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당식의 예배자들

 

 

[느헤미야 12장 27-30, 43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헌당식과 입당식의 유래를 아십니까?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교회당(예배당)이 없었습니다.   집에서 들 에서 산에서 자유롭게 모였습니다. 교회란 ‘에클레시아(Ekklesia)’ 곧 ‘불러낸 무리’인 것입 니다. 건물이 결코 성전이나 성당이 아니라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성전입니다.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한 2세기 이후부터 교회당 건물은 짖기 시작하여 콘스탄틴이 등장하 면서 교회당이 고급스러워지더니 로마 카톨릭 전성기에 소위 성당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 다. 그리고 부패는 더욱 속도가 빨라지더니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위해 속죄권(면죄부) 판 매라는 중세 암흑시대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교회당마다 중 세 성당을 뺨치는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당 헌당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일하는 자들’(workers)과 ‘파수꾼 들’(watchers)이 있었지만 이젠 성벽이 완공된 후에는 ‘예배자들’(worshipers)이 세워지고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예배자들은 얼마나 열심히 헌당식 예배를 드 렸는가 하면 “예루살렘에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릴 정도였습니다(느12:43). 이미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느헤미야 8-10장에 나오는 수문광장에서의 말씀의 부흥을 경험한 이 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전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젠 이 헌 신된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이루신 역사인 재건된 예루살렘 성벽을 헌당하는 일 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순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먼저 헌신한 후 예루살렘 성벽을 헌당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벽을 헌당하였지만 헌 신한 사람들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정으로 헌신된 ‘일하는 자들’(workers), 영 적 ‘파수꾼들’(watchers)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 들’(worshipers)이 없는 가운데서 교회 건물과 크게 멋지게 지면 뭐합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 27-30, 43절 말씀 중심으로 “헌당식 예배자들”이란 제목 아래 헌신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함에 있어서 무엇을 행하였는지 한 3가지 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헌신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자기 자신들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 30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 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었을 때에(27절) 사방에서 레위인들이 모여 왔는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들의 “몸”과 “백성”, “성문” 을 모두 “정결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레위인들은 모여서 제일 먼저 정결케 하는 일을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은 다 죄인이므로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려 할 때마다 먼저 정화의 순서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레위인들이 무슨 방법으로 “정결케”하는 의식을 행했는지는 여기에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휀샴(Fensham)이란 학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금식과 성관계를 끊는 것, 속죄 제물을 드렸을 것이며 백성들은 옷 을 씻는 것, 목욕 등등이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문과 성을 정켤 게 했다는 말은 분명치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휀샴, 박윤선).

 

요즘 세상에 예배당을 헌당하면서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정결케 하고 있습니까? 만일 하고 있다면 정결케 하고 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개혁 시대 때, 개혁주의 자인 칼빈이 추구했던 “예배의 정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쓴 이정석 교수는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며 예배개혁이였다”라고 말하면서 “칼빈은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데, 예배가 타락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 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 명을 걸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예배와 비성경적인 그릇된 예배 를 구별하면서, 로마교회의 우상숭배가 그릇된 예배의 전형이 라고 비판하고, 그릇된 예배 의 3가지 유형을 소개하였습니다(인터넷):

 

  •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입니다: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로 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 통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의 왜곡이다. 특별히, 그는 골로새서 2장의 “자의적 숭 배”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혹독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종교 적 철저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교성이다. 자 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행위는 그것이 아무 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릇된 예배인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인 들의 종교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며, 그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아니며 인간중심적인 자기예배일 뿐이 다.”

 

  •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입니다:

 

칼빈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 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 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 한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하다. 하나님을 두려 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운 죽은 정통의 예배가 여기에 속한다.”

 

  • 셋째는 연극적 예배입니다: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배우 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멋있는 예배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 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 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순간적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하 고 흠모할 뿐이며,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 심리적 조작에 의한 유사경험 일 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 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사용 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 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는 예배에 관하여 회복 되 야 할 부분들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 주요행사로서 “교회 창립 감사 예배”가 있습니다. 교회 창립일은 그 교회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일과도 같 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교회의 탄생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에서 주일 예 배를 교회 창립 감사 예배로 드리도록 합니다. 이때 예배 형식은 평소의 주일 예배 형식을 따르되, 특별히 설교는 노회안의 타 교회 목사님을 초빙할 수도 있으며, 또한 교회 창립을 축하해 주기 위해 타 교회 찬양단이 와서 찬양을 해주는 순서를 마련할 수도 있다. 예배가 마친 후에는 2부 행사로, 떡을 떼며 공동 식사를 했던 초대 교회처럼 교회 에서 준비한 음 식을 먹으며 서로 친교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인터넷). 저희 교회도 이젠 다음 주일 (7월10일) 오후 4시면 교회 창립 기념 감사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크신 은혜를 베풀 어 주신 크신 하나님께 크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자 합니다(시145). 세 언어로 찬양과 경 배를 드릴 것이며 예배 후 식탁교제도 한국 음식, 미국 음식, 남미 음식을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다 인가하는 질문을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춰볼 때 던지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던지는 도전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헌신된 이스라엘 백 성들처럼 다음 주일 창립 기념 감사 예배 때가지 우리 각자 자신과 가정과 학업/직장/사업 과 교회를 정결케 하도록 힘쓰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도 기억해야겠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죄들을 거룩하신 주님께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죄들을 깨닫게 될 때에 십자가의 보혈 의지하여 우리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자 는 도전입니다.

 

둘째로, 헌신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헌당식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 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 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헌당식을 축하했다는 말은 헌당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했는가?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 다:

 

  • 큰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드렸습니다(27절).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43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기 때문 입니다. 우리도 예배 때 큰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 이 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크게 즐거워하시기 때문이 되야 합니다.

 

  • 감사의 노래로 찬양을 드렸습니다(27절).

 

감사의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도우사 예루살렘 성 벽을 헌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봉헌식(헌당식)을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배 때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륻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찬양이 아닌 그저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 여러 악기로 찬양을 드렸습니다(27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 다. 시편 기자도 시편 150편3-5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 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 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우리 교회도 예배 때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지극히 높으시고 크신 주께 찬양을 드리십시다.

 

성경 시편 150편 3-5절 말씀에 관하여 “복음과 빛”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렇 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예배는 기쁨과 축제의 요소로 가득차 있습니다.   참된 예 배는 무거운 분위기로 드려지기 보다는 밝고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드려지는 것이 옳다. 왜 냐하면 기독교 예배는 부활하여 승리하신 주님을 경배하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을 위해 왕이 준비한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예배는 승전한 왕의 잔치나 왕이 태자를 정하는 잔치 자리처럼 기쁨이 가득찬 축제가 되어야 합니 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예배에서 축제적인 요소를 회복해야 합니다. 무거운 분위기와 슬픈 얼굴로 드리는 예배는 승리하신 주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인터넷). 예배는 구원받 은 성도들이 창조주와 구주께 드리는 감사의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축제적인 요소 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예배에는 축제적인 요소가 많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 리는 예배에서 이 요소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축제적인 요소가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까?  지난해부 터 우리는 교회 첫 번째 목적인 “주님을 모시는 교회: 예배-증인들”의 삶 초점을 맞추어 왔 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므로 불신자들에게 까지도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함을 전파하 고자 힘썼습니다(고전14:25).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고 있습니까? 과연 교회를 처음 나온 분들이나 오랜만에 왔던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 운데 계시다”하는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까? 다음 주일에 드려지는 예배가 예배당을 헌당 하는 예배가 아닐지라도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께 헌신하면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celebrate)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헌신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특한 순서로 헌당 예배들 드렸습니다.

 

느헤미야 12장31-42절까지 보면 예루살렘 성 봉헌식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 성들은 지도자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서 한 그룹은 에스라가 이끌고 또 다른 그룹은 느헤미야가 이끄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에스라가 이끌었던 그룹은 “우 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면서(31절) “샘문으로 말미암아 전진하여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길에서 동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37절) 느헤미야가 이끌었던 그룹은 “에브라임 문 위로 말미암아 옛 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 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쳤던 것임(39절). 그런 후 이 두 그룹은 하 나님의 전에서 만나(40절) 주님께 봉헌식 예배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왜 에스라와 느헤미 야는 이렇게 봉헌식 예배를 드렸습니까? 왜 그냥 예루살렘 성전 범위에서 만나서 레위인 들로 하여금 찬양과 제사를 주님께 드리게 한 후 다들 집으로 보내지 않고 성벽을 두 그룹 으로 나눠서 행진한 후 하나님의 전에서 만났습니까? 한 3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 다:

 

  • 첫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된 성벽과 문들을 직접 들러보면서 그 성 벽과 문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게 올바른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선한 손길로 인도하시사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예루살렘 성벽과 문들이 재건되었기에 그 성벽과 문들을 직접 돌아보면서 하나 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4장 3절 보면 원수 중에 한명이 도비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축하고 있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틈이 보이리라)고 하였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든든하게 잘 지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목격하면서 행진하고 있으니 이 얼마니 믿지 않는 주위 이방인들에게 간증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의 현실을 이방인들이 목격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벽 을 행진하므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낸 일의 성과를 목격하면서 다 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은 이 역사를 한 사람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이는 백성이 마음 들 여 역사”한 결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습니다(4:6).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일한 성벽 부분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했으며 그 성벽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의 성벽과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속했으면 또 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꼭 사용돼야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주위를 행진하므로 그들은 상징적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 우리 모두는 하나 님의 역사에 한 부분 쓰임 받은 것이기에 열심히 섬겼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모슨 것 을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에 주님께 받침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하나 님의 축복을 선포하고자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 당시에 건물 의 부분을 밝고 걷는 것은 자기 소유라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로 창세기 13장 17절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일어나 그 땅 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였습니다. 또 다른 예는 여호수가 1 장 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내가 모세에게 말한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 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으 로 예루살렘 성벽 주위를 행진한 것은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이 땅을 믿음으로 선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 었습니다.

 

교회 헌당식 예배는 사역의 시작인가 아니면 끝입니까? 너무 많은 때에 교회 헌 당식 예배가 사역의 시작이 아닌 끝을 표시하고 있다. 많은 교회 성도들이 건축을 하기 시 작하여 교회 헌당식을 드리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젠 전처럼 편안히 자리를 잡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밴스 해브너(Vance Havner)은 한 교회 헌당식 때 헌당식 예배에 대하여 자기의 인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 건 물이 이정표(milestone)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무거운 짐(millstone) 이였다’(해브너). 만일 우리가 앞(장래)에 비전을 잃어버리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기를 중단한다면 하나님이 이루신 뜻은 진정으로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의 삶에 짐이 되며 또한 우리를 깨뜨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 예배를 준비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꿈을 갖아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우고 헌당식 예배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꿈을 꾸십시다. 그러나 성전 건축을 하여 헌당식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성전 건축 및 헌당식 예배를 무거운 짐(millstone)으로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크신 하나님 안에서 더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자 하는 이정표(milestone)가 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 다 주님께 헌신해 야 합니다. 그 이유는 헌신된 자가 없는 교회 헌당식 예배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항거한 평양의 산정현교회, 그 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님, 그가 부임한 다음 해인 1937년 9월 5일에 250평 새 교회당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릴 때 그는 설교하면서 이 교회는 일본 우상을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절대로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시국은 교회당 안에 일본 국기를 달게 하였고 일본 귀신이 들 어 있는 가미다나를 벽에 걸라고 강요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 강단에 어떠한 간판도 달지 못하며 못 자국 하나도 낼 수 없다고 교회당의 절대 신성을 강조하였습 니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교회 헌당식이 거행 된지 얼마 후에 주목사는 경찰에 검거되 었습니다. 그때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일이 있어 이에 흥분한 평양신학교 학생 만 명이 평북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에 관련시켜 주기철 목사를 검거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석방된 주목사는 1940년 2월 첫 주일 평양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중 나온 교인들의 환영은 열광적이었고 그는 곧장 산정현교회로 들어가 입은 옷 그대로 강대에 엎드려 기도드렸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오랜만에 목사님 을 만나고저 교인들은 운집하여 교회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워졌습니다. 일본 경찰들 은 교회당을 두 겹, 세 겹으로 포위하고 그 일부는 교회당 안에까지 들어박혀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기도를 마치고 강대에 섰다. 흰 두루마기에 까만 머리 모습에 꼿꼿한 몸가 짐으로 똑바로 정립한 그는 강대의 탁종을 두세번 누르고 "예배드립시다"라고 선포하였습니 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의 찬송을 부르므로 예배를 시작하고 나서,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12절(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 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과, 로마서 8장 31-39절(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 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는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 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을 읽으신 후 “다섯 가지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 첫째, 사망의 권세를 이기에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라면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한들 그 무슨 삶이 되겠습니까. 오! 주님이시여! 이 목숨을 아꼈다가 주님을 욕되게 아니하도록 성 신이여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여 주시 옵소서.”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읍시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외에 다른 신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더 럽게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고 또 죽어서라도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 둘째,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견딜 수 있으나 오래 오래 끄는 장기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 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씩, 1년, 2년, 10년이나 계속되는 고난은 도저히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 대로 변하지 못한다고 하면 모르거니와 한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고통도 면하고 오히려 후한 상을 준다고 하였는데, 그런고로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 어떻게 오랜 고난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다만 주님께만 의지합니다.”

 

  • 셋째, 어머니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자식 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어머님께서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를 맞아 몸이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어머님 생각하여 불효자식이 눈물 뿌리며 기도를 여 러 번 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 어린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역 적으로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 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감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 것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주 님께서 맡기신 내 사랑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뒤에 두고 죽음의 길 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상 이리 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갑니다. 맡깁니다. 이 양들을 대목자장이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산정재 이 강단을 떠나서 주님 뒤를 따라가려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을 이기지마는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다가 철석같은 마음이 변절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배교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얽힌 인정이 나를 얽어매어서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백성 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 되어서는 그 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 한국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났도다. 우뚝 솟은 모란봉아, 통 곡하여라. 대동강아!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미천한 목숨 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인생은 초로와 같이 짧 고 의는 영원무궁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짐승만도 못합니다. 예수로 같이 죽고 예수로 같이 삽니다.”

 

  •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주 님,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 혹은 사형장에서 그 어디에서든지 내 목숨 끊어질 때 꼭 내 영혼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집은 나의 집,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영원한 고 향집이 됩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겨서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죄로 물든 내 영혼을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 존전에 부끄럼 없이 서게 하여 주시옵 소서, 오! 주님이시어,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 영혼, 내 영혼 주님 받아 주시옵소 서, 아멘.”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구구 절절에 불을 뿜는 설교를 힘차게 하면서 마지막에 는 그 자신이 감격에 넘쳐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마루바닥을 발로 퉁퉁 구르면서 찬송을 힘 차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내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만당의 예배자들은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찬송을 불렀다. 주목사의 가슴 속에 서 타오르고 있는 신앙의 불길은 산정현교회 온 교인들의 가슴속에 퍼져 더욱 불타게 만들 었습니다(인터넷).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들로 세움을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헌신된 예배자들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