 가지 않으니, 일은 역전하여 이방인들이 요나의 죄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박윤선).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무책임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범한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에 우리의 무책임한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자 거짓말이나 혹은 변명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사울 왕을 들 수가 있습니다(삼상 15:22-23).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니까 사울은 사무엘에게 거짓말(13, 20절)을 하고 또한 무책임하게 변명(15, 21절)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도 무책임하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요나는 무책임하였는지 오늘 본문 요나 1장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어떻게 요나는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까? 요나가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든 것은, 그가 여행의 피곤 때문이 아니었고 심령이 어두워진 까닭이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무책임한 잠입니다. 지금 배 안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 파선을 염려하여 떠드는데 어떻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요나는 깊이 잠들었을까요?(박윤선). 요나는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길 기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잠든 사람은 요나처럼 하나님의 계명으로부터 도망가기 바쁨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이 요나처럼 이러한 무책임한 잠을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 다니면서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면서 지금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을 통해서 요나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6절).
땅 속에 굴을 파고 사는 “설치류”들의 생존 비결을 아십니까? 그들은 후각이 대단히 발달해 있다고 합니다. 먹을거리를 찾아다닐 때도 후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몸집이 작고 자신들을 방어할 무기가 변변치 않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방패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치류들 입장에서는 집밖으로 나가도 집안으로 들어와도 온통 자신들을 노리는 적들이 우글댑니다. 하늘엔 매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들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고, 땅에서는 살쾡이로부터 오소리, 족제비들과 수시로 마주쳐야 합니다. 집안에 들어와도 안심 할 수 없는 것이 뱀은 소리도 없이 덮쳐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쥐나 다람쥐 같은 설치류들은 잠을 잘 때도 후각만은 잠들지 않고 깨어있습니다. 굴 입구로 뱀이 습격을 해오면 굴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뱀의 냄새가 먼저 들어오지 않습니까? 냄새가 나면 잠이 들었다가도 후각이 작용하면서 잠을 깨고 대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후각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잠이 들어도 깨어있어야 하는 기관이 설치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절대 잠들어서는 안 되는 기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적 감각이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입니다. 곳곳에 죄와 사망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유혹거리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같이 전쟁터의 지뢰와 같은 치명적인 유혹들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삼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늘의 독수리 보다 더 날카롭게 우리를 주목하며 기회를 엿보다가는 뱀처럼 소리 없이 우리를 덮칩니다. 그러므로 잠들었을 때에도 깨워놓아야 할 것이 우리의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어있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춰내실 때 무책임하게 회피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 믿음의 결단이란 하나님께 범한 죄의 결과를 우리 자신이 책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돼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요나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7절을 보면 사공들이 이 재앙[4절: “대풍”(“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이 누구로 인하여 그들에게 임했는지 알고자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제비가 요나에게 당했습니다. 그리할 때 사공들은 요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8절). 이 사공들의 질문들은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 네 가지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는 말은 요나로 하여금 그의 무책임한 행동을 상기케 하는 질문입니다(요나의 무책임한 행동과 이방인 사공들의 제비를 뽑아 누구의 책임인지 찾고자 하는 책임 있는 행동을 비교해 보십시오).
(2) “네 생업이 무엇이며”란 질문은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서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기케 하는 질문입니다(요나가 자기의 생업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불성실했던 것과 이방인 사공들이 자기들의 직업인 사람들을 한 장소에서 다른 한 장소로 안전이 데려다 주는 것에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3) “어디서 왔으며”란 질문은 요나로 하여금 지금 향하고 있는 다시스의 반대 방향인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니느웨를 기억케 하는 질문입니다.
(4)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란 질문은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할 책임을 기억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사공들의 질문들에 요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 1장 9절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이 요나의 답변의 내용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1) 첫째는 요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요 (2)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은 두 가지입니다:
(a) 첫째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입니다. 이 요나의 고백은 이방인들도 알아들
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
들을 히브리 사람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 요나의 둘째 고백은 “…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입니다. 이 고백 내
용은 좀 의심스럽습니다. 진정으로 요나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더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여 도망가겠는가?란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입니
다. 요나의 행동과 고백은 불일치하였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고백도 두 가지입니다.
(a) 첫째는, “여호와”, 주님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요나
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을 하게 되었는지 이 고백 또한 언행일치가 되지 않습
니다.
(b) 둘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요나 자신이 당면한
현재 상황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바다의 풍랑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그는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었던 이방인 사공들에게 가장 능력 있는 하나님
이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선
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요나가 도망을
가는 도중 하나님의 징계인 폭풍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배 안에 타고 있던 이방
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입니까? 불순종하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라도 징계를 받는 가운
데서 함께 하고 있었던 비신자 사공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참 놀랍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고백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한 세 가지의 반응을 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사공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0절을 보십시오: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 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여기서 ‘두려워하다’라는 단어는 9절의 요나의 고백에 나오는 “경외”란 단어와 똑 같은 뿌리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 10절에선 두려움 또는 공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려워하다’란 단어는 요나서 1장에만 세 번이나 나옵니다(5, 10, 16 절). 요나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듣고 실지로 보이는 바다의 폭풍을 통해서 이방인 사공들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요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였지만(9절)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을 갔지만 이방인 사공들은 바다의 폭풍과 요나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10절)라고 꾸짖습니다. 결국 죄를 범한 선지자는 도리어 불신자들에게 꾸지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종이 이방인 사공들에게 꾸지람을 받는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요나가 우선적으로 받은 벌이였습니다. 불신자들의 입에서 나온 꾸지람 곧,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라는 말이 그 때에 요나의 양심을 분명히 찔렀을 것입니다.
(2) 둘째는, 자연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서 1장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바다가 점점 흉융한지라….” 요나가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풍랑은 멎지 않고 도리어 더욱 흉흉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진정한 회개는 입을 열어 고백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나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임한 폭풍은 결국 이방인 사공들에게도 피해를 준만큼 그 흉흉한 바다를 잠잠하게 하기 위해선 요나에게 결정적인 회개의 행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3) 셋째로, 사공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1절을 보십시오: “…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요나에게 향한 사공들의 질문은 죄인인 요나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고백함에서 끝나지 않고 결정적인 회개의 행동을 보일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할 때 요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기서 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연고”(12절)란 단어와 “인하여”(7절)란 단어가 똑 같은 단어란 것입니다. 7절에서 누구의 책임인가를 알려고 제비를 뽑았는데 12절에 와서야 요나는 자기의 책임인 것을 인정하므로 진정으로 사공들 앞에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책임으로 인하여 온 큰 폭풍을 잠잠케 하기 위해선 자기를 바다에 던져야 함을 알았기에 이방인 사공들에게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회개의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이 요나의 회개의 행동을 보면서 황성주 박사님의 "성서 건강학"이란 글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목욕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진취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들이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목욕을 싫어하는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위축되어 있고 자기 관리에 대한 의욕이 결여되어 있다. 온갖 잘못된 건강속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주변을 청결하게 하는 간단한 습관이 건강의 주춧돌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따뜻한 물(40도)에 3분, 찬물(18도)에 1분 정도 하는 온냉교대법을 2∼3번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전통적 민간요법인 목욕에 대한 인식 이 새로워지고 있다. 예로부터 목욕은 몸의 피로와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피로회복제와 긴장 완화제로써 널리 애용되어 왔다. 그리고 목욕은 혈액순환을 원활 하게하여 신진대사를 활성화시키고 피부 호흡을 촉진시켜 준다. 특히 온냉교대법의 경우 모세혈관의 팽창과 수축을 극대화 시켜 전신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 혈관을 더욱 젊고 싱싱하게 해준다. 또한 땀을 충분히 흘리게 해줌으로 노폐물을 배출하는 이른바 운동효과가 있다. 그러나 뜨거운 탕욕이나 사우나에 장시간 노출되는 경우 몸에 무리한 자극을 주어 체력소모와 부작용을 유발할 염려가 있다. 신앙생활에도 정기적인 목욕은 필요하다. 자백과 참회가 없는 신앙생활은 무기력 증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노폐물을 제거하는 기능이 마비되고서야 어찌 생동감 있는 영적 생활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인간이 왜곡된 사회구조 속에서 왜곡된 인격을 가진 이웃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한 죄를 짓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죄를 안 짓는 것은 불가능하나 죄를 인정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진흙바닥에 넘어진 어린아이가 곧 바로 부모에게 달려가듯 죄를 깨달은 즉시 사랑의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탄력 있는 신앙생활이 성숙한 크리스천의 증거가 아닐는지. 고백은 우리의 일이고 용서와 깨끗케 해주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이다. 죄 고백의 깊이에 따라 신앙의 성숙도가 좌우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깊이 하는 것은 곧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라는 한 원로목사님의 설교가 귓가에 쟁쟁하다”(인터넷). 여러분, 사죄의 확신 성경구절인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들춰진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되 우리에게는 요나처럼 회개의 결단뿐만 아니라 회개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신의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온 피해를 볼 때에 우리는 책임을 질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돼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에게 임한 “큰 폭풍”은 잠잠해 질 것입니다.
요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순종의 결과를 책임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요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께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므로 저와 여러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께 물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은혜로 충만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크고 많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의 죄의 결과을 받아들이게 하시며 또한 나의 불순종의 죄를 고백케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