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리더십
[느헤미야 6장 10-14절 말씀 묵상]
존 맥스웰의 “파워 리더십”이란 책을 보면 “초점 만들기”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보면 유능한 리더에게 요구되는 초점을 우리는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를 한 3 가지로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 첫째로, 초점의 70%는 장점에 둬야 합니다. 자신의 잠재력에 도달한 유능한 리더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이 잘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에 두며 초점을 맞춰야 합니 다. 성공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신의 장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 둘째로, 초점의 25%는 새로운 일에 둬야 합니다. 유능한 리더는 자기에게 항 상 변화를 주면 개선하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그는 새로운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장점에 관련된 새로운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리더십에서, 성장하기를 그만둔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 마지막 셋째로, 초점의 5%는 약점에 둬야 합니다. 약점을 완전히 피하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열쇠는 가능한 그것을 최소로 만드는데 있으며, 리더는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유능한 리더는 자신의 잘하지 못하는 일을 위임할 줄 아는 자입니다(맥스웰).
그러나 우리 인간의 본능은 자꾸만 자기의 약점에 초점을 맞추어 장점조차도 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개발하기 위해서 변화를 주고자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 니다. 또한 우리는 약한 점을 다른 이에게 위임하기도 꺼려합니다.
느헤미야는 매우 초점을 맞춘 지도자(Very Focused Leader)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그의 초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중건)하는 일 이였 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이루고자 함에 있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멈출 수 없는 열정으로 충성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10-14절 말씀 중심으로 “파워 리더십”의 3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 안 에서 느헤미야와 같은 피워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계속 세워지길 기원합니다.
파워 리더십의 첫 번째 요소는 용기(Great Courage)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 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 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 라 하고.” 존 맥스웰의 “파워 리더십”이란 책의 “용기”란 장을 보면 미국 “최고의 전투기 조정사” ‘에디 릭켄벡커”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 전쟁이 끝날 때까지 300전투시간(미국 조종사 중 가장 많은 시간임)을 기록했으며, 134차례 적기와 만나, 26대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예의 훈장을 비롯 8개의 특별 공로 십자가 훈 장과 프랑스 레중 도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보여준 용기는 언론으로 하여금 ‘미국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American Ace of Aces)’라는 칭호를 붙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하루는 전투에 보여준 그의 용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말했 다고 합니다: “용기란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란 필요 없는 것입니다”(맥스웰).
오늘 본문을 보면 두려움 가운데서도 큰 용기를 보여준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 느헤 미야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미 우리가 묵상한바 느헤미야 6장을 보면 느헤미야에게 세 번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시험들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데 충 분했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산발랏과 게셈이 사자를 보내어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 한 촌에서”(2절) 만나서 그를 암살하고자 한 것이며(1-4절), 두 번째 시험은 6장5-9절 말씀에 나오는 악성 루머를 통하여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을 두렵게 하므로 낙심시켜 예루살렘 성 벽을 중건하는 역사를 정지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오늘 본문 6장10-14 절에서 나옵니다. 그 시험이란 거짓 선지자 스마야란 인물의 위협적인 예언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느헤 미야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이 거 짓 선지자 스마야의 위협적인 예언은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느헤미야를 죽이러 밤에 올 것이 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숨자는 것이었습니다. 즉, 스마야는 암살 기도가 임박 하니 함께 성전에 피하자고 느헤미야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성경 잠언 27장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 를 받느니라.” 느헤미야는 그의 대적들이 “오너 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들이 자기를 “해코자 함”을 알았습니다(느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스마야 선지 자가 대적들이 느헤미야 당신은 죽이러 온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숨기를 거부하며 생명 보 전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엔 좀 타협해서 이번 위협을 잘 넘기기 위해 잠깐 숨 어 있다가 다시 예루살렘 성벽을 계속 중건하면 되겠지 하면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더 힘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서 생명이 연장되어야지 주님의 일을 좀 더 오래 많이 할 수 있지 하면서 합리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 첫째로, 그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11절을 보십시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해야 하는가”. 느헤미야는 “자기가 비겁함을 보여주면 유대인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있 었습니다(화이트). 성경 잠언24장1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 둘째로, 느헤미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숨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레위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성전에 숨는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자기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라 해도, “일종 의 신성모독 행위”(화이트)이기 때문에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숨지 않겠다고 스마야 선지자 에게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느헤미야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완수를 위해서 자 기 생명도 보존하지 않았기에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숨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11절). 이 것은 느헤미야의 투철한 사명감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박윤선).
여기서 우리는 “파워 리더십”의 한 요소인 “용기”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느헤미 야는 큰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큰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가운데서가 아닌 우리가 두려움 을 느끼던 불안하던지 혹은 상처를 입던 지간에 옳은 길을 하고자 하는 확고한 자세를 말하 는 것입니다(패커). 화이트 목사님은 “용기의 학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 에서의 과업이 시작되기 오래 전, 아닥사스다 왕에게 첫 요청을 해야 할 문제에 직면했을 때부터 느헤미야는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고백하였다(2: 2). … 그러나 그는 두려움 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전진해 나아갔는데 그것이 나중에 그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용기의 학교에 등록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가 몇 개월 후,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햐랴?’고 외쳤을 때는 이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때였다”(화이 트). 리더십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게 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맥스웰).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옳은 일을 하게 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파워 리더십”의 또 두 번째 요소는 분별력(Great Discernment)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12절을 보십시오: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분별력(spiritual discernment)이 아닌 영적 혼동(spiritual confusion)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에인드 토조 목사님은 그의 책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That Incredible Christian) 보면 “영적 미몽”(spiritual illusion)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 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 거짓은 참을 모방하는데 너무나 능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자꾸 혼동하게 된다. 오늘날 누가 가인이고 누가 아벨 인지를 구별하려면 매우 날카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 … 함께 어울리면 아주 편하고 즐거운 사람이 있다. 그는 말 도 부드럽게 하기 때문에 호감을 준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때로는 사탄의 사자일 수 있 다. 반면 거칠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피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런 사람이 우리에게 영적 위험성과 영원한 멸망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선지 자일 수 있다.” 느헤미야에게 임한 이 세 번째 시험은 영적 유혹’(spiritual seduction)입니 다(패커). 즉, 두려움으로 느헤미야를 유혹하여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게 만들려는 시도였 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탄의 계략은 예루살렘 성벽 건축이 진척되는 단계마다 더욱 야비한 형태의 공격을 취하였다는 것입니다(화이트). 처음 느헤미야 4장1-3절에서는 조롱과 공개 적인 비웃음이었고, 그 다음에는 어마어마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무장 공격을 꾀한다는 소식이 들여 왔었고(4:7-12), 그러고는 대화로 해결하자는 제의로 위장된 암살 음모가 이어 졌습니다(6:1-3). 그 다음엔 6장5-6절에서 나타난 중상 모략적 비난이 담긴 공개서한도 나왔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이 거의 완공되어가는 단계에서는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느헤미야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케 하며 유다 백성들에게 신뢰를 잃게 만들고자 했었습 니다(6:10-13).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기 바로 전에 임한 이 마지막 단계인 ‘영적 유혹’ 은 상당한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이미 우리는 느헤미 6장 2절에서 느헤미야가 산발랏과 게셈이 사자를 보내어 자기 를 만나고자 함이 자기를 해하고자 함을 분별하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때 자기를 암 살할 계획을 분별하였다는 것은 오늘 본문 6장 10-14절에 비교할 때 쉽지 않았을 것입니 다. 그 이유는 그 때는 대적들이 사자를 보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대적들이 뇌물로 종 교 지도자인 스마야 선지자를 사서 느헤미야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에 적용한다면,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 교회의 재건을 멈추게 하고자 거짓 목사를 뇌물로 사서 담임 목사인 저에게 보내어 하나님 앞에 범죄케 하므로 성도님들에게서 신뢰를 없애려고 하 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여기서 제일 먼저 분별한 것은 스마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이 쉬 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선지자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찾아 간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가 그 선지자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스마야가 “두문불출”, 즉 집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는 느헤미야 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마야 선지자는 느헤 미야를 위하는 것처럼 암살 기도가 임박하지 함께 자기랑 하나님의 전에 숨자고 말을 하였 습니다. 과연 이 스마야 선지자가 진짜 선지자인가 거짓 선지자인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 습니까? 성경 요한복음 10장12-13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 하고 또 헤 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거짓 선지자 스마야는 이리와 같은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를 죽이러 온다고 하면서 느헤미야에게 함께 하나님의 전으로 도 망가자고 제안한 것을 보면 자기 자신이 ‘삯꾼 선지자’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인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인 느헤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전으로 도망가 숨는다면 그러면 양떼들이 유다 백성들은 어찌되겠습니까? 거짓 선지자 스마야는 그것에 는 관심이 없었던 반면에 느헤미야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느헤미야는 어떻게 자 기 생명(만)을 보전하겠느냐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11절). 또 한 가지 생각나는 말씀은 성 경 신명기 18장 20절입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 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 느니라.” 느헤미야는 선지자 스마야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민수기 18장7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직임을 맡기시면서 “… 거기(장막 혹은 성전)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일찌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선 지자 스마야는 자기 자신이나 느헤미야는 제사장도 아닐 찐데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서 숨 자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분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 예레미야 23장3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는 거짓 선지자는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스마 야가 유다 백성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음을 보고 유익이 되지 못하는 스마야 가 거짓 선지자임을 분별했습니다. 왜 이 거짓 선지자인 스마야는 느헤미야를 유혹하였습 니까?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1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결국은 느헤미야를 하나님에게 범죄케 하며 유다 백성들 앞에서 비방하려고 도비야와 산발랏이 스 마야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 예언(12절)을 하게 한 것입니다. 뇌물이 선지자의 눈을 어둡게 하여 거짓 예언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출23:8).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느헤미야의 분별력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바로 성경적 생각 (Biblical mind)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기준으로 평가하는 판단력을 길러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적당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입 니다(패커). 느헤미야의 그 적당한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 기준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느헤미야에게는 있었기에 그는 진실 된 선지자와 거짓된 선지자 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파워 리더십’의 요소는 기도(Great Prayer)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14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 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 였노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느헤미야를 대적하는 거짓 선지자가 스마야만 있 었던 것이 아니라 여선지자 노아댜 외에 “그 남은 선지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느헤미야를 대적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음모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큰 압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지자들을 크게 존중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 사람의 평신도가 추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많 은 거짓 목사들의 음모단이 대적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를 두렵게 하 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인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는 일을 정지케 만들려고 하는 거짓 선지 자들을 느헤미야는 기도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기도는 긴 기도가 아 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러한 느헤미야의 기도를 가리켜 “전보기 도”(telegraph prayers)라고 칭하였습니다. 이러한 짧은 기도는 느헤미야에서 여러 번 나옵 니다. 그 한 예로 느헤미야 6장 9절을 들 수 있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이것은 느헤미야의 기도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의 기도의 삶은 생활화가 되어 순간순간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역경과 어려움들 가운데 하나님께 아뢰며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 다. 그러면서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해 나아간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기도의 삶”을 보면 “끊임없는 기도”란 장이 나옵니다. 거기에 끊 임없는 기도에 대해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두려운 고립상태에서 하나님과의 두려움 없는 대화로 옮겨오는 것이다. … 마음의 기도란 일상의 많은 파도 밑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시냇물 같은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도 세상 안에 살아가며, 고독의 한복판에서 우리 하나님께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 서 열린다.”
주님 중심된 꿈을 가진 지도자로 세움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용기와 분별력과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