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시는 하나님

 

 

 

[느헤미야 9장 15b-17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유진 피터슨의 "다 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책을 읽으면서 쓴 말씀묵상 “인간관계”가 생각납니다.   저 는 그 글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 자기 아들 암논을 죽인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을 멀리하는 모습에 깨달음을 나누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기에 그 를 자신의 성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한 후에도 그를 만나려 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찾아오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압살롬을 멀리했습니다. 용납 받기를 원했던 아들 압살롬, 인격적인 용서를 원했던 압살롬, 아버지의 용서의 포용을 원했것만 다윗은 그를 진 정으로 용납하기를 거부했고 비인격적으로 용서했으며 그를 포용하기보다 거절했습니다. 이 말씀묵상을 주위 형제, 자매들하고 나눴더니 한 형제가 이렇게 답변을 달았습니다: “어 느 누가 아들을 죽인 또 다른 아들을 쉽게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곱 번은 커녕 한 번 용서하기도 힘든데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시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가능할지..“. 과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요?

 

이 세상에서 제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 도인들조차도) 누구누구는 절대로 용서를 못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처럼 ‘나 의 죄 때문에 이 아이가 죽었구나’라는 죄책감에 시달려 지냈던 약 1년의 삶을 살았을 때 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 는 생각이 들 때 그 죄책감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의 위로의 음성도 들리 지 않고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너 때문이야 …’와 같은 음성이 우리의 마음을 심히 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 다.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가운데 마음의 참된 자유와 평안이 없이 괴로운 인생길 을 힘없이 걷기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성경 느헤미야 9장 15b-17절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유의 하나님”, 즉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한 두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떠한 자들 을 용서하시는가? (2) 하나님은 왜 용서하시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어떠한 자들을 용서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우리 를 용서하십니다.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다른 모든 죄악들은 바로 교만으로부터 나옵니다. 교만이 질투를 낳고, 교만이 분노를 낳고, 교만이 탐심을 낳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그의 책 “회개행전”에서 교만을 한 3가지로 규정하였습니다:

 

  • 첫째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죄악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 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19:9)이였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건강한 자 존심하고는 다릅니다. 자기를 존중하며 소중히 여기는 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사랑은 병적인 자만에 가까운 것입니 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 자기만을 의롭다고 믿는 것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멸 시하는 것은 자만인 것입니다.

 

  • 둘째로, 교만이란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담을 쌓는 죄악입니다.

 

성경 누가복음18장11절을 보면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세리와는 같이 기도하기도 싫어서 아예 자리를 따로 해서(구별된 자리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기도에는 세 리와 ‘같지 아니하다’라는 어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면서까지 세리를 멸시하고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영적 우월감이란 교만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이웃에게 지나치게 공격적 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것, 남의 티를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 다 교 만이라는 병의 한 증후로서 이웃과의 교제에 벽을 쌓는 죄악입니다.

 

  • 마지막 셋째로,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속이려는 죄악입니다.

 

성경 누가복음18장11-1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나”라는 단어가 반 복되서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니 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 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말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가, 내 업적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하나님 앞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5b-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출애굽 시대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느헤미야 9장10절에서 말씀하고 있 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교만함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받은 것입니다. 마치 바로가 교만하여 스스로 마음을 강팎케 하였던 것처럼 이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만한 가운데 스스로 마음을 강팎케 한 것입니다. 언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 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하늘에서 양식을, 반석 에서 물을 내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배가 부른 후에 마음이 교만해 졌습니다. 사사기가 생각납니다. 궁핍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께서 사사를 일으키시사 구원해 주면 배가 불러서 교만히 행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였던 이 스라엘 백성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교만을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한 마디로 표현한 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목을 굳게 하다.’  영어로 는 Stubborn(NASB)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6절과 17저를 보십시오: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16절), “… 목을 굳게 하여 …”(17절). 이 ‘목을 굳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에 담겨있는 원래 의미는 ‘황소들의 짐 을 지기를 싫어하여 반항하는 것’입니다. 황소가 얼마나 힘이 세겠습니까? 근데 짐을 지 기 싫어서 반항하는 황소의 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교만함이란 말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결국 출애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유리 하게 된 것입니다(민14:33).

 

이 ‘목을 굳게 하다’ 즉 ‘교만하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 3가지 면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교만하다 혹은 목을 굳게 하다는 말은 거역하다, 즉 듣기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6절 하반 절에서 17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 주의 명 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여 …”(참고: 민 14:22).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 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 을 민수기 15장3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귀를 막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 다(목회자가 교만할 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에 교만한 자의 귀에는 오직 자 기중심적 음성과 아부의 음성, 사탄의 음성만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 운 일입니까?

 

  • 교만하다 혹은 목을 굳게 하다는 말은 잊어버리다, 즉 기억하기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7절을 보십시오: “거역하여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행하신 기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놀라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서도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 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하 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빨리 잊어버리는(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하나님 의 행하심보다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나 성도나 다 적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행함을 내 세우고자 하는 교만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 민수기 14장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 교만하다 혹은 목을 굳게 하다는 말은 돌아가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 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참고: 민 14:4).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시 노예로 살았던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 지도자까지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제일 첫째 되는 원인은 가나안 땅을 탐 지하라고 보낸 12명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다른 10명의 사람들이 “그 탐지한 땅을 악 평”(민13:32)을 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3장 32-33절을 보십시오: “그 땅 거민은 신장 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아낙 자손 대장부 들을 보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 았다.” 그러므로 그 악평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하는 가운데(14:1) 그 곡함 이 원망 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 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2-3절).

 

그러면 교만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 진노 중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 중 하나가 시편 78 편33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 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 둘째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78편 40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 마지막 셋째로, 배반의 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민14:43, 시78:17).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오히려 인간을 의지하여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교만이 낳는 마지 막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이동원).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은 왜 교만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 는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수밖에 없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7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 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참고: 민 14:19).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심이 그의 성품에서 비롯됩니다(스펄죤). 전정으로 동 의하는 말입니다. 그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7절 말씀에 근거하여 한 3가지로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는 서로 용서하지를 못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용서를 못하고 있습니 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인 그의 은혜로우심과 긍휼을 닮지 못한 부분 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목사님의 설교를 보닌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 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잊었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 지 못했기 때문이다”(인터넷). 요셉이 자기의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상 처와 아픔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형들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이 다 덮은바 되었던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혹은 잊었습니까? 그 이유는 교만 함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만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 두 단어를 합치며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긍휼이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 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고 헨리 나우웬은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긍휼”이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가 참 놀랍습니다. 히브리어로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웨(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 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 다”(나우웬). 그 은혜와 긍휼로 하나님은 교만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 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실하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용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아니하십니다(민23:21). 또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 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 다(사30:18).

 

  •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더니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7절을 보십시오: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는 이 하나님의 성품을 요나서에서 봅니다. 성경 요나 4장 2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 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알 알았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 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을 때(3:10) 요나는 심히 성내었습니다. 어느 정 도로 화가 났었냐면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 하”다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께 화가 났었습니다(4:9).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셨습니다(4:11). 그래서 그들에게 진노를 쏟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풍부한 인자로 그들을 픔으셨습니다. 그 런데 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치 아니하는 분노하는 하나님의 종 요나에 게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그에게 풍부하시고 섬세한 사랑으로 다루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자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고 하는 요나에게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에게 그늘을 주시사 괴로움을 면케 하셨습니다 (4:6). 그리고 그 다음날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보내시사 박넝쿨을 씹게 하시고(4:7) “뜨 거운 동풍”을 준비하시므로 요나의 머리에 해가 쬐게하시므(4:8) 요나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한 하루살이 박넝쿨을 아낀 것에 대한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신 후 하나 님께서는 십이만 명이나 되는 니느웨 영혼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한지 요나를 교훈하셨습니다(4:1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일체 오래 참으심”, 즉 무한한 인내하심으로 표현하였습니다(딤전 1:16).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 므로 광야를 성소로 삼고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시63:3). 그 노하기를 더디하심과 풍부한 인자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교만한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 하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7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성경 신명기 31장에 보면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과 함께 행하실 것이며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6절)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 데 16절에 가서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 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도 버릴 줄 이미 아셨으면서도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 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상상히 되십니까? 버림을 받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 들에게 ‘너가 나를 버릴 줄 알지만 나는 너를 정녕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상상 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왜 교만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실지언정 죄인인 교만한 저 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고자 구원을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 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 산다면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를 못하겠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때 극장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일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원자탄”을 보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근데 이번에 그분의 따님이 쓴 책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를 보고 그분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순교 장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8년 10월19일, 해방 정국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수 지구는 반란군의 아성이 되었을 때에 반란군은 죄악 성향의 학생들을 앞세워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며 정치 요인과 정당 관계자, 부유층,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무참히 학살했다고 합니다. 1948년10월21 일, 좌익 학생들이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쉴 새 없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는데 그 때에도 그들에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특히 총살하려고 할 때에 손 목사님의 맏아들은 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내 육신을 죽일 수 있으나 내 영혼을 죽일 수 없다!”, “이제 나는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마는 너희들은 그 죄 값을 어떻게 다 치르려고 하느냐. 지금이라도 예수 믿고 회개하도록 하여라.” 그랬더니 “잔소리 집어 치우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거든 말해라”. 그 때 성악가였던 손 목사님 맏아드님이 마지 막으로 찬송 한곡을 부르겠노라고 부탁하서 불렀는데 그 찬송가가 바로 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였다고 합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찬송을 부른 후 총 방아쇠를 당겼을 때 손 목사님 맏아드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하 면서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목격한 손 목사님의 둘째 아드 님이 쓰러져 있는 그의 형을 부여안고 “형님, 형님, 나도 형님 따라 천국에 가렵니다”외치 면서 벌떡 일어나 살인자 집단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무고한 사람 의 피를 흘리게 합니까? 하늘의 심판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 회개하 시오”, “내 신앙도 형님 신앙과 다르지 않으니 나도 쏘시오. 나도 형님 가신 천국에 함께 가겠소. 이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 자! 총을 맞을 터이니 너희하고 싶은 대로 쏘려면 쏘 아라.” 그 때에 살인자들은 “야, 저 놈은 제 형보다 더 지독한 놈일세”, “저런 놈, 살려 둬 선 안 되겠다” 말하면서 죽이려고 할 때에 손목사님의 둘째 아드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 다: “아버지 하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저들을 회개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 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총을 쏜 강철민(가명)은 확인사살로 두 발을 더 쏘았다고 합니다. 두 아들의 장례식 때 손양원 목사님의 아홉 가지 감사문을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 중에 아름다운 두 아들을 총살순교 당함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문이 있는 가운데 일곱째 감사문이 이렇게 감사하셨다고 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손동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복음을 전하신 손양원 목사님, 진정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들어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들어내는 삶을 살 수 있길 기원합니다.

 

 

 

교만한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와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욱더 깨달아 알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