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하는 자들”
[느헤미야 11장 1-2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자원봉사자”란 말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아십니까? 서구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자발적으로 병역을 지원하는 지원병을 가리켜 '자원봉사자'로 일컫게 되면서 부터 현대적 의미의 자원봉사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서서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주로 사회복지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활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면서 오늘날에는 사회복지 분야뿐만 아니라 교통, 환경, 범죄, 지역사회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의 활동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원봉사자들”이란 말은 “살기 좋은 지역사회 를 만들고자 기꺼이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원봉사에는 3가지 특 성이 있습니다(인터넷):
- 첫 번째 특성은 “자발성”입니다:"어찌 내가 하지 않으랴!"
자발성은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와 주체성에 의해 활동해 나가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웃의 불행이나 공동체의 위기 및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문제해결을 위하여 스스로 행 동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즉 "누군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상황에서 "어찌 내가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결단력입니다. 좋은 일은 누구나 생 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자발적으로 먼저 행동하는가' 입니다.
- 두 번째 특성은 “공공성”입니다: 내 집 앞만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자발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복지성 또는 공공성을 갖고 있지 못하 다면 그것은 자원봉사활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해서 바둑이나 낚시 등의 취미에 몰두하는 것을 자원봉사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청소를 하더라도 자기 집이나 친한 친구의 집 앞만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골목을 모두 청소하는 것이 공공성을 지닌 것입니다. 자원봉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사회적 활동입니 다. 이웃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이웃과 더불어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 책임감을 갖고 공동체 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마지막 세 번째 특성은 “무보수성”입니다: 대가는 무슨 대가?
자원봉사활동은 사회, 다른 사람, 또는 환경을 위해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자 연스러운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봉사는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간혹 교통비나 식사비와 같은 최소한의 실비 를 제공하는 곳도 있지만, 자원봉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을 기대하고 활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원봉사활동은 한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며 무엇보다도 자원봉사활 동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1장 2절을 보면 “자원하는 자”란 문구가 나옵니다. 예루살 렘 성벽과 문들이 다 재건 된 후 이젠 거기서 살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젠 예루살렘 성벽과 문들도 다 회복되었기에 중심도시인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살면서 인구 가 성장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곳에 살면서 예루살렘을 보호하며 지 켜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 원수들이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 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데서 살면 더욱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누군가가 이 예루살렘 도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 문 느헤미야 11장 1-2절 말씀 중심으로 “자원하는 자들”이란 제목 아래 누가 예루살렘에 머물기로 자원하였는지 그 두 그룹의 자원자들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에 머물기로 자원한 첫 번째 그룹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1장 1절 상 반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 수문 광장에서의 말씀의 부흥을 경험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또 하나의 헌신의 표현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집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는 것이었습니 다(패커). 이들의 결심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에 백 성의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였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었을 때에 경험한 일을 나눕니다. 저희 교회 웹사이트를 돕고 있 는 한 부부는 상계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저희 가정이 미국으로 들어올 즘에 교회 근처인 서 교동(홍대 근처)로 이사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부부가 신앙생활을 좀 더 헌신 하여 적극적으로 하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가 가까우니깐 새벽기도회 도 나아가 저와 우리 교회를 위하여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씀의 부흥을 경험하는 성도의 마음은 교회 중심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살아 온 한인들의 공동체 한 복판에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교회가 있어왔습니다. 이것은 제 1기의 한인사회에서 더욱 뚜렷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에서 건너 온 백 인 이민 집단들의 경우에도 그러하였 습니다.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이민 집단들은 대개 성공회를 비롯하여 개신교회들을 세워 살았으며 아일랜드나 이태리 사람들은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으며, 러시아와 희 랍인 그리고 동부유럽인들은 러시아 정 교회(또는 동방교회)를 그들의 삶의 중심기관으로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에서 건너 온 이민자들 가운데에서는 한인들만이 유 일하게 교회 중심적 공동체를 이루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한인의 미주이민은 미국인 목사 의 알선으로 시작된 데다 이민자 모집도 교회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처음부터 많았었습니다. 1903년과 1905년 사이에 하와이에 들어 온 7천 2백명 가운데 교인수가 40 퍼센트나 됩니다. 교회가 한인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한 민족의 강한 종교적 심성과 함게 조국이 일본 의 침략으로 독립을 상실하게 된 데 자극되어 무엇으로든지 독립에 이바지 하 겠다는 결의와 1세와 2세들에게 성경공부를 통하여 삶과 역사에 눈을 뜨게 하고 한글과 사 회생활을 갈쳐서 교육수준을 높여주어야겠다는 요청 때문입니다. 망국인으로서의 이국생활 은 자기 언어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더욱 짙게 하여 주었습니다. 중국계 집단은 전통적으 로 강한 가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미국에 와 살면서도 가문을 찾고, 혈통을 찾는 종친회를 중심삼아 활동하였고, 절을 많이 세웠으며, 일본인 사회는 어느 현에서 왔는가를 따지며 같 은 고향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신사를 세워 종교생활을 하였는데 한인들은 유독 교회를 중심 으로 사회생활을 펼치며 공동체의식을 키워가게 된 데에는 문화생활을 누리며 교회중심 이 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는 것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인터넷).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여 예루살렘 성전 중심 의 삶을 살겠다고 헌신한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닌 예루살렘을 위하여 이전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며 진정으로 하나님 을 높이는 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패커). 이것이 현실로 가능합니까? 과연 지리학적으로 교회에 가까운 거리로 자발적으로 이사 올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착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교 회 가까이 이사올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회를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성전에서 말씀 과 기도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며 섬긴다는 말입니다. 요즘 교회에 서 대한 중에 하나는 구역(셀) 모임을 교회에서 갖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성도들 끼리 자주 모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강한(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강한(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 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우리 몸의 세포들의 특성을 세 가지 꼽자면, 첫째는 전문성, 둘째는 다양성, 셋째는 통일성을 들 수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 전문성: 그 첫 번째로, 우리 몸이 얼마나 전문화된 장기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 눈은 1억 개가 넘는 원추세포와 7 백 만 개의 간상세포로 구성되어 아주 작 은 빛과 엷은 색깔도 구별해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카소의 추상화나 밀레의 만종 같은 그림을 감상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는 어떻습니까? 바깥의 이 안테나로 몇 Km떨어 진 곳의 귀뚜라미 소리도 잡아내며 전화를 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을 알아낼 수 있도 록 전문화 되어 있습니다. 1 mm 밖에 안되는 얇은 고막을 통해 한꺼번에 수많은 소리를 감지해 내고 우리 귀속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뼈들은,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1초에 300번이 나 진동을 해서 음을 구별해 냅니다.
- 다양성: 우리 몸은 기능과 형태에 있어 실로 다양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어 예로부터 인체를 일컬어 오장육부사지백체라고 말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획일 된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고, 다양함 속에서 멋진 조회를 이루어 내 시길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만물을 보십시오. 수천종의 곤충들, 그 중 에 풍뎅이만도 30만종이나 되며, 하늘에 나는 것 땅에 기는 것, 물속에 헤엄치는 이 모든 것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몸은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지만, 이 중 어느 하나도 가 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약하게 보이고, 별 쓸모없이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하면 요긴하게 쓰일 때가 많습니다. 경우, 나약한 몇 개의 신경세포가 마비됨으로 눈이 멀게 되 고 수족이 부패될 수 도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발바닥의 신경세포가 마비될 때, 발의 감각이 무뎌져, 온돌방이 뜨거운 줄 모르고 잠자다가 회상을 입어 균에 감염되어 발이 썩어 들어가 절단 할 수 밖 에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몸처럼 다양하 지만, 가치 없는 교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통일성: 셋째는 통일성의 원리로, 우리 몸의 온갖 세포들은 모두 다르지만, 그 들은 똑같은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어 어느 장기가 누구의 것인지 이 유전인자 암호를 확인 하면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DNA로,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의미합니다. 모든 세포의 핵에는 이런 염색체가 있고, 이것은 이러한 DNA로 구성되어 있듯이, 교회는 각기 마음의 중심에 예수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들의 집합체이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한 몸임을 입증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이 3가지 특성을 볼 때에 우리 교회가 강(건강)한 공동체로 자라나고 있 는지 아닌지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우리 교회는 전문성을 살리 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각자가 주어진 은사 또는 달란트대로 섬기고 있는가 입니다. (2) 둘째로, 우리 교회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 니다(예: 3 사역들). (3) 셋째로, 우리 교회는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 도 안에서 이미 하나 됨을 잘 지켜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특히 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 다. 그 과정에 있어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 또한 달란트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마음 것 또한 자발적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아가는 하나님의 역사에 다 동참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예루살렘에 머물기로 자원한 그룹은
지도자들 외에 남은 백 성의 십분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1장 1절 하 반절을 보십시오: “…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 예루살렘 성과 문들이 재건된 후 거기서 살기로 자원한 지도자들 외에 남은 백성의 십분의 일은 제비뽑아 거룩한 성 예루 살렘에 거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느헤미야 10장 37-38절에서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기로 헌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물산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헌신했던 것처럼 느헤미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분의 일로 하여금 제비뽑아 다른 성읍에서 예루살 렘 성으로 옮기도록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7장4절을 보면 성경은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 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성에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이사하기를 꺼려했었습니다. 누가 불편하고 상황이 안 좋은 집이나 동네에서 살고자 하겠 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과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한 10% 분들은 교회 근처로 이사 오십시오 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기서 저는 한 2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 하나는, 그저 단순히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 있기를 원하시는지 그 원하시는 곳에 있다는 그 자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면 아니 됩니다. 비록 우리가 인상적인 사역을 수행 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역인 것입니 다. 지도자들과 남은 백성의 십분의 일인 모든 남, 녀, 어린아이들은 믿음으로 예루살렘으 로 이주해서 그 도시에서 살기로 결심 및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나라와 미래 세대를 섬겼습 니다.
- 또 한 가지는 공동체 가운데서 지도자들과 10% 성도님들이 전 교인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가 ‘지도력’의 전문가인 존 맥스웰 목사님이 그의 책에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교인 20%가 80%를 이끈다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법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첫째는, 파레토 법칙(Pareto Principle)입니다. 80/20법식, 즉 파레토(Pareto) 의 원리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파레토는 때때로 양적으로 작은 항목들의 가치가 다른 큰 항목들의 가치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 상을 분석하여 간단한 도식을 만들어 냈는데, 전체 중 20퍼센트만의 투입으로 80퍼센트의 성과가 산출되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20%의 인구가 80%의 돈을 가지고 있다, 20%의 핵심인력이 80%의 일을 한다, 20%의 고객이 80%의 매출을 올려준다, 20%의 핵심 제품이 80%의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등등의 사실입니다(인터넷).
- 둘째 법칙은6.2 법칙입니다. 어느 생태학자가 개미의 일하는 모습을 유심 히 관찰하였습니다. 그런데 개미가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계층”이 20%정도,”중간”이 60%정도, 그리고”게으름을 피우는 계층”이 20% 정도 되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계층 20%도 또 그 중 에서”아주 열 심히”가 20%,”중간 열심히”가 60%,”덜 열심히”가 20%가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이 현 상을 2.6.2 법칙이라고 이름 붙여 인간 세상에도 이 법칙은 적용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2가지 법칙과 오늘 본문 말씀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10% 백 성들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1/10인 소수의 무리가 나머 지 90% 무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십분의 일 소수의 무리”냐는 것입니다. 한 3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분의 일 소수의 무리”를 생각해 보 았습니다:
- 첫째로, 순종하는 사람들 또는 자발적인 사람들: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분의 일은 물론 “제비뽑아”(11:1) 이주 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옮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박윤선).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은 순종하는 사람들이요 또는 자발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나머지 90%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면 이끌 수 있는 지도자 형이라고 생각 합니다.
- 둘째로, 헌신된 사람들:
요즘처럼 “헌신된 사람들” 찾기가 교회에서조차 힘듭니다. 만일 헌신을 기피하는 자들이 교회의 10%인 지도자들이 된다면 나머지 90% 교인들을 제대로 이끌 수가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분의 일인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소수의 무리들은 쉽 지 않는 헌신을 한 사람들이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순종하든 자발 적이든 이주한다는 그 자체는 쉽지 않는 헌신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위험 지대로 이사하는 것인데 아내와 자녀들을 다 데리고 이방인들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예루살렘 성으로 이사한다는 것 이것은 보통 헌신이 아닙니다. 헌신에는 반드시 치러야 할 값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택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기쁨과 승리에 찬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값비싼 헌신의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 마지막 셋째로,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
만일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분의 일인 소수의 무리들이 예루살 렘으로 이주하면서 사명감이 없었다면 과연 그들이 무턱대로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을까 생각 해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시)인 예루살렘에 지도자들과 함께 살면서 인구 가 늘어나며 그 도시를 하나님께 받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사명감에 투철 한 사람들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투철한 사명감이 없이는 그들은 평안하고 위험부담 이 적은 다른 성읍들에서 위험부담이 너무나 큰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사명감이 투철한 이 십분의 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Risk-takers”(위험 을 무릅쓰는 사람들)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자기 사명을 귀한 줄 알고 그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도 “네가 작은 일에 충 성했으니 큰일도 맡기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직분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지 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지름길입니다(인터넷).
어제 지도자 성경공부 때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목자로서 왕의 기능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 의와 사랑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고(시편 45, 72) 또 하나는 “전쟁에 나가서 백성들의 원수를 패배시키고 전멸하는 것이었습니다(대상28:3; 시18:34; 78:72). 그러나 가장 이상 적인 목자로서의 왕이었던 다윗 이후에는 어떤 왕도 이러한 이상형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처럼(겔34:12-15, 23-24) 다윗의 왕조에 신적인 목자를 하나 님께서 보내주셨는데 그 약속한 새로운 목자는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사이 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할 때 구약 이스라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 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왕이 백성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은 예는 한 번도 없었 는데 예수님은 양 된 자기 백성(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죽으시겠다고 계시하신 것입니 다. 그것도 그가 힘이 없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에 따라 자발적으로 죽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 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구원의 은총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받 쳐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2),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사역에 겸손히 동참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