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부흥 (II)
[느헤미야 8장 6-9절 상반절 말씀 묵상]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세상입니다. 요즘 도덕적 해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원 래 이 말은 보험에 들면 사람이 조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동차 보험에 들면 교통사고 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 보험에 들면 건강에 크게 유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 모컨에 센스기능이 다한 것처럼 양심에 감각이 둔해짐 말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 을 상실함을 말합니다. 이런 도덕적 해이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뭔가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인터넷).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을 캐논(cannon)이라고 합니다. 그 원뜻은 자입니다. 성경 아모스 7장 7-8절에 나오는 말씀을 빌려 표현하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이란 건축현장에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실 에 추를 매달아 수직을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이요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제 멋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인터넷). 그래서 성 경 사사기 21장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 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옮은 대로 행하였더라.” 저는 오늘 본문 중심으로 “말씀의 부흥 (II)” 이란 제목을 걸고 말씀의 부흥에 대한 싸인(signs)을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싸인은, 찬양과 경배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 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 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홍성건 목사님의 책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 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홍성건). 예배의 첫 번째 단계는 “찬양”입니다. 이 단 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 놓으신 일, 그의 행하신 일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할 때에 그 출발은 하나님이 이 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가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노래합니다. 그것을 선포합니다. 그것을 찬양합니다. 예배의 두 번째 단계 는 “경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노래하고 감사하면서 나아가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 을 보게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보다는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 그분을 높이게 됩니다. 그의 은혜, 사랑, 거룩, 자비하시며 선하신 위엄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 심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 6절을 보면 찬양하는 에스라와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 에 스라는 “광대하신 하나님”, 즉 크신 하나님(1:5, 4:14)께서 그의 크신 능력(1:10)으로 이 큰 역사(6:3, 4:19)인 예루살렘 성 재건을 이루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6:16). 그래서 에스라 는 모세의 율법을 듣고자 수문광장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앞에서 크신 하나님 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성경 에스라 3장11절을 보십시오: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 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 며”. 그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6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께 경배하였느니라.” 이것은 놀라운 참된 말씀의 부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문광장에 모여 있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의 “광대하신 하나님”의 찬양(“송축”)에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대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께서 큰 역사, 즉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셨음을 인정하였기에 “아멘 아멘”한 것입니다. 그런 후,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 로 말미암아 에스라의 찬양에 동참하는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광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겸손과 경외심 가운데 경배하였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처럼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18절 말씀을 성취에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보므로 그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을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에 나아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 선하심,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겸손히 인정 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깨달음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 7-8절을 보십시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 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 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한 후 레위 사람들이 수문 광장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7절). 여기서 우리는 성경 을 가르치는 법에 대해서 몇 가지 원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했습니다.
- 성경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분명하게 하며 해석을 해줘야 합니다.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책”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석하여” 주었 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모세 율법을 해석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모세 오경인 창세기부터 신명기 까지 썼을 당시의 히브리어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대 때에는 변화가 있 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 사람들은 모세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 석해 주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삶 속에 율법을 적용할 수 있 도록 하나님의 율법책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습니다(패커).
- 성경 공부의 목적은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게 했습니다.
존 밀턴 그레고리(John Milton Gregory)가 쓴 “가르침의 절대법칙 7가지(The 7 Laws of Teaching) 중 첫 번째 법칙인 “교사의 법칙”을 보면 그는 “가르침”을 이렇게 정의 를 내리고 있습니다: ‘가르침이란 제일 간단하게 말한다면, 경험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에 내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즉, 가르치는 자가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해하여 얻은 진리를 배우는 자의 생각과 이해력에 형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달”은 뭔가 지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 라 배우는 자로 하여금 가르치는 자의 경험을 생산하도록 돕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 하면서 그레고리는 “교사”에 대해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 는 레슨을 철저하게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충분한 마음과 분명한 이해력 가운데 가르치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하고 선명한 언어를 사용 해야 합니다(그레고리).
셋째로, 눈물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 9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모세의 율법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울었습니다. 그 이유는 율 법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을 보십시오: “… 율 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패커 목사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깨달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충격을 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는 것은 감정에 압도당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으로 말미암은 눈물은 어느 특별한 현실의 분명한 자각으로 인한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부흥의 뿌리는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선하심, 자비와 그가 우리의 개인적인 죄들인 사악, 부끄러 움, 무례함, 자살적인 어리석음의 분명한 자각입니다(패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언제 그 말씀이 우 리의 마음을 찔러 죄를 들춰내므로 회개의 눈물을 흘려보았습니까? 왜 우리는 회개의 눈 물이 메말라 있습니까? 그 이유를 저는 아모스 8장11절 말씀에서 찾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 마스 왓슨(Thomas Watson)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위선자들에게 필요하다. 위선은 성 결을 위장하는 것이며, 위선자 또는 무대 연기자는 도덕가보다 한 술 더 떠 종교의 의상으 로 몸치장을 하고 있다. 그는 경건의 형식은 자처하지만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5). 위선 자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집 같지만 모든 방안은 어둡다. 그는 아름답게 금박을 입힌 썩 은 기둥이며, 그는 신앙고백의 가면 밑에 자기의 전염병의 상처를 감춘다. 위선자는 얼굴 을 화장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거룩을 꾸미는 화장을 한다. 그는 겉으로 선하기 때문에 정 말로 악할 수 있다. 위선자는 그의 눈을 하늘나라에 못박아놓고 있는 것 같으나 그의 마음 은 불순한 육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의 양심에 역행하여 비밀한 죄 가운데 살아간다. 그는 말씀을 듣지만 오로지 귀뿐이다. 그는 교회 헌신에 열심이며 그 점에서 다른 사 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그를 칭찬하지만 그러나 그는 가정과 골방 기도를 등한시한다. 위선 자는 겸손을 가장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하여서다. 믿음을 자처하지만 그는 믿 음을 방패로 삼기보다 오히려 가면으로 삼아 이용한다. 그는 겨드랑이에 성경책을 끼고 다 니지만 자기 마음속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말씀의 촛대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속을 조 사해서 혹시 거기서 아무 회개거리도 찾아낼 수 없을지 살펴보라”(인터넷).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암8:11). 지금 이 시대는 하박국 선지자 시대 때처럼 악인의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굽 게 행하므로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합1:4). 이렇게 율법이 해이한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 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 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부흥은, “하야”인데, 생명을 하 나님께서 부어주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부흥 항상 죄를 회개 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입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부흥입 니다. 연약해진 심령에 불을 붙여, '다시 뜨겁게 되는 것'이 부흥이다. 성도들의 믿음은 성장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돌아오는 기간입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의 부흥을 통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