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느헤미야 9장 32-38절 말씀 묵상]

 

 

바다가재가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느낀다고 생각하십니까? 동물권리 운동단체들은 수년 동안 바다가재가 조리 때 고통을 느낀다며 끓는 물에 바다가재를 담그는 것은 고문에 해당한다고 주장해 왔기에 노르웨이 정부지원을 받아 오슬로 대학의 과학자 팀 에 연구에 착수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한 과학자는 보고서를 보면 바다가재는 끓는 물 에서 팔딱거려도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며 바다가재와 게, 벌레, 달팽이 등 대부분의 무척 추 동물은 고통을 느낄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 사람이 고 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처음엔 좋겠다고 생각할 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 중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문등병자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코가 떨어져 나 아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얻어야할 교훈은 바로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통의 유익 중에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느헤미야 9장 32-38절 말씀 중심으로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라는 제목 아래 하나님께 한 2가지를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라는 기도제 목을 교훈으로 받길 원합니다.

 

첫째로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기도제목은

우리의 악행을 “이제 작 게 여기시지 마옵소서”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우리의 악행을 작게 여기는 죄악된 본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 면, 우리가 범한 죄가 어느 정도 큰 범죄인지를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았지만(1절) 그 아들들이 아버지인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3절).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모여 사무엘에게 나와서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5절) 요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과연 큰 죄입니까 아니면 작은 죄입니까?  이것은 큰 죄입니다.  사무엘 상 12장 17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일 곧 여 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왜 왕을 구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악 이였습니까?   그 이유를 사무엘상 8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 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달라고 말한 이스라엘 백성들(삼상10:19), 그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열방(이방인들)처럼 왕을 세워달 라고 구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범죄였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보이 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 가운데 왕으로 또는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보이는 사람(들)이나 혹은 보이는 것을 우리의 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고 그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보다 우리 마음에 우리 자신을 주로 삼고 우리 뜻대로 살아가는 큰 죄를 범하면서도 그 큰 죄를 너무나 작게(가벼운) 죄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죄로 여기지도 않을 때 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반복적으로 범하는 죄를 보시면서 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환난을 보시면 견디지 못하시는 마음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긍휼이 크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을 길이 참으시다가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당신 이 공의를 나타내시 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3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 이니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다가 어 느 한계에 도달아서는 결국 사랑의 매를 드십니다.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요나서 1장2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 니느 웨 백성들의 악독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한계가 도달했기에 참고 계시다가 우선 요나 선 지자를 보내시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 성들은 그들의 악행을 회개하라고 보낸 여러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모독하게 행하였습니다 (26절).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악행을 작게 여겼기에 계속 고범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을 더 이상 작게 여기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첫 번째 악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 죄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34절을 보십시오: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열 조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의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종들인 “제사장들”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불순 종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할 징조입니다. 호세아 4장4-8절을 보십시오: “…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  네가(제사장이) 지식을 버렸으 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 여 욕이 되게 하리라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 도다.”  이것이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성도들이 제사장인 목사와 다투는 자 가 되고 있고 목사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목사가 많 아지면 많아질수록 하나님께 더욱 범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양떼들인 성도들에게 말씀 을 먹이기보다 죄를 범하도록 먹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면 목회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의 범죄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여 욕이 되게 하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악행은 바로 주님을 섬기지 아니한 죄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3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 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 한고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큰 복”을 이스라엘 백 성들은 오히려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또 짚고 넘어 가야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큰 복”(great blessing/goodness) 을 받았다는 것은 그 만큼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큰 책임’(greater responsibilities)이 있다 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호세아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곡식과 새 포도주, 기름, 금과 은을 하나님을 위하여 쓰지 않고 우상인 바알을 위하여 쓰는 죄와 비슷 합니다. 호세아 2장 8절을 보십시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희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저가 알지 못하도 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며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죄를 작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과 그를 섬기지 않는 것은 ‘큰 죄’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를 드려야 합니다: ‘오 주여, 나의 큰 죄를 이젠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둘째로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기도제목은

우리의 환난을 “이제 작 게 여기시지 마옵소서”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32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열조와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바 환난을 이 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큰 죄를 작게 보는 경향이 있음과 동시에 그 큰 죄로 말미암은 사랑의 징계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환난은 크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거듭 환난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장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 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 그 대적의 손에 버려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  왜 우리 는 우리가 범한 큰 죄는 작게 보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크게 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고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징계로 주시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중심’인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범한 죄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에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이 지 우리가 아픈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이 사랑의 매로 때리시는 것이라 우리가 실지로 아프기 때문에 더 크게 보입니다. 그 한 예로, 자식이 부모님을 아 프게 할 때에 자식이 자기가 잘못한 것을 크게 느끼기보다 부모님이 자식을 때렸을 때 그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32-38절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난을 당하였습니 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더 이상 보고 참으실 수 없으셔서 사랑하 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심한 곤난’, 혹은 ‘큰 곤난’을 당하였습니다(37절).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입니까?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주님을 섬기므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등 뒤로 하고 ‘큰 악행’을 그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 성들, 결국 그들에게 임한 것은 ‘큰 곤난’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 와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남용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젠 그 축복을 주님께서 빼어가시사 누리지 못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상전으로서 이방인 거민들을 마음대로 부리기보다(24절) 이젠 그들의 종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 들은 그들의 죄로 말마임아 이방인 나라에 종이 되어 종살이를 하면서 큰 곤난을 겪게 되었 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열왕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저희가 우리의 몸과 육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난이 심하 오며.”

 

왜 하나님은 사랑의 징계로 우리에게 ‘큰(심한) 곤난’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 는 하나님께서는 ‘큰 곤난’을 통하여 우리를 작게(겸손케)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 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셨지만 우리가 그 큰 축복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 기보다 큰 모독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곤난을 통하여 그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정금과 같은 믿음과 인격을 소유한 자로 우리는 단련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하 나님은 우리는 단련시키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케 하시므로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 하나님께서는 큰 고난을 통하여 자신만만하던 교 만한 우리를 낮추 시사 엎드려 그에게 부르짖게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맞습니 다. 이사야26장 5절을 보십시오: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 은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앙모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줄 아십니다. 이사야 26장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 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큰 복과 그 큰 복을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하실 뿐만 아니 라 우리로 하여금 그를 신실하게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가 부른 땅에서 하나님 이 주신 큰 복을 자기만 배부르게 먹어 살찌고 주님의 주신 복을 낭비한 이스라엘 백성들 (25절)로 하여금 그 큰 복을 다 빼앗아 가시므로 이젠 더 이상 상전이 아닌 종으로서 이방 열왕(37절)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주님을 섬기도록 단련시키셨습니다. 비록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주님의 주신 큰 복을 누리면서도 주님을 섬기지 아니했지만 환난을 당하여 종의 삶을 살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금 주님을 섬기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이방 열왕을 섬기는 가운데서라도 주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자 유를 누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환난”(모든 고난)을 작게 여 기시는 하나님이신가 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보시고 견디 지 못하시기에 속히 오셔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환난을 크게 여기셔서 구원하러 달려오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이사야 64장9절 상반 절 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아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함께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의 환난을 크게 여기셔서 구원하러 달려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셨습 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환난을 작게 여기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지옥의 고난을 너무나 크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작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님의 지옥의 그 큰 고난을 작게 보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신 독생 자 예수님의 ‘악행’을 크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셨습니까? 아닙 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큰 죄악을 담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시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마땅히 여기셨 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큰 죄를 용서해 주시사 우리로 하여 금 죄악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와 고통을 작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오늘까지 살아 가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고난을 통한 단련, 단련을 통한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