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하는 자의 자세
[느헤미야 4장 15-23절 말씀 묵상]
수피 가르침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나이가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가장 완전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맸지만 완전한 여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인생을 낭비하고 그냥 돌아온 그에게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그래 그렇게 완전한 여자가 세상에 는 한 명도 없던가?’ 70살의 총각이 답한다. ‘아냐, 한명 있었네. 기적적으로 완전한 여 자를 만날 수 있었네.’ 깜짝 놀란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됐어?’ 침울한 얼굴 로 총각이 답했다. ‘어떻게 되긴, 그 여자는 완전한 남자를 찾고 있더군. 그래서 결국 허 탕치고 말았지’”(김정호). 아마 그래서 노총각, 노처녀 분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 기서 수피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완전한 교회를 70살의 총각처럼 우리는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인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라고 말한다면 과연 우리가 완전한 교회를 찾 고자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여기서 던지고자 하는 자문은 과연 나는 교회를 섬 기면서 어떠한 마음의 자세로 섬기고 있는가 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하시면서 어떠한 자세로 임하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15-23절 말씀 중심으로 “건축하는 자의 자세”란 제 목을 걸고 건축자인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자세를 통하여 귀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목표에 이끌려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 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 사하였는데.” 예루살렘 성 건축에 반대하던 대적들인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이 분노가운데 모여서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8절)고 결정하였지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2 가지입니다:
- 대적자들의 뜻을 유다백성들이 먼저 알게 되어 수비태세를 갖추었기 때문에 기 습 공격이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대적자들의 뜻은 유다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달려들어 살육 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역사를 중단케 하려고 했지만(4:11) 그 대적들의 근처에 사는 유다 사람들이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에게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던 대적들의 쳐들 어 올 것을 여러 번 미리 얘기해 준 것입니다(4:14).
- 하나님이 대적자들의 꾀를 폐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좋은 예로 압살롬이 다윗을 죽임에 있어서 아히도벨의 모략과 다윗의 친구 아렉 사 람 후새(삼하16:16)의 모략을 들은 후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 의 좋은 모략(삼하17:14)을 파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느헤미야 4장 15절도 보면 “하나 님이 저희(유다의 대적자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에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습니다. 즉,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성 뒤 낮 고 넓은 곳에”서 대적들의 공격에 준비하고 있다가 다시 성벽으로 돌아와 그들의 목표인 예 루살렘 성 재건을 계속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건축하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얻는 원리는 “목표에 이끌려 일하라”입니다. 독립전쟁 당시 미국 해군 제독이었던 메이혼(Mahon) 장군은 부하 장교들을 가르칠 때 다음 과 같은 혼령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제군들, 귀관들이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나설 때에는 언제나 최종 목표를 먼저 결정해 놓고 시작하시오. 일단 결정했으면 절대로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오”(화이트). 느헤미야는 한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 성벽 건축이었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선제공격을 택했더라면, 그는 모든 병력 을 다 필요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작업은 정체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적 들의 적대감이 누그러질 때까지 성벽 건축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더라면, 불가피 하게 노동 인력을 재배치해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건축 재개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노동력은 계속 활성화 상태에 있었고 작업은 가장 빠른 시기에 재개되었 습니다. 느헤미야의 최종 목표는 성벽 건축이었고 그의 정책은 그의 목표에 의해 결정되었 습니다. 그랬기에 제자리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일을 계속한다는 계획안이 나온 것입니 다. 공격에 대한 그의 자세는 방어적이었고 일에 대한 그의 자세는 공격적이었습니다(화이트).
18세기 전도사였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8세기에 다른 어떤 지도자보 다도 영국과 북미에서 일어난 위대한 영적 각성 운동을 중심을 차지했던 인물로서 그만큼 맹렬하고 끈질긴 반대에 부딪혔던 그리스도인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으로 살고 있지 않는 성직자들로부터 일찌감치 반대를 받았고 대부분 의 영국 국교회들은 궁극적으로 그로부터 등을 돌렸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휫필드는 3 가지 원리를 고수했습 니다: (1) 자신을 비난하는 자에게 절대 응수하지 않는 것, (2) 물의를 빚고 있는 논쟁에 가 능한 한 휘말리지 않는 것, (3) 복음의 전체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 그에게는 궁극적인 목표인 복음을 완전히 그리고 두려움 없이 선포한다는 목표가 있었 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오는 온갖 비방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목표를 놓치지 않 았습니다(화이트). 우리 교회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재건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목표에 이끌림을 받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이 위대한 일을 중단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전투적인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16절을 보십시오: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 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그 때로부터”, 즉 대적들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고자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다음부터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만하지 않고 그들의 공격에 전쟁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성을 건설하면서도 전쟁 태세를 갖추고 일하였습니다(박윤선). 자기의 사람들 중 절반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계속하였고 다른 절반은 무기를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고 있었던 건축하는 자들이나 담부하는 자들(즉, 돌들을 치우며 성벽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재 료를 자르는 자들)은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또 다른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17절). 건축하는 자들은 일할 때 두 손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아예 칼을 옆구리에 차고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했습니다(18절). 그리고 나팔 부는 자는 느헤미야 곁에 서 있었습니 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크고 또한 성벽이 넓기 때문에 서로 나뉘어 져 멀리 있었기에 어느 쪽에서든지 대적들이 공격해보면 나팔을 불어 위험한 쪽을 도와 연 합으로 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다닐 때에 배운 것이 생각납니다. 헬만 바빙크 (Herman Bavinck)라는 신학자가 말한 "지상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요, 천상교회는 승리적인 교회"란 생각이 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전투적이 되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손에는 성령의 검인 성경책,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해야 합니다. 이 때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승 리의 확신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20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 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에게 있어선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진리일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의 대적자들의 꾀를 폐하셨습니다(15절). 느헤미야는 전쟁의 승리 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데 그 확신의 근거를 한 4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 째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은 반드시 정의의 편을 도우신다는 것”, (2) 둘째는, 예루살렘 복 구 운동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 (3) 셋째로,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한 전쟁(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은 모두 다 승리하였다는 것, (4) 마지막 넷째 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하여 주신다는 사실 등입니다(박윤선).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그에게 나아가면서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 전쟁은 주님께 속 한 것인즉(대하20:15)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전투적인 자세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긴장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세상을 깨우는 기발한 아이디어”(시라 P. 화이트, G. 패튼 라이트 공저)란 책을 보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혁신을 만들어 가는 주체들을 ‘H3 리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열정적이고(Hot), 진보적이고(Hip), 일을 만들어 가는(Happening)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 책에서 저자들은 H3리더가 바로 혁신을 위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그 ‘누구’라고 말하 면서 혁신을 추구할 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자원은 바로 창의적인 인재라고 말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H3 리더는 단순히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구체화를 위한 새로운 아 이디어인 아이디어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디어 테크닉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5가지 정도로 저자들이 정돈 했는데 그 중에 세 번째가 오늘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창의적인 긴장 상태의 조성이다. 창의적 인 사람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마찰과 긴장이 필요하고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긴장이 있는 곳에서는 긴장을 활용하고, 긴장이 없으면 긴장을 만 들어낼 필요가 있다. … 즉, H3 리더들은 다양한 사람을 확보하여 창의적인 스파크를 유 도한다. 대립과 모순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에서 더 뛰어난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이 것은 관점과 경험이 다양할수록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지식 체계가 수렴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이 독특한 방식으로 합쳐질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인터넷).
지금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면서 찾아온 위기인 대적들의 무력 연합 공격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긴장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 3가지로 그들이 긴장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첫째로, 유대 백성들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가까지 창을 잡았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2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다시 말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부터 밤에 별이 보일 때까지 창을 잡고 혹은 허리에 차고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 둘째로, 느헤미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낮에 성을 중건하는 일을 마친 후에도 집 으로 돌아가지 말고 방위를 계속하기 위해 성 안에서 지내도록 당부하였다(박윤선).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그들은 긴장 속에서 가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안았습니다. 밤에 예루살 렘 밖으로 나아가는 모험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매일 밤 어떤 일하는 자들은 파수를 섰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밤에 공격 당아기 쉽기 때문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 다.
- 마지막 셋째로, 씻기 위한 것 외에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옷을 벗지 아 니하였고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무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23절을 보십시오: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일을 한 후 더러워진 옷을 빨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옷 빨 시간도 없이 일을 하면 보초를 섰 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으러 갈지라도 무기를 항상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 미야의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위기 가운데서 자기도 긴강감을 가 지고 모범을 보였습니다(23절). 그는 자기의 형제들과 종자들과 그를 좇는 파수하는 사람 들과 함께 옷을 벗지 않고 함께 어려움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범이 그를 좇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욱더 충성하여 예루살렘 성 재건하는 일을 위기 가운데서도 감당케 하도록 격려가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는 그를 좇는 유다 백성들과 공감대가 형성이 되 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유다 백성들처럼 긴장감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에 충성했다는 말입니다. 제임스 패커 목사님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도자가 자기 들과 제일 가깝게 동인물이라고 인정할 때에 그들 또한 그 지도자와 동인물이라고 인정한 다’(패커).
믿음의 시인 올펠로우는 그의 "인생찬가"라는 시에서 꿈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이 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광대한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장에서/ 말없이 쫓기는 가축의 무리는 되지 말자/ 이 투쟁의 앞장서는 영웅이 되자/ 그저 미래가 달콤할 것이라는 사실에 현혹되지 말자/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돌리자/ 활동하자 살아있는 현재를 위하여 활동하자/ 가슴속엔 용기를 품고/ 하늘위엔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념을 가지고 ....” 꿈과 개척 정신을 가지고 메이풀라우어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행했던 청교도들을 보십시오. 메이 플라우어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했던 순례자들은 그해 추위 힘겨운 노동, 피로, 영양실조 등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데 순례자들의 인원 이 줄어들고 있다는 상황을 노출시켜 혹 원주민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례식 도 밤에 행해야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 뒤 그들의 숫자는 반으로 줄었습니다. 앞에는 미 개척 원시림, 뒤에는 망망한 대해로 둘러싸인 그들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친지를 잃은 슬픔 과 예측 못할 불안감. 그리고 신대륙 개척의 위압감은 그들을 절망케 하기에 충분했습니 다. 그해의 고통스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습니다. 메이프라우어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선장은 친절하게 권유하였습니다: "이제라도 본국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주저 말 고 돌아가자". 그러나 그 배는 빈 배로 떠나야 했습니다. 순례자들 가운데 한사람도 그 배를 타고 돌아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들이지만 오직 한 가지. 꿈과 희망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현실의 날개는 무겁지만 그 날 개를 이용해 힘차게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는 순례자와 같은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입 니다(정대성).
주님의 교회 세우기 사역에 있어서 합당한 자세를 추구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분명한 목표의식과 전투전인 자세와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