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느헤미야 6장 1-9절 말씀 묵상]

 

 

“목회자 충격  보고서”(피터 칼도르& 로드 불피트 지음)란 책을 보면 20개 교파, 7,200개 교회 목회자, 성도 430,000명 설문조사 자료가 나옵니다. 탈진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목회자들은 누구인지 한 6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2 가지가 좀 관심을 끌 었습니다:

 

  • 젊은 충에서 스트레스와 탈진의 정도가 더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나이가 젊을수록 탈진의 위험이 크다는 사실은 몇 가지 사실을 반영해 줍니다: 청 소년 사역이 쉽지 않다는 사실, 지도자들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크다는 사실, 긴장된 문제를 대처하는데 미숙하 다는 사실.

 

  • 어린 자녀를 키우고 있는 지도자들의 탈진 정도가 더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40세 이하의 사람들에게서 탈진 수치가 더 높게 나타난 이유는 그들이 자녀 양육의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역할과 사역이라는 이중의 책임은 지도자들의 부 족한 시간과 에너지를 양쪽에 쏟아 붓느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큰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칼로드 & 불피트).  여기서 말하는 “탈진”이란 무엇입니까? “탈진은 강한 애착이 가는 어떤 것을 얻 기 위해 또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공급이 차단되는 데서 비롯된 피로와 절망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프로이덴버거).   “탈진은 일반적으로 자존감의 저하 그리고 일, 인생,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나타나며 무력감과 절망이라는 느낌 을 동반한다”(마스라치). 사탄의 계략은 우리로 하여금 탈진케 하므로 무력감과 절망감을 갖게 하므로 강한 애착이 갔었던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 에 적용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이 위대한 목표를 이루지 못하도록 우리로 하여 금 탈진케 하는게 사탄의 계략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9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이 말씀을 보면 지도자 느헤미야로 하여금 탈진케 하고자 하 는 대적들의 계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느헤미야 6장 1-9절 말씀 중 심으로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란 제목 아래 우리로 하여금 힘 빠지게 하여 주님 의 몸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하는 3가지 요소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하는 요소는 만 남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2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인생의 여정을 걸으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그 만남을 한 2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유익한 만남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해를 끼치는 만남. 오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대적들이(1절)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듣고 그 중에 산발랏과 게셈이 사자를 느헤미야 에게 보내어 서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우리의 삶과 교회에 적용 해 볼 수 있는 것은 일이 마무리(완성) 단계에 이를 때에 우리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는 가장 중대한 위기는 승리 이후, 축복 이후, 부흥 이후, 또는 일이 잘 진행되어 가던 중에 닥쳐오는 경우를 종종 봅니 다. 예로 갈멜산에서 850대 1의 극적인 결전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승리를 거두어 바알의 선지자들을 물리친 엘리야의 사건, 그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 서 죽기를 구했습니다(왕상19:4). 엘리야의 이런 좌절은 성공 바로 다음 순간에 찾아왔습 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 전10:12).  지금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거의 다 짖고 이젠 성문에 문 짝 만 달면 되었던 때에 그들의 대적인 산발랏과 게셈이 사자를 보내어 “오노 평지 한 촌에 서 서로 만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2절). “오노 평지”는 베냐민 지파의 땅에 있으며 예 루살렘에서 20마일 북쪽에 있었다고 합니다(박윤선). 그런데 왜 이 장소에서 산발랏과 게 셈은 느헤미야를 만나 자고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를 촌 으로 유인하여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해하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손을 약화시키려는 계책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느헤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거룩한 무리에서 떠나도록 만들어 성도들의 교통과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하므로 결국은 한 지도자를 해하므로 전체 교회 공동체를 무너트리고 자 합니다(박윤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을 제거하면 전체 조직이 무너집니다(화이트). 전쟁 문맥에서 말한다면 “지휘관을 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것이며 또한 지금 미국에서는 알카이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 혹은 암살의 명령을 내 렸습니다. 성벽 재건이 완성되어가는 이 마당에 성벽 재건에 대한 반대도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반대는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말하면 오늘 본문 6장에 서는 그들의 지도자인 느헤미야 개인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젠 대적자들 이 완성 단계에서 지도자를 해하므로 일 전체를 중단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죤 화이트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지도자 역할이란 평상시에도 심한 정신 적 압박감(stress)과 긴장을 수반한다”(화이트). 다시 말하면, 지도자가 인신공격의 표적물 이 될 때 그 정신적 압박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 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압박감에서 압박감으로 이어지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부르심이 또한 능력에서 능력으로 이어지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점입니다(화이트).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능력이 느헤미야에게 나타났습니까? 바로 분별력 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게셈이 만나자고 하는 것이 실상은 자기를 해치고자 함 임을 알았습니다(2절). 가끔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에서 좀 바보처럼 살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 갈수록 비둘기처럼 순하 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처럼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있 습니다.   저에게는 균형이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적의 음모를 분별하습니다.   성경에서 도 이러한 분별력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빌1:10),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그러한 분별력 가운데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만남 제안을 어떻게 거절했습니까?   오늘 느헤 미야 6장 3절을 보십시오: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 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 냐 하매”.   느헤미야는 “큰 역사”, 즉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하는 일이 정지 될 수 없기에 대적들의 만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하 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서 정신이 딴 데로 쏠리며 우회를 했다면 그를 좇는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자가 없는 대규모 계획(프로젝 트)은 목표가 없는 계획이요 결국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도자는 꼭 좋은 모범이 되야 하며 맡인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산발랏과 게셈은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십 시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 한두 번도 아니 고 네 번이나 계속 사자를 보내서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같 은 대답을 줬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이 큰 역사를 멈출 수 없다는 대답을 줬습니다. 이 얼마나 목표에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사는 지도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느 헤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확신(Conviction)을 가지고 자신 있게(Confidence)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가운데 어떠한 유혹과 핍박과 계이 있더라도 일관성(Consistency)있게 일 을 추진해 나아갔습니다. 한 주석을 보니깐 이런 말이 있습니다: “Decisions based only on opinions might be reconsidered, but decisions based on convictions must stand unless those convictions are changed”[생각(opinions)에만 근거한 결정은 다시 재고해야 하지만 확신(convictions)에 근거한 결정은 그 확신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꼭 서있어야 한 다](주석).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이 큰 일에 충성 하기보다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주시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목표인 주님이 세우시는 이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다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하는 요소는 소 문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6절을 보십시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산발랏과 게셈이 사자들을 통해서 네 번이나 “서 로 만나자”고 제안 했지만 느헤미야는 목표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 는 일을 추진해 나아갔습니다. 그리했을 때 산발랏이 또 다른 다섯 번째 음모를 꾸미기 시 작하였습니다(5절):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5절). 산발랏은 느헤미야 암살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두 번째 음모로 악성 루머(소문)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악성 루머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 가 사람들을 선동해서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 건축에 관심이 있는 것 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자기의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그가 직접 왕이 되려고 합니다 (6-7절).’    이러한 산발랏의 중상모략은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소문이 수산성 에 이르러 아닥사스다 왕의 진노가 예루살렘에 미칠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볼 때 이는 정치 적으로 큰 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수상 궁에 가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소문의 진위를 밝히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와 유다 백성들의 목표인 예 루살렘 성벽 재건이 여러 달 동안 중단 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산발랏의 소문이 얼마나 파괴적입니까? 이와 같이 그는 엄청난 소문을 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러한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5절에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라는 말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편지를 의도적으로 봉하지 않았 기에 여러 번 읽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화이트).  그 결과로 이 편지는 헌담과 구설을 점 점 더 퍼뜨리는 원천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절).

 

택사스 주립대 광고학 박사과정에 있는 김호규 씨는 “10대 마케팅, 뿌린 대로 거두 리라”란 제목 아래 1년에 2천억 달러 이상을 소비하는 소비자 그룹인 10대 젊은이들 어떠 한 소비성향을 가지고 있을까 연구한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보면 블루 퓨전(Blue Fusion)사의 조사에 의하면 27%의 젊은이들이 광고가 자신들의 구매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제 광고인들이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의 파워(word of mouth power)를 실감할 때가 왔다 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위의 설문조사는 90%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친구로부터 새로운 제품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만큼 소문의 파워가 놀랍습니 다.  한국 속담 중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 있죠?   소문이 놀랍게 멀리 빨리 퍼짐 을 이릅니다(말조심하라는 뜻). 그리고 또 다른 속담인 “말이 말을 만든다”, 즉 말은 옮겨 지는 동안 모르는 사이에 그 내용이 과장되고 변한다는 뜻입니다(인터넷).  요즘은 인터넷 을 통하여 악성 루머가 얼마나 빨리 퍼지는지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을 비 방하며 악성 루머를 퍼트리고자 교회 자유 게시판에도 글을 올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죤 화이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서 우리들 대부분은 얼른 자기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명예에 대해 민감 하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 예민하다. 우리는 또한, 뭇사람들이 우 리에 대한 비방을 곧이들어 믿을 경우에 일어나게 될 사태에 대해 두려워한다. 닫힌 문, 옆으로 외면한 얼굴들, 야비한 편지들, 차가운 태도, 이 모든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 리고 이보다 더한 위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일의 손실 즉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손실이 다”(화이트). 그러나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손실”은 절대 있을 수 없 기에 그는 산발랏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 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8절).   느헤미야는 산발랏의 중상모략에 사실이 아님 을 지적하면서 산발랏이 만들어 낸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방어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느헤미야는 긴 변명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변명 이나 해명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동원). 어느 한 청교도는 자신이 중상모략의 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을 때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자기 행동의 원칙을 한 3가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1) 첫째로,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소문인가?’, (2) 둘째로, ‘내가 이것을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3) 셋째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들은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내 형제들에게 유익한가?’(이동원).

 

마지막 셋째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하는 요 소는 두려움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6장 9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는 대적자들이 자기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 자기를 “해코자 함”(2절)을 알았고 또한 악성 루머를 퍼트리는 것도(8절) 결국 느헤미야와 유다 백 성들을 두렵게 하며 낙심케 하여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큰 역사, 즉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정지시키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벽을 재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사탄의 종들인 느헤미야의 대적들은 그 성벽 재건을 어떻게 서든지 정지(멈추게)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봅니 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다시 말하면,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 금 모든 악성 루머를 무시할 수 있게 해주시며 예루살렘 성벽 재건하는 일을 완공될 때까지 유다 백성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조직하며 감독하는 자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 달라 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패커). 느헤미야는 알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악성 루머가 아닥사스다 왕의 귀에 들어가면 자기와 유다 백성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악성 루머가 아니더라도 예루살렘 성벽이 다 완공되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이 변하여 그들과 성을 어떻게 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걱 정 근심할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손안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패커). “하나님,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가 할 일을 다 하게 하옵소서. 맡겨 주신 그 일을 다 하여 주 앞에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이동원).

 

죤 화이트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성공은 보통, 반대 세력을 만들어 놓 기 마련이다. 성공이 크면 클수록 반대로 심하다. 만일 그 성공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 이라면, 이에 대한 반대는(그것이 인간적인 적대감으로 나타나든 설명할 수 없는 실망과 공 포의 감정으로 나타나든) 사탄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반개의 포악성 정도는 어떤 구체적 인 목표의 중요성과 실현 임박성을 나타내 준다”(화이트). 이럴 때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반대의 원천(사탄)과 반대의 의도(일을 중단시 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인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서 절대로 눈을 떼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큰 역사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자 우리의 손의 힘을 빼려고 잘못된 만남, 거짓된 소문, 또한 두렵게 하고자 하는 대적들, 오히려 우리에게 주신 목표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임을 믿고 목표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 회를 재건하는 이 큰 역사를 멈추어서(정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오늘까지 오게 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소문과 두려움을 진실 됨과 하나님 경외하기로 극복해 나아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