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하나님 (1)
[요나 1장 1-6절 말씀 묵상]
영화들 중 이름이 비슷한 두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두 영화의 제목은 “미션”(Mission)과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입니다. 이 두 영화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미션”이란 영화보다 “미션 임파서블”이란 영화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미션”이란 선교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정글에서 복음(Good News)을 전하다가 고생 끝에 결국은 죽임을 당하는 반면에 “미션 임파서블”이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죽지도 않고 여러 종류의 과학 기술(technology)을 사용하여 결국에는 악인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화의 결과가 주인공이 악인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 주인공이 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사는 것을 좋아하지 예수님과 그 분의 미션을 위하여 희생하며 순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윌리엄 채드윅(William Chadwick) 목사님은 그의 책 “양 도둑질”에서 현대 교회 성도들을 두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교회 쇼핑객들”(church shoppers)과 “맥도날드 교회”(McChurch). “교회 쇼핑객들”이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교회에 들어왔다가 같은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현대 교회는 이 교회 쇼핑객들과 교회 소비자들로 가득 차 있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맥도날드 교회”는 무엇입니까? “맥도날드 교회”란 “패스트푸드 그리스도인들”(fastfood Christians)을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는 교회로서 전통적인 가정교회와 그 안에 존재하는 관계 중심적 가치관을 대신해 버렸습니다. 마치 패스트푸드를 좋아하는 고객들이 맥도날드에 들려 햄버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듯이 패스트푸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라는 체인점에 들러 맥도날드 제품들을 주문하듯이 교회에 이것저것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제공하는 경험을 소비하고는 차를 몰고 나가다가 조금 전에 경험한 관계는 마치 햄버거 포장지처럼 삶의 고속도로에 버립니다. 채드윅 목사님은 현대 교회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이 역사적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회에 충성하지 않는다. 소비심리가 교회에 대한 헌신의 성격까지 바꾸어놓았다. 교회는 섬기는 곳에서 섬김을 바라는 곳으로 바뀌었다. 한 가족이 교회를 선택할 때, 교단은 이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고 ‘이 교회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가?’라는 문제가 가장 큰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채드윅). 여러분은 이 채드윅 목사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 요나 1장 1-6절 말씀 중심으로 “요나의 하나님(1)”이란 제목 아래 이기적이고 불순종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요나를 통하여서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나아가시는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교훈을 받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미션에 동참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이였습니다(1절). 무엇을 외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한 바”입니다(3:2).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명하사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입니다(2절 하반절). 다시 말하면, 니느웨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계18:5)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명하사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죄는 하늘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들이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사 그의 미션에 동창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으로 가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외치하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이 세상에 외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일어나 이 세상으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와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미션에 겸손히 동참해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같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라도 구원의 미션을 이루길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듯이 “요나”(Jonah)란 이름의 뜻은 바로 ‘비둘기’(dove), ‘무감각하다, 분별이 없다’(senseless)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나의 아버지인 “아밋대”(Amittai)란 이름의 뜻은 ‘나의 진리, 나의 성실’(my truth, my faithfulness)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요나 전체 흐름에 나타나는 진리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진리란 비록 요나는 무감각하고 분별이 없지만 요나의 하나님 아버지는 요나에게 진실하시며 성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요나처럼 무감각하고 무분별하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진리가 되시며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실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무감각하고 무분별한 요나와 같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미션에 겸손히 순종하는 자세로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미션에 부르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그의 미션에 부르고 계신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를 조건적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감각하고 미련한 요나와 같지 않습니까? 니느웨 사람 십이만 여명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요나 선지자가 아끼지도 아니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무감각하여 영혼을 아끼는 마음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교에 부르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들어내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참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우리는 이 죄악 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신 목적을 우리는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하며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저와 여러분을 자신의 미션에 동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영혼들을 구원하사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딤전2:4).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 죄악 된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빌1:8)을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때에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문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불성실한 우리 자신을 바라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11장 29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그의 미션에 부르시사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존감(confidence)을 가지고 담대히 용기(courage)를 내어 하나님의 미션을 일관성(consistent)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미션을 완성(completion)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심에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의 미션에 동참하길 원하시사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거짓말(스스로 속이는 것도 포함)과 변명을 하기도 합니다. 그 한 예로 우리는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나오는 사울 왕을 들 수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미션은 이것이였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18절).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미션에 불순종하였습니다(9절). 그는 그의 백성과 함께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습니다(삼상15:9). 그러면서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렇게 거짓말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13절). 그 때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14절)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사울의 변명은 이것이였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에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 21절). 이 얼마나 그럴싸한 변명입니까? 사울 왕의 변명은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그럴싸하게 들리는 변명이 아닙니까? 혹시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변명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라 …”(22-23절).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을 하였습니까?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미션에 동참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주님으로부터 도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 그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선교지인 니느웨의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했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란 문구가 3절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 문구의 뜻은 요나가 편재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렘23:24). 이것은 요나가 될 수 있는 데로 니느웨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께서는 요나 대신 다른 종을 찾아서 쓰셔야 할 것을 생각하고 요나는 니느웨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갔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러면 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까? 한 세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가능한 이유는 요나는 니느웨가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데니슨).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로써 이스라엘의 풍성한 축복에 대하여 예언을 했던 요나 선지자(cf. 왕하 14:25, 26)가 여로보함 2세 때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불경건함을 나타낸 이스라엘 백성들(cf. 왕하14:24; 호 4; 암 5, 6)에게 회개하고 돌아오길 외쳤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나 선지자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데 하물며 믿지 않는 원수 앗수르 나라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들을지 의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쳐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가능한 이유는 요나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는데 앗수르(수도: 니느웨)를 ‘막대기’로 쓰시겠다고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점진적인 반앙(죄)로 말미암아 요나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들인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cf. 호1:1, 암 1:1, 왕하 14:23, 24)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비교: 호 11:5; 암 5:27). 그러므로 요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써 애국심을 가졌다면 분명히 앗수르의 멸망을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쳐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3) 세 번째 가능한 이유는 요나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맥아더).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원수이며 죽어가는 영혼들인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의 생각은 니느웨가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요나는 그의 머리로 이러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오히려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기에 그들을 축복하지 않고 오히려 니느웨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이스라엘에게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사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향할 것이다.’ 어쩌면 요나는 이러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이 요나의 불순종은 마치 호세아의 부인 음탕한 고멜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영해 주듯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영해줍니다. 마치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요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픈 영적 상황을 극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픈 영적 상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명령과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신적 부르심에 불순종함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불순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심에 불순종한 요나를 징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1장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폭풍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온전케 하는 폭풍(Storm of Perfection)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8장 23-27절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성장시키고자 온전케 하는 폭풍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단련의 폭풍을 주셨습니다.
(2) 둘째는, 징계의 폭풍(Storm of Correction)입니다.
이 징계의 폭풍이 바로 오늘 본문 요나 1장 4절에 나오는 폭풍입니다. 주님께서는 불순종한 요나를 사랑하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케 하시고자 징계의 폭풍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대풍”은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된 것입니다(하나님의 첫 번째 도구).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2장 4-11절을 보면 한 다섯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a)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6절),
(b)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6절),
(c)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기 원하시기 때문에(10절),
(d)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시키시기 원하기 때문에(11절),
(e)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11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하여 대풍을 막대기로 사용하시사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하여 사공들과 요나는 다르게 반응하였습니다. 배 사공들[“Sailors”: “salts”라는 뜻)의 반응을 보십시오: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5절). 사공들은 하나님의 징계인 대풍으로 인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을 때(4절)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 신에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5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폭풍을 던지셨고(4절) 사공들은 물건을 바다에 던지는 모습이(5절) 말입니다. 왠지 불신자 사공들이 요나 선지자 보다 하나님의 행동을 더 본받고 있는 듯 해 보입니다. 그러면 요나는 하나님의 징계인 대풍에 어떻게 반응을 하였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went down), 배로 내려갔고(went down), 배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went down). 그는 “일어나(get up) 가라”(2절)는 하나님의 명령과 정반대의 행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이렇게 청개구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정반대로 행하고 있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불신자 배 선장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명령을 울려 퍼지게(echoed)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get up)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2절)는 하나님의 명령에 욥바로 내려가고, 배로 내려가고, 배 밑층으로 내려간 요나는 하나님의 징계인 대풍을 만나 배가 파선될 정도로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불신자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부르짖고 있었지만 요나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배가 파선될 정도로 대풍이 임했는데도 배 밑창에서 요나는 그렇게 깊이 잠들어 있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을 통하여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을 통하여 요나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 배의 선장이 바로 하나님의 두 번째 도구였습니다[첫 번째 하나님의 도구는 “대풍”(4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대풍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정반대로 불순종하고 있었던 요나 선지자를 징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을 통하여 요나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요나, 대풍 속에서 이방인 사공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을 때에도 배 밑층에서 졸고 있었던 요나, 우리는 이 요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 가라”고 명하고 계시는데 혹시 우리는 요나처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선교지로 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되 내려가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는 내리막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대풍”과 같은 징계를 받고 있으면서도 “요나”란 이름의 뜻처럼 우리는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무분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고 계시는 줄도 모르고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한 영적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신자들을 통하여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상기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케 만들고 계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의 미션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미션에 동참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미션에 부르심에 순종하여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미션에 동참하게 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께 순종하므로 주님의 미션을 이루어 드리는데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