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하시는 하나님
[느헤미야 9장 8-21절 말씀 묵상]
여러분 “길치”라는 말 아십니까? '박치'는 음악과 관련하여 박자 감각이 없어서 박자를 못 맞추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몸치'는 춤을 잘 못 추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데 ‘길치’는 길눈이 어두운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눈썰미가 없어서 가본 적이 있는 길도 잘 찾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길치’들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내비 게이션”입니다. 사상 최악의 경기불황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초보운전자와 이른바 ‘길치’들에게는 정확하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 도록 안내해 안전운전 도우미로 각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차 안 내비게이션이 달 려 나오기도 하지만 휴대폰으로도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내비게이션 서비스도 있 다고 합니다(인터넷).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 람들이 “소경”을 인생의 내비게이션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15장 14 절 말씀처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빛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 따라 그분의 걸어가신 길을 믿음으로 신실하게 걸으므로 우 리의 목적지인 천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5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 “의탁(YIELD): 의탁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망과 야망과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의탁은 하나님의 방법만을 원하 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의탁하면서 기도 했습니다. "나를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이사야도 하나님을 의탁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아마샤에 대한 성경을 보면 "저는 자기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자라”라고 하였습니다(대하 17:16).
- 고백(CONFESS):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은 밀한 죄를 자 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라는 시편기 자의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시 139:23-24). 또한 우리는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 하고 그의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행 1:8).
- 기도(PRAY):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의 인도를 구하며 규칙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최대의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합니다(골 1:9; 4:12).
- 연구(STUDY):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통해 말씀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말씀을 천천히 읽으면서 묵상 하십시오. 기대감을 가지고 읽으십시오(딤후 2:15).
- 기다림(WAI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기다리시기 바랍니 다(시 62:6).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는데 응답이 없다면 당신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정말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당신은 조 급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 28장 16절에는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내십 니다. 다음과 같은 방법 중에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복합적인 방법을 사용하 시기도 하십니다(인터넷).
저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8-21절 말씀 중심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란 제 목 아래 한 3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떠한 자들을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가?, (2)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그리고 (3)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 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어떠한 자들을 인도하고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인도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8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 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 사오나.” 예를 들어, 한 장님 아들이 자기 아빠의 팔뚝을 붙자고 시냇가를 징검다리를 밝 아가면서 건넌 후 ‘아빠가 도와줘서 시냇가를 무사히 건넌 것이 아니라 저 징검다리 돌멩이 가 나를 도와서 내가 건넜다’고 말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이 아빠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 니까? 계속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들을 버리고 ‘그럼 니 멋대로 해바라’하면서 더 이상 장님 아들을 인도 안 해주고 떠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처음으로 범한 큰 범죄를 지적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의 죄 를 범한 것입니다. 그 송아지를 가리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해 나오게 한 ‘하나님’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32장에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거길 보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성경은 이 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지도자인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방자하게 놓아두었습니다(출 32:25).
성경 출애굽기 32장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군중을 지배(control)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하지 못하므로 말미암 아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멋대로 방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 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성경 출애굽기 32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 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부패하였다는 말은 첫째로, 하나님의 명한 길을 속히 떠나는 것(출32:8), 둘째로, 목이 곧음(출32:9), 그리고 셋째로, 악 하다는 말입니다(출32:22). 부패한 마음에서는 오로지 부패한 행동 밖에 나올 수 없습니 다. 마음과 양심이 부패하여져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디도서 1장 15-16절을 보십시오: “…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 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우리는 부패하여 방자해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릅니까? 별 다를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입술은 하나님을 닮았는지 모르지만 행동으로는 하나 님을 부인하며 살아갈 때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찬양하며 시인하는 것처럼 하 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서로에게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는 자꾸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을 망각하여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과거의 하나님의 인도하셨던 역사를 속히 잊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과 역경, 문제들을 대처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 고 걱정,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도의 확신이 없는 우리 그리 스도인들을 인도해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은 잠언 3장5-6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 고 게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 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범사에 인정하지 못하는(하기를 거부하는) 우리들,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 지”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다고 하나님을 모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 리를 신실하게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와 큰 긍휼입니까?
둘째로,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9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 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 이미 우리가 저번 주에 생각한바 “긍휼”이란 영 어 단어로 “compassion”이며 라틴 어로는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 두 단어를 합치며 ‘함께 고통 받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긍휼이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합니다(나우웬). 근데 그 “긍휼”이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가 참 놀랍습니다. 히브리어로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웨(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 다. 자궁의 특징(지혜)은 “모든 신체 조직이 이물질을 거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자 궁은 이물질에 해당하는 수정란(나팔관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된 란)을 거부 반응 없 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후에 만들어진 태반 혈관이 자궁 내막 속으로 파고드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태반 혈관의 침투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자궁 내 혈관과의 소통을 이 루게해 영양을 공급하고 태반을 자라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태반 혈관의 침투를 무한정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태반 혈관이 어느 정도 파고든 다음에는 더 이상의 침투를 억제해 태반 혈관 이 모체 전신으로 도는 혈관과 소통하 는 것을 막습니다. 또 다른 특징 하나, 모든 세포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마 련인데, 자궁 내막은 호르몬을 분비해 열 달 동안이나 세포의 자연사를 막아줍니다. 그밖에 도 자궁은 임신 초기 견고하고 두꺼운 모습을 보이나 임신 후기에 는 얇고 부드럽게 돼 산 모의 배 벽에서 태아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인터넷). 하나님의 긍휼, 그 의 지혜는 마치 자궁이 “이물질”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는 우리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십니다. 또한 마치 자궁이 태반 혈관의 침투를 받아들이므로 태반을 자라나게 하도록 영양을 공급하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 인들의 ‘죄침투’까지 용납하시므로, 즉 죄를 대신 걸머지시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 아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이젠 더 이상 ‘죄 침투’를 막으시사 온 몸과 영혼을 더럽히지 못하게 ‘죄의 소통’을 막으십니다. 더 나아가서 마치 자궁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동안 세의 자연사를 자궁내막이 막아 주고 또 한 임신 후기에는 산모의 배 벽에서 태아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고자 자궁이 얇고 부드럽 게 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동력있고 주님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도 록 신앙생활을 하게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긍휼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 다. 우리가 그분을 수 없이 배반하고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품안에 보호하시 사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광야에 홀로 버려두시지 아 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마치 태아가 산모의 자궁을 떠나서는 죽는 것처럼 이 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홀로 버려두시면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대로 버 리지 않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19절에 나오 는 문구 “연하여 긍휼을 베푸”신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문구를 다시 번역한다면 ‘많은 긍휼’을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즉, 한두 번이 아니라 수 없이 긍휼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기 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계십니까?
한 3가 지로 생각해 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행할 길을 비춰주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9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 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한 이 주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밤이 되면 저의 셋째 딸인 예은이가 저희 방에 들어와서 저랑 놀다 가 자기 방으로 가서 잠이 들곤 합니다. 아빠랑 “Bible”(성경책)하면서 침대에서 쓰러지는 게임도 하고 하는데 그 날 밤도 예은이가 놀다가 자기 방으로 가길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 어 이젠 ‘코지’(잠을 자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등불을 끄고 제가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 러니깐 예은이가 아빠가 잔다고 불을 끄고 누우니깐 할 수 없이 자기 방으로 가려고 문 쪽 으로 걸어가는 데 갑자기 “쿵”하더니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빠가 불을 꺼서 앞 에 안보여 똑바로 문으로 향하여 걸어가지 못해서 옆에 옷장 문 모서리에 부딪힌 것입니다. 속으로 그 생각하면서 좀 여러 번 웃었습니다. ㅎㅎㅎ 우리도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없으 면 똑바로 걷지 못하고 삐뚤어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삐뚤어 걷는다는 말은 에 베소서 5장8절 말씀처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비춰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 과 의로움과 진실함”(엡5:9)을 맺지 못합니다. 결국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열매 없는 어두움 의 일에 참예하게 된다는 말입니다(엡5:11).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없는 어두 움의 일에 참예하고 있습니까? 어두운 세상에서 살면서 빛의 자녀로서 어두움의 일에 들 춰내어 책망하는 빛 된 삶을 살아야 하건만 어두움에 빛을 잃어가면서 희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시편기자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 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길에 빛이 되시는 말씀 따라 인도함을 받을 때에 우리는 약속의 땅 천성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0절을 보십시오: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 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 사.” 이 구절의 배경인 민수기 11장 17, 25절을 보면 모세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 이 모든 백성을 질수 없나이다”(14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합니다. 그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셔서 이스라엘 백성 의 장로 70인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에게 임한 신을 70인 장로들에게도 임 하게 하셔서 모세의 짐을 덜어 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신”을 가리켜 오늘 본 문 20절에서는 “선한 신”(good Spirit), 곧 “선한 성령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로 한다면 담임 목회자가 60만 명 성도들을 혼자 목양하는데 책임이 무거워 감당 못하여 탈진상태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장로 70인을 세우게 하셔서 그들에게도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셔서 백성의 짐을 지게 하므로 함께 사역하게 하시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들은 “선한 신(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선한 율례”입니다(9:13). 즉, 모세와 70인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하나님의 선한 율법(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가르치므로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지혜를 주고자 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고백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열조인 출애굽 시대 때 이스 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 숭배의 죄를 고백하 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성령님을 모세 외에 70인 장로들에게 임하게 하시사 온 이스 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가르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 금 어느 상황에서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 충만한 학 사 에스라를 통하여 수문광장에서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에스라를 통하여 모 세의 율법을 약 6시간동안 7일이나 서서 들으면서 그 낭독되는 율법을 깨닫게 되므로 울며 (9:8-9), 또한 말씀 순종하므로 크게 즐거워하는 가운데(9:17)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교 만하여 우상숭배를 한 자기들의 열조를 긍휼이 여기시사 말씀과 성령님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이나 자기들에 게나 세우신 성령 충만한 지도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 주시므 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 로 바른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또한 주님으로 영접한 믿는 자들에게 성 령님을 보내 주셨는가?’란 질문을 답해야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그 대답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 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저자인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므로 우리의 행할 길을 가르쳐 보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32편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 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령님의 말씀 가르 치심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의 교만이요, 목이 굳음입니다. 마 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기를 거부하는 교 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세상의 인도함을 좇습니다. 내재하시는 선한 신이신 성령님의 음성보다 사탄의 음성에 더욱더 귀를 기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 호세아 10장12절을 보십시오: “… 지금은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 자기 자신을 의뢰함으로(호10:13) 말미암아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맺었던 호세아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묵은 땅인 강퍅한 마음을 기경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찾으므로 성령님의 말씀 가르치심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 자를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또한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고 계십니다: “또 새 영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7:26-27).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굳은 마음, 강퍅한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 새 마음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그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시사 하나님의 선한 계명을 행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1절을 보십시오: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을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되 부족 함이 없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도 해어지지 않고 발도 부릍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 시편 23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광야에서 주님을 선한 목자로 모시고 약속의 땅인 천 성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성도들이 부 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민수기11장 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탐욕을 품으므로 하나님 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로 족하지 못하고 고기를 울면서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광야에서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신8:3)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말씀 외에 이것저것 자꾸만 하나님께 달라고 불만족의 기 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러면 아니 됩니다. 오직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 따 라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공동체는 우리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말미 암아 범사에 감사하는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빌4:11). 오직 하늘의 양식인 예수님 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겸손히 이 천성 길을 신 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어느 대뇌생리학자가 쥐를 2개 군으로 나누어 실험하였습니다. 한쪽은 충분한 식 량과 물을 제공하고 자고 싶을 때 마음껏 수면을 취하도록 했다. 다른 한쪽은 식량과 물을 찾아가려면, 미로를 거치고 장해물을 거쳐야 하며 또한 전류의 쇼크 등의 난관을 통과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 양육한 후에, 그 뇌를 조사해 보니 놀랄 만큼의 차이가 있 었음을 발견했습니다. 편하게 자라난 쥐의 뇌는 뇌세포가 결락했거나 신경세포의 나뭇가지 같이 보이는 돌기가 감소하여 마치 유아로 되돌아 간 것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악조 건 하에서 자란 쥐는 뇌세포의 결락도 없었으며 신경세포의 돌기도 왕성 하게 발달해 있었 습니다. 미로학습, 운동, 고생 등이 뇌를 활성화하여 생생하게 만든 것이 현미경을 통해서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인터넷). 인생은 마치 미로학습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 금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러 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혼자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미로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사 우리는 혼인 잔치가 열리는 약속의 땅 천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서 거하시면서 그 말씀으로 가르치시사 인생의 미로에서 목적지인 천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 니다.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사 아무 부족함이 없이 우리는 영원한 세상,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향하여 오늘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푸른 초창과 쉴 만한 물가로 뿐만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