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

 

 

 

[느헤미야 9장 9-12절 말씀 묵상]

 

 

인터넷을 보면 지도를 제공해주는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 집에서 교회를 오는 길을 알고자 하면 제일 빨리 올 수 있는 가까운 길을 가르쳐 줍니다[몇 마일인 지(거리)와 얼마나 걸리는지(시간)도 알려줌]. 만일 저와 여러분 앞에 가까운 길과 먼 길이 있다면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가까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 데 만일 그 가까운 길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 습니? 먼 길을 택하여 돌아가시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위험해도 가까운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성경 출애굽기 13장17-18절을 보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가 는 길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길과 먼 길(혹은 돌아가는 길). 가까운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인데 그 길에는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가 하면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17절)하여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셨습니 다(18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 으시고 홍해의 광야의 길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21-22절).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에 그들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심 히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 는 그들을 죽이려하는 바로의 애굽 군대가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 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 속에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냈느냐? 우리를 버려두라고 했지 않았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 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다’(14:11-12). 이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14:13-14): “…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 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절). 그 때에 홍해 바다가 갈라지면서 바다가 육지로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고(구원받았고) 애 굽 군대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전멸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 님”이란 제목 아래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한 3가지로 묵 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빈번한 질문이 있다면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가 입니다. 하나님이 살 아 계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왜 방치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자신들도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특히 이러한 질문은 ‘악인의 형통’과의 비교 속에서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가?’란 질문을 던지 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러한 비슷한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 까?

 

오늘 본문 느헤야 9장 9-12절에서 우리는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리면서 그들의 열조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출애굽 시대 때의 자기들 의 열조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송축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한 가운데 서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애굽에서 자기들의 열조들이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신 하나님, 즉 그들의 고난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10절)(박윤선), 그리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던 하나님을 찬양하며 송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출애굽기 3장7절과 9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여기서 성경은 분명 히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까? 다시 말하면, 왜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의 생각 속에서는 하나님 크시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사 람이나 사물과 비교하면서 무조건 하나님은 더 크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대화는 이 아이들이 기분 좋을 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싸울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 무 말도 없고 저희 집 딸 예리 같은 경우는 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 받는 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아픔 가운데에서는 하나님보 다 내 눈물과 상처가 더 크게 보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9:6)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1:5)은 변함없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축복과 고통이 라는 환경 속에서 자꾸만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습니다: 축복 속에서 크신 하나님, 고통 속에서 작게 보이는 하나님.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 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축복 받을 때 나 고난당할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소유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 첫째, 스스로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는 고난을 수반합니다.

 

자유는 인간됨에 속한 것입니다. 결정의 자유가 없는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 보 다 훨씬 나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나쁜 세상은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으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일 것입니다.

 

  • 둘째, 고통은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병을 인식할 수 없고 의사를 찾지도 않을 것 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우리 일상의 무의미에 대한 괴로움이 없다면, 특정한 괴로 움의 압박이 없다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셋째, 고난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돕습니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우리의 능력, 용서하거나 보응하거나, 상심하거나 놓아버리는 능력 - 이 모든 것은 특히 고난 가운데 시험을 받습니다. 모든 일이 평안할 때는 우리의 진정한 강점과 약점을 알 수 없습니다.

 

  • 넷째, 고난은 영원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날카롭게 합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고난이 가득한 삶은 어딘가 정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생의 끝이 영원으로 가는 문지방이라면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의 말로라도 고 난을 통해서 현재의 삶이 인간이 추구하며 살아가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일 뿐입니다.

 

  • 다섯째, 고난은 우리로 놓아 버리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새로운 고통은 이 세상을 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우리는 놓아 버리는 것을 그리고 의연히 다음의 삶을 향하는 것을 배웁니다(전12:1-14).

 

  • 여섯째, 고난은 하나님을 신뢰할 기회를 선사합니다.

 

욥은 권능과 지혜를 갖고 계시고 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난의 시기에도 절 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십니다.

 

누구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 보다 더 고난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죄로 가 득한 이 세상을 위해 더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이기적인 인류의 고통으 로 인해 그분만큼 울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셨 던,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보여주셨던 예수님만큼 고 난을 겪지 않았습니다.

 

  • 여덟째,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고난보다 더 큽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제해주시기를 몇 번 간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를 온전히 의지하라, 이는 내 능력이 네가 약할 때 너에게서 특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 아홉째, 위기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필요로 한다는 것을 -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필요로 한 다는 것을 -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우리의 능력 또한 자라갑니다.

 

  • 열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자신을 거부하고, 상처를 주고, 노예로 팔았던 사람들에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셨습니 다(창50:20)”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을 알게 됩니다.

 

둘째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0절을 보십시오: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 이라 오늘날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출애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 받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 을 하셨습니다. 그 기도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애굽 왕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10가지 “이적과 기사”(재앙으)로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과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구원).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고통을 준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하나님께서 치신 이유가 기 도 응답 외에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10 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이것은 야고보서 4장6 절 말씀(인용: 잠3:34; 비: 시138:6)의 원리와 같습니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 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 는 기도 내용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교만히 행함을 알고 계셨습 니다. 그러기에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10가지 재앙으로 지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심을 야고보서와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에 나오는 바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로의 교만함을 어 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교만함이라 무엇입니까? 성경 출애굽기를 보 면 바로의 교만함을 알려주는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가 마음 을 완강/강퍅하게 하여’입니다[“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모세와 아론)을 듣지 아니하니…”(출7:13, 22);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출8:15, 참고: 8:19, 32; 9:7, 12, 35; 10:20, 27; 11:10)]. 마음을 강퍅케 혹은 완강하게 했다는 말은 무 슨 뜻입니까?  강팍이란 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센 것이라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강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반항하다, 완고히 하다는 뜻이 있고 영어로는 Hard(하 드) 라고 하는데 ‘굳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강퍅함이란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자신의 위치, 견해를 확고히 하는 태도이며 또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연적인 것보다는 거의 본능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고 묵은 밭 과 같은 마음을 기경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인터넷). 저는 출애굽기 9 장21절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것. 하나 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청종하지도)않고 그 말씀 대로 순종하지도 않으므로 그 말씀을 자기에 소유로 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시119:56).

 

우리가 바로와 같이 교만한 자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적하는 교만한 자를 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 을 대적하여 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명예를 얻으 시는 하나님이십니다(10절). 즉, 하나님은 출애굽 시대 때 자신의 권능과 공의, 거룩하심을 이스라엘 대적들인 바로와 모든 애굽인들에게 나타내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찬양과 경배케 하신 것처럼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 를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만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들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여 우리의 대적들을 치려고 하면 아니 됩니다. 복수는 주님께 기도로 맡 겨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에스겔 36장26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 새 영을 너 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 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 을 줄 것이며”. 주님께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므로 우리의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을 열심히 신실하게 기경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 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11-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우리 열조 앞에서 바다 를 갈라지게 하시사 저희로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를 돌을 큰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셨사오며.” 출애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을 보시고 불쌍히 여 기셨던 하나님,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교만한 바로와 애굽인들을 10가지 재앙으로 치 시사 명예를 얻으신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또 다시 부르짖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 도를 들으시사(9절)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신 하나님을 지금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양을 드렸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 과하게 하시고 좇아왔던 모든 애굽 군대 사람들을 홍해 바다 물에 던지셨던 하나님, 그 하 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인도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과연 모세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갇힌바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아무리 동서남북 돌아봐도 문제 해결책 이 안보일 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은 잠언 3장5-6절 말씀을 믿으십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 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만일 “아니오”하셨 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다를 갈라지게 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 그 순간순간마다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크심, 위대하심을 바라보기 보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나 고난을 극대화하므로 그 문제나 고난에 이리저리 끌려 다 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함께하심, 동행하심, 그의 임재를 통한 인도하심을 경험하기보다 고난 자체의 인도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고난에 이끌림을 받는 삶임). 그 예가 바로 수요기도회 때 나눈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사래(사라)입니다. 10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인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잘 붙잡고 오다가 자기 남편은 아직 도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을 알았지만(85세) 그러나 자기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음 을 알고 자기 명철을 의지하여 자기 여종인 하갈과 남편 아브라함과 동침케 권면하므로 결 국 이스마엘은 낳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 가정에 싸움이 일어났고 지금 중동에서의 싸 움도 이삭과 이스마엘 후손들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인간의 불가 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여 약속을 붙잡지 못하고 자기의 명철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문제를 당면했다면 어떻게 하시겠 습니까? 우리는 ‘문제 지향적’입니까 아니면 ‘해결 지향적’입니까?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목표 그 성취의 기슬”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인터넷): “’대부분의 시간 동안 생각하는 그대로 된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문제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성공한 사람들은 이른 바 '해결 지향'이라고 하는 특별한 사고방식을 보인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 안 해결책에 대해 생각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문제와 난관에 대해 생각 한다. 해결지향적인 사람은 자기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넘어가고 돌아가고 지나 가는 방법들을 모색한다. 문제 지향적인 사람들은 문제들에 대해, 누가 또는 무엇이 그것 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거나 화가 나 있는지에 대해 원망만 늘어놓는 다. 반면에 해결 지향적인 사람은 단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만 생각하며, 그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취한다.”   홍해 바다 앞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습니다: “문 제 지향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해결 지향적”인 모세. 문제 지향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서남북 갇힌바 된 상황, 특히 뒤에서 좇아오는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움 속에서 애굽에서 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이젠 죽어 꾸나 생각하니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결 지향적”인 지도자 모세는 동서남북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제일 바르고 좋은 해결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팡이를 들 고 홍해 바다를 쳤을 때 바다가 갈라져 육지처럼 되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처럼 홍 해를 건너가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좇아오던 애굽 군대는 홍해 바다 물에 다 깊이 잠겨 죽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다의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므로 인생의 난관을 믿음으로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서 거하시사 우리를 저 약속의 땅 천성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가 360장 후렴을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인도하심 따라(2x)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원수(대적)처럼 여기셔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마치 하 나님께서 출애굽 사건 속에서 10번째 재앙인 애굽의 모든 첫째 아들을 죽이셨던 것처럼 독 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치시사 죽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저와 여러분을 약속의 땅 천국으로 내재하시는 성령님 을 통하여 인도해 주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홍해 바다처럼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 막힌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저 높 은 곳을 향하여 오늘도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