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들여 일하라!

 

 

 

[느헤미야 4장 1-6절 말씀 묵상]

 

 

저는 마이클 무어의 영화 “화씨 9/11”(Fahrenheit 9/11)를 보고 한 영화 객이 적은 글을 인터넷 중앙일보에서 보았습니다. 그 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다들 알다시피 부시와 그의 각료를 조롱하기 위한 것이다. 부 시의 멍청한 표정, 그의 말,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부시와 참모들의 코믹한 표정들, 초등학교 를 방문한 자리에서 피격소식을 접하고 난감해 하는 부시의 표정들로 영화는 시작된다. 심 지어는 9.11사태가 발생하기 전날 프랑스제 이불을 덮고 잤다는 것까지, 문제의 본질은 제 쳐두고, 오직 부시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코미디에 실없이 웃을 만큼 감정이 한가하지도 않고,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처참한 사건을 두고 값싼 농 담거리나 주절거리고 있는 감독이 한심하기까지 하였다”(인터넷). 결론을 한 마디로 “부시 를 조롱하기 위한 3류 코미디…"였다는 것입니다.

 

“미디어 오늘”이란 웹싸이트에 2004년 7월 첫째 주에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에게 조롱의 대상을 설문 조사한 결과 조롱의 대상 순위를 이렇게 매겼습니다:“제1순위: 서울 시 장 “이명박”씨였습니다. 야심만만하게 서울시 교통체계를 바꾼다는 명분 아래 7월 1일부 터 시행된 버스노선 전면개편이 시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며 이 시장은 졸지에 분노의 집중 대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제 2순위: 말 바꾸기 의혹과 석연찮은 행동으로 김씨 피살 의 진실을 미궁에 빠뜨린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주간 순위 2위에 올랐습니다. 제 3순 위: 3위에는 “이번엔 진짜 결혼한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며 댄서와 약혼한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올랐습니다(인터넷).

 

교회 안에서의 조롱은 어떠합니까?   누구를 조롱합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 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고 그 따위 식으로 믿어 야 되느냐? 그렇게 주일날 꼭 나가야 되느냐? 그렇게 충성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 느냐?"하며 조롱하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교인이 교인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인터넷). 이렇게 조롱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 느헤미야 4장 6절 을 보면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조롱 가운데서도 ‘마음 들여 일’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 들여 일하라!”는 제목 아래 오늘 본문 중심으로 한 2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어떠한 상황에서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마음 들여 일했습니까?

 

그들은 조롱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을 마음 들여 재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면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람 3명 중 산발랏이 예 루살렘 성을 건축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었습니다(1절).   이미 산발랏은 다른 대적 자들인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함께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 을 “업신여기고 비웃”었습니다(2:19).   이것은 산발랏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공작으로서 야비한 심리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실망과 두려움을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불어 넣으려는 것이었 습니다(화이트). 즉, 예루살렘 성을 재건 못하도록 건축자들의 폐기(morale)를 파괴하려는 의도였습니다(패커).   이 대적 자들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잘들의 “심리적 약점”을 이 용 하여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락 전쟁 된 심리전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나눕니다. 1990-1991년에 있 었던 걸프 전쟁 때 심리전 부대가 작은 비행기를 통하여 “걸프의 음성”(Voice of the Gulf) 이란 명칭아래 이락 사람들에게 전단지(삐라)를 많이 뿌려서 결국 87,000명 이락 군인들이 항복했다 고 합니다. 이번에 있었던 이락 전쟁에서도 “정보 라디오”(Information Radio)라 는 명칭아래 이락 사람들에게 엄청난 숫자의 전단지를 비행기로 뿌리면 서 연합군이 이락 사람들을 돕길 원하며 사담과 그의 정권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무고한 이락 시민들 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1-6절 을 보면 우리는 산발랏의 심리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심리전을 한 5가지 질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첫번째 질문은 “… 이 미약 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입니다(2절).  여기서 산발랏의 조롱 핵심은 일하는 자들인 유다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심리전에선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던 지 혹은 상대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가지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면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대학교 때 봉사하고 있었던 크리스천 그룹에 속해 있던 자매와 제 룸메이트와 담당 고 문 전도사님과 한 식당에서 앉아서 물을 마시며 음식을 기다리는데 제가 반대편에 앉아 있 었던 자매에게 ‘좀 건강하시네요’ 했다가 물벼락 맞았습니다(그 자매는 자기 몸매에 대개 신경을 썼었던 것 같음). 쉽게 말하면 뚱뚱한 여자에게 상처를 주려면 그녀를 뚱보라고 부 르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산발랏이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인 사 마리아 인들과 군대 앞에서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한 형편없고도 치욕스러운 상황에 예 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을 가리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칭하였 습니다.   여기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란 말은 비참한 혹은 불행한 유다 사람들이란 말입 니다. 이 단어의 뿌리는 구약에서 한 2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a) 첫째는, 사라지는 혹은 시들고 있는 나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사16:8; 24:7; etc.). (b) 둘째로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사 19:8; 호 4:3). 오늘 본문에서 “미약한 유다 사람들” 이라고 칭한 것은 유다 사람들은 시들어가는 사람들로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이기에 가치 있는 일 또는 훌륭한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 심해야 할 사실은 고린도전서 1장18-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존재인 저와 여러분 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면 또 한 우리를 사용하시사 그의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와 파워를 영광으로 삼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의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의 가난함과 연약함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약할 때에 곧 강하다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고후12:1-10).

 

  • 두 번째 질문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입니다(2절).  여기 두 번째 질문에서 산발랏의 조롱 핵심은 일 자체, 즉 예루살렘 성 재건이었습 니다. 이 조롱을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과연 자기들이 시작한 일이 어떤 일인지 제대로 알 고 있는가?”라는 말(화이트) 또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은 확실히 그들의 능력 밖이 다’(패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너희처 럼 숫자가 적고 연약한 교회가 어떻게 승리교회를 다시 재건할 수 있느냐?’, ‘너희가 어떻 게 남미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느냐?’는 등등의 조롱어린 질문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감당할 수 없다는 비판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사역에 지쳐있고 힘이 빠져 있을 때 이러한 조롱은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이트 목사님은 “자신이 시작한 어떤 일에 대하여 의구심이 일어나려 할 때 자신이 이미 느끼는 두려움을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것이 가장 듣기 싫은 것이다” 고 말하면서 느헤미야 4장1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유다 사람들의 연약한 상황 과 말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 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이미 유다 백성들이 예루 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구심이 들고 있을 때 산발랏의 이 두 번째 조롱은 치 명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세 번째 질문은 “…제사를 드리려는가 …”(2절)입니다.  이 세 번째 조롱은 그 뜻이 분명하게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산발랏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유다 백성들)의 믿음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화이트).   그것은 마치 ‘과연 저들은 기도가 성벽을 높여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얼마 나 무서운 산발랏의 조롱입니까? 유다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일인 예루살렘 성 재건 하는 일을 조롱하더니 이젠 그들의 신앙인 기도를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에는 기도와 예배로 되겠는 가?’는 조롱인 것입니다. 이것은 산발랏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돕는다는 사실을 부인 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 집 회를 위하여 또한 태신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는 조롱을 듣는 다 면 여러분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실까? 과연 나의 태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일까?’   이 세 번째 조롱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버리고 의 심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 네 번째 질문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입니다(2절).  이 네 번째 조롱의 핵심은 일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 즉 짧은 시간 안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힘이 쇠하여 지쳐 있었고(10절) 또한 “우리 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산발랏은 이렇게 크고 힘든 일을 얼마나 걸려서 끝낼 수 있을 것인지 더욱더 낙심케 하려는 의도로 조롱하고 있는 것입 니다. 이것이 사탄의 조롱이요 유혹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우리 승리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커보이게 하면서 우리가 그 큰일을 감당하기엔 작아보이게 만들므로 인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은 “…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 ”입니다(2절).  여기서 산발랏의 조롱 핵심은 건축 재료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함에 있어서 필요한 돌들이 이미 소화되어서 소용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루살 렘 성 주위에 있었던 소화된 돌들은 아직도 건축 재료로 쓰기에 좋은 것들이었습니다(화이 트). 그 때 소화된 것은 성문이었고 성벽은 무너트렸기 때문에 거의 모든 돌들은 다시 사 용할 수 있었습니다(패커). 그러나 산발랏은 유다 백성들을 실망시키려고 맞는 말과 더불 어(소화된 돌) 틀린 말을 슬쩍 내뱉었던 것입니다.

 

이 산발랏의 5가지 조롱 후 암몬 사람 도비야의 조롱이 나옵니다: “암몬 사람 도비 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 라”(4:3). 여기서 도비야의 조롱 핵심은 완성된 생산물, 즉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이 건축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이 다 완성될찌라도 너무나 약해 서 여우가 성벽에 올라가도 곧 무너진다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리라’라 는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벽)의 터진 곳, 갈라진 틈’입니다. 즉, 여우가 올라가도 예루 살렘 성벽에는 갈라진 틈이 생길 거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인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 니’라는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붙잡고 어떠한 대적들의 조롱에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 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충실히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가 부족하고 미약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할지라도, 우리의 하는 일을 조롱하며 우리의 능력과 가지고 있는 자원을 조롱할지라도,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조롱하며 도전할지라도 우리는 주 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충실해야 합니다.

 

둘째로, 어떻게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마음 들여 일했습니까?

 

그들은 기도하면서 마음 들여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4-5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 컨대 저희의 욕 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 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세 번째 기도 를 봅니다(1:4-11 & 2:4). 우리는 그의 기도를 이중 간청으로 구체화(명확히) 할 수 있습 니다(패커):

 

  •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지원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4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 고.” 여기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새로운 힘과 자신감을 주시므로 말미암아 산발랏의 조롱의 약화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심판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4-5절을 보십시오: “원컨대 저희의 욕 하는 것으로 자기 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 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을 대적하는 산발랏과 그의 일행에게 저주를 내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헤미야가 조 롱을 당하여 복수심 속에서 저주의 기도를 드리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산발랏과 도비 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조롱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해 주시길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시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시편 69, 79, 139:19-22). 이러한 시편을 가리켜 영어로 “Imprecatory Psalms”(남을 저주 하는 시편)이 라고 말합니다. 그 한 예로 시편 79편 4, 6절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느헤 미야,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놀라운 사실은 대적들의 조롱을 느헤미야는 기도와 마음 들여 일하므로 대항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조롱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기도하는 동 안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일을 멈 춘 것이 아니라 계속 낙심시키려는 대적들의 조롱에 흔들리지 않고 온 유다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다하여 계속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짧은 기간 안에 절반을 재건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기도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재건함에 있어서 어떠한 조롱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서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14장 65절과 15장 16-20절 을 보십시오: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 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14:65), “군병들이 …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끊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16-20). 조롱을 받으 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 후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짖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막14:58).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에 조롱 가운데서도 마음을 들여 일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 성이 되시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허무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형식적이 아닌 진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