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 크신 하나님

 

 

 

[느헤미야 9장 27-31절 말씀 묵상]

 

 

우울증이란 무엇입니까? 누군가 우울증을 ‘자살에 이르는 샛길 없는 통로’라고 말 했습니다. 한번 그 길에 들어서 면 외부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입 니다.   우울중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울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근원적인 출 발은 ‘나는 사랑 받지 못한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두 가지 요인에서 시작된다고 합니 다.   이에 대해 기독상담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란 사 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세우신 목표를 발견한다면 마음의 병은 치료될 수 있 다고 말합니다(인터넷). 신앙인들의 우울증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울증을 숨기지 말고 적극적인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 교회 내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지지그룹이 있다면 심각한 질병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언제든지 아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체계를 갖춰야 하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아픔 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인터넷).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 니까? 교회 내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지지그룹이나 상담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 – 아 픔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함 께 체휼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구절로 말한다면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 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롬12:15).

 

한 600년 전에 영국에서 살았던 줄리안(Julian)은 ‘세 가지 상처’를 받기 원하여 하 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1) 첫째는 회개의 상처입니다. 줄리안은 “오 하나님! 제가 회 개의 아픔으로 상처를 받게 하옵소서.   제가 죄를 범한 것을 슬퍼하게 하시고, 그 슬픔 속 에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입니다. 줄리안은 “하나님! 하나님을 저에게 주소서. 하나님 한 분으로 저는 족하나이다. 하나님 보다 못한 것을 추구한다면 저는 언제나 목마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하나님이 모 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오, 하나님! 불치의 향수병 으로 저에게 상처를 주소서. 이 세상이 저의 고향이 아니오니, 어찌 이곳에 정착하리이까? 어찌 하늘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3) 셋째는 긍휼의 상처입니다. 줄리안은 예수님처럼 세상을 불쌍히 여기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토저 목사님은 오늘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물질주의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통교리를 믿지만, 긍휼이 무엇인지를 모르 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긍휼의 상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상처를 결코 치료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그들의 상처에 동참하고 싶다”(토저).

 

저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7-31절 말씀 중심으로 “긍휼이 크신 하나님”이란 제목을 걸고 과연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한 3가 지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이 묵상을 통하 여 저와 여러분이 긍휼의 상처를 입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째로, 긍휼이 크신 하나님은 우리를 경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9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시대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즐기되 주님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26절) “배불리 먹어 살찌고” 있었을 때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계하셨습니다(29절). 누가복 음 15장에 나와 있는 ‘탕자의 비유’의 근거한 찬송가 315장이 생각납니다.  특히 3절 가사 와 후렴이 생각납니다: “돌아와 돌아와 환난 있는 곳과 죄를 범한 데와 미혹 받는데서 (후 렴) “집을 나간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을 어떻게 경고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30절을 보십시오: “…또 선지자로 말 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 “.  성령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 엘 백성들을 경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신(성령님)(20절)을 모세 외에 70인 장로들 에게 주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한 율례”(13절)를 가르쳐 주게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 들은 그 “선한 율례”를 등 뒤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큰 복을 낭비하면서 죄를 범하였습니 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같은 성령 하나님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 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은 교만히 행했습 니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듣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목을 굳게 하면서 주님께 등까지 돌렸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9-30절을 보십시오: “…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 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 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 하였나이다 …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우리는 시편 기자 다윗처럼 하나님의 경계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 시편 19편 11 절을 보십시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다윗은 주님의 율법으로 경계를 받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 ‘큰 상’이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여기 서 그가 말하는 ‘큰 상’(“great reward”)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영혼이 소성되는 것이요(7절), 그가 더 지혜롭게 되는 것이며(7절), 그의 마음에 기쁨이 더한 것입니다(8절). 또한 다윗은 그의 영안이 밝게 되어서(8절) 자기 허물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그의 숨은 허물 에서 벗어나길 간구하게 되었습니다(12절). 즉, 다윗은 “고범죄”(willful sins)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간구하였습니다(13절). 한 예화가 있습니다. 센트럴 아메리카호가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 가 운데서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바닷물이 조금씩 스며들었습니다. 그때 구조선 한 척이 다가와 외쳤습니다.’승객들이 위험하다. 승객들을 빨리 구조선에 옮겨 태워라.’ 아메리카호의 선장은 별로 걱정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바닥에 구멍이 뚫린 것은 사실입니 다. 그러나 내일 아침까지는 견딜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구조선의 선원들이 거듭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승객을 모 두 갑판 위로 나오게 하라.’ 상황이 급하다 그러나 선장은 여전히 태연했다. 지금은 어두 운 밤이다. 배를 옮겨 타는 과정에서 익사자가 나올 수도 있다.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리 자. 이튿날 아침 센트럴 아메리카 호는 흔적도 없이 바닷물에 가라앉았습니다. 선장의 무 사안일이 빚은 참사였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간단 합니다. ‘너는 지금 너무 젊다. 천천히 믿어라”(국민일보). 우리는 마치 이 이야기에 나오는 구조선의 선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거듭 경고의 메시지를 전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6장 2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는 ‘천천히 믿으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 어가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 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긍휼이 크신 하나님은 환난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7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 여기서 “그 대적의 손에 붙 이”셨다는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경고를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 의 대적인 이웃 이방인 손(30절)에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의 지배를 받게 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나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고를(환난을) 당케 하셨습니다(27, 28, 30절). 지금 말로 하면 신자들을 불신자들 손에 붙이시가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신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솔로몬 왕의 후 시대에 가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북쪽 이스라엘은 나중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그 후에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 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고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복으로 주셨지만 그 복을 잘못 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징계는 그 땅에서 쫓겨나 이방인 나라로 잡혀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이방인들처럼 사는 것을 즐겼으니 내가 너희로 하여금 이방인들과 함께 살도록 해주겠다’(위어스비).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입니까? 주님이 주신 큰 복이 교만하여 불순종하였던 이스라 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큰 저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참고: 수24:20).   가나안 땅이란 축복 을 겸손히 누리지 못했던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방인의 삶대로 이젠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들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대적인 이방인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28절). 이것은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주신 복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히 사용하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다 빼앗기고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대적에 게 (불신자들에게) 잠시 버려두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를 싫어한바 되어 불신자들에게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성실함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한 빛은 더 밝 게 비춰졌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주님께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들에게 큰 복을 주셨지만 그들이 주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축복에만 익숙해져 있지 하나님의 신실한 징계에는 익숙해져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 이지 않고 슬퍼 보이”기 때문입니다(히12:11).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 심이니라 하였으니”(6절). 우리를 사랑하는 참 아들로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7-8절)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10절) 우리를 징계하시므로 말미암아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며(10 절) 또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11절). 우리는 시편 기차처럼 하나님의 신 실한 징계를 고백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71절과 75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 이다”(75절).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에게 많은 특권을 주기를 기뻐하시지만 우리 마음대로 그 특권을 사용하 여 죄를 범하는 특권은 절대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실 수밖에 없으십니 다. 우리는 그 징계를 경히 여기면 아니 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긍휼이 크신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 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님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였던 목을 굳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29절), 주님의 율 법을 등 뒤에 두고 주님께로 돌아오라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해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26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 사 이스라엘의 대적의 손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27절).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히 브리어 단어의 원래 Arabic 의미는 “sound as thunder”(우레 같은 소리)란 뜻입니다. 그 뿌리는 큰 곤란 중에서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란 중에 서 함께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원을 간구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 서는 하늘에서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 적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27절).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 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28절).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대적의 손에 버려 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하셨습니다(28절). 그 때에 이스라엘 백 성들은 “돌이켜서 주(님)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또) 건져 내”셨습니다(28절). 그리고 “다시” 주님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습 니다(29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28절) 교만히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를 행하 였습니다. 이것은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의 범죄 - 하나님의 징계 -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간구) -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 우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

 

우리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8-30절에서 두 단어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 두 단어는 바로 “다시”라는 단어(28, 29절)와 “여러”라는 단어(28, 30절)입니다. 죄를 범하여 환난을 당하게 하셨던 주님, 부르짖으매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27-28 절) 우리는 또 “다시” 죄를 반복적으로 범할 수 밖에 없는 심히 교만하고 목이 굳은 하나님 의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그들을 구원해(건 져내) 주셨습니다(28절).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용서”해 주셨습니다(30 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러 해 동안 참으시는 하나님(long-suffering God)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또 다시 죄를 범하는 그들을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구 원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므로 그들 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7, 28, 31절). 그러시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 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던 것입니다(31절).

 

긍휼이 크신 우리 하나님은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사사기 10장 16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마음 에 근심하시는 하나님, 왜 근심하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그의 자녀들인 우리의 "곤고" 때 문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이 격고 있는 고통과 고난을 보시고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곤고를 보시면서 마음에 근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곤고로 말미암아 더 이상 참고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반복적으로 짖는 죄를 보시면서도 참고 또 참고 견디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죄를 보시면서도 참고 견디시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우 리)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롬2:4).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게 하는데 마음에 근심하지 않 으셨습니다. 그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곤고”를 보시면서도 마음에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 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가야할 지옥의 “곤고”(Misery of Hell)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셨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 스도를 사흘 동안 “He descended into hell”(사도신경 –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 운데서”)하게 하시므로 오히려 우리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지옥의 “곤고”를 겪게 하셨습니 다. 이 긍휼의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경고, 환난, 건짐을 통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오늘까지 살아온,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긍휼이 크신 하나님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