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건축하자!”(1)

 

 

 

[느헤미야 2장 11-16절 말씀 묵상]

 

 

고든 맥도날드의 책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라”(Rebuilding Your Broken World)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 확장 사역에 어떠한 자를 쓰시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시몬 베드로와 같은 실패했던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락 확장 사 역에 요원으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맥도날드 목사님은 요한복음 21장 말씀 중심으로 “디베 랴 바다”(1절)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 3가지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첫째, 예수님은 베드로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재건자는 베드로가 너무 상처를 입어 스스로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실망과 낙심 가운데서 자기의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 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4절) 물으셨습니다. 그 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5절)고 말씀하신 예수님, 베드로가 순종했을 때 153마리나 물고기가 잡혔을 때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시라”(7절)하는 말을 듣 고 바다로 뛰어내려 해변을 향해 헤엄친 베드로, 그는 과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대한 것일까요? “작별 인사하러 왔다” 혹은 “베드로야, 나는 널 유능한 사도로 만들기 위해 정말로 힘써 왔지만, 넌 아쉽게도 조금 모자라는 것 같구나” 혹은 “어디, 앉아서 그날 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얘기 조금 하자꾸나.”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저 숯불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실패자들의 무리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 고 계시는 예수님,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우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 디베랴 바다에 오신 것입니다.

 

  • 둘째, 예수님은 제자가 내뱉었던 세 번의 부인을 대치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솔직하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세 번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책 망도 안 하시고 그 대신 베드로에게 세 번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 냐?’(15-17절). 그 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 이다”라고 세 번 고백하였습니다(15-17절).

 

  • 셋째, 예수님은 제자에게 주신 사명을 재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사 랑 세 번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말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처음 받은 사명이 아직 유효했습니다.  베드로는 버려진 것 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회복된 것입니다.  그의 무너졌던 세계가 재건된 것입니다(맥도날드).

 

아직 유효한 사명,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주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회복 되야 할 사명감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11-16절 말씀 중심으로 “일 어나 건축하자! (1)”란 제목 아래 예루살렘 성을 재건함에 있어서 필요한 3가지 요소 중 그 첫 번째인 “사명감”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저와 여러분 에게 주신 사명에 다시 불타오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12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 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요즘 교회나 기독교 단체 들을 보면 사명 진술이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승리장로교회의 사명 진술은 그리스 도 중심된 비전을 쫓는 일꾼들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 체적으로, 우리 교회 목적 진술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일꾼들을 찾아 발굴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증인들로 양육하며, 그들을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훈련시켜, 성숙된 평신도 사역자들로 세운다.” 여기서 우리는“사명”이란 말은 무슨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 봐 야 합니다.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명(命)'자는 '목숨 명' 자 입니다. 곧 사명이란 '심부름을 하는 목숨'으로 목숨을 걸고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인 터넷).   과연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 표어 또는 목적 진술에 목숨을 걸고 그 목표를 이루는데 헌신을 다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과연 느헤미야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것이었 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 도움을 받는 느헤미야(2:8)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소(들)를 가 지고 메데 바사 수산 궁을 떠나 이젠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11절). 도착한 후 느헤미 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3일 동안 고요히 지냈습니다(12절). 성경은 특별히 그가 3일 동 안에 예루살렘 성 재건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3일 동안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요히 지냈는지 우리는 10절에 비추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대적인 산발랏과 도비야 때문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어도 섣불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데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대적들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예루살렘 성을 재거하겠다고 분주히 드러내고 움직였다면 그것은 지 혜로운 행동이라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0장16절 말씀을 귀담아 들 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원수들은 항상 우리를 공격하려고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 면 느헤미야가 지혜롭게 3일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했으면서도 고요히 지내는 동안 무엇을 했겠는지 우리는 그의 과거의 삶을 비추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가 기도 외에 그 3일 동안 무엇을 하며 고요히 지냈겠습니까? 헨리 나우웬(Henry Nowen)의 “기도의 삶”을 보면 침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침묵이란 심신의 심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쉼이다. 이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행동과 사고에 대한 통제력을 내 놓는 것과 같고, 내가 창의 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창의 적인 일이 일어나도록 잠잠히 있는 것이다. … 침묵이 없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소멸되며, 우리는 삶의 창의적 에너지를 다 잃은 채 차 갑고 지친 모습으로 혼자 남게 될 것이다.  침묵이 없을 때 우리는 중심을 잃은 채 끊임없 이 내 관심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나우웬). 생각건대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3일 동안 하나님 앞에 머물러 기도하는 가운데 참된 안식을 얻었을 것입니다. 예 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의적인 일이 자기 자신 안에 먼저 일어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3일 동안의 고요한 시간 보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성경 느헤미야 2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3일 동안 잠잠히 주님 앞에 머물러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느헤미야 마음에 창의적인 역사를 이 루고 계셨습니다. 그 목적은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말입니다: “사람이 일하는 시간도 귀하지만 고요히 거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이렇게 신자가 고요히 지내는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또 영감도 받게 된다. 우리가 일할 때에는 주로 인간 을 상대하게 되고, 고요히 쉬는 때에는 하나님을 상대하게 된다”(박윤선).

 

느헤미야는 3일(동안 기도한) 후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는 밤에 ‘비밀리에 예루 살렘 성을 조사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전에 현장을 사전에 미 리 둘러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 집 울타리 시찰을 언제 했는지 시에서 편지 가 날아왔습니다.  집 앞 울타리를 다 없애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저는 저 희 교회 한 형제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때 그 형제가 와서 다 뜯어 냈는데 기둥까지 없애라고 해서 톱을 가서 사서 다른 형제와 같이 잘라 냈습니다. 도시 환경 차원에서 아마 아름답게 도시를 꾸미고자 집 앞 울타리를 없애는가 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13 절을 보면 느헤미야도 황패된 예루살렘 성을 시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 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느헤미야 1장2-3절에서 유다에서 온 형제 하나니와 두어 사람에게 예루살 렘 형편을 물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고 느헤미야에 게 이미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장 13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그 형제들의 말 을 직접 자기가 시찰하여 확언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그 형제들의 보고를 의심하는 것보다 직접 보고 최종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죤 화이트(John White) 목사 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자세한 정보와 조사가 필요 없다는 뜻 이 아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직접 알아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며, 이는 능률을 기하고자 할 때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 물론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는 문제를 미리 내다보실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직접 알아보지 않 는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화이트).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감화를 받고 시작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 게 하신 일”(12절)에 대해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우리 기독교인들에 있어서 “일”이 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일”하면 많은 사람들이 ‘일중독’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고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일중독의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세대 의대 이홍식 교수(정신과)가 쓴 “'일 중독증' 자기 진단법 및 치료”라는 인터넷 글을 보면 일 중 독증 자기 진단법을 보면 10개 리스트가 있는데 이중에 8개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은 일 중 독증에 걸린 것이라고 합니다: (1)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2) 매일 할 일을 리스트로 만들어 놓는다, (3) 쉬는 것이 견딜 수 없다, (4) 식사 때 옆에 서류뭉치 를 펼쳐 놓는다, (5) 일에 정력적이고 경쟁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6) 주말이나 휴일에도 일 을 한다, (7) 언제 어디서든 필요하면 일할 자세가 돼있다, (8) 일이 많아 휴가 내기가 힘들 다, (9) 퇴근 후에도 내일 일을 걱정한다, (10) 정말로 일을 즐긴다(인터넷). 과연 “일”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이 질문의 대답을 찾아봐야 합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목사님은 한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 첫째로, 성경에서 “일”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에는 소이 우리가 말하는 일이나 직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저 돈을 벌어 우리 자신을 유익케 하는 것을 가리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일이란 항상 목적 지향적입니다. 그것은 끝을 관점에 두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 둘째로, 성경은 삶을 일과 쉼의 리듬으로 관찰하고 있으며 또한 영적 일과 세 상의 일을 마치 두 따로 구분된 기능으로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의 삶을 단일성 있게 계획하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 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기에 세상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나누는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 셋째로, 성경이 분명히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하면서(살전 4: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책임 있는 행동은 그의 사명감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사명감에 불 타오르는 지도자, 그는 결코 꿈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사실을 정직하게 부딪치 며 또한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받아들입니다. 느헤미야는 거주자들이 낮에 본 것보 다 그는 밤에 더 많이 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문제와 더불어 가능성을 밤에 예루살렘 성 을 시찰하면서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존 존스톤(John Johnston) 목사님은 “골리앗 세상의 다윗”이란 제목 아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는 쉽사리 패배주의적이고 망상적인 전략을 개발해 낸 다. 그 결과 스트레스를 극대화시키는 방어적인 공격성과 비현실적인 죄의식을 낳는 심각한 예민함이 생겨난다.   '큰 것이 좋다'는 주제를 메아리처럼 되풀이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작은 교회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에 대한 유혹은 새로워진 정 신, 즉 다시 불타오르는 목적의식과 사명감에 굴복해야 한다”(존스톤).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 흥왕케 하려는 사람 느헤미야처럼 불타오르는 목적의식과 사명감에 굴복 하십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이 목적의식과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가진 기드온의 300명 군사와 같은 일꾼을 세워 파송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확장하는 이 일에 우리의 사명감 을 불태웁시다!

 

 

 

다시금 사명감에 불타오르길 간절히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사역에 겸손히 동참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