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케 하려는 사람”(2)

 

 

[느헤미야 2장6-10절 말씀 묵상]

 

 

에이든 토저(A. W. Tozer) 목사님이 쓰신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Rut, Rot, or Revival)란 책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원수”(1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 다. 그는 그것을 “종교가 부패해 가는 점진적 삼단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첫 번째 단계는, 기계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종교적 활동 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아무런 감탄도 없이, 어떠한 행복한 놀라움이 나 기대감도 전혀 없이 그저 종교적 활동을 반복하기만 합니다.

 

  • 두 번째 단계는, 습관적 상태입니다. 기계적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습 관적 상태라고 일컬을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계적 상태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습관적 상태는 기계적 상태에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습관적 상태의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감지하거나 느낄 만 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 세 번째 단계는, 부패한 상태입니다. 교회는 내면적 부패 때문에 항상 시달리 고 있습니다. 부패한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자면, 더 좋은 것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장을 향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 심 리 상태에 빠지게 되고, 영적 엄격함이 시작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교회가 발전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들은 아무런 일 도 하지 않을 때, 이것은 그 교회가 내면적 부패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 죄의 증거가 됩니다: 자기 의, 비판, 자기만족의 죄입니다(토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마치 공동묘지와 같습니다. 온 교회가 습관적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판에 박힌 일이 교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장이 이루어질 수가 없고 또한 예측 불가능이란 분위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 기대감이 없습니다.  다음 주일 일어날 일을 미리 예언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다음 달 에 일어날 일도 미리 예언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지어 버리는 주 인이 되었고,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리는 통치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 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혹시 온 교회가 습관적 상태에 빠져 있는 공동묘지와 같은 교회는 아닙니까?   모든 것을 뻔히 예측할 수 있기에 아무 기대감 없이 습관적으로 주일 교회 왔 다 갔다 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는 예측 불가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자들로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세우고 계심에 대한 기도와 기대와 기다림 속에서 주시는 기회를 포착하여 흥분상태(excitement)를 가지고 믿음으로 섬기는 공동체입니까? 느헤미야 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기대합니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예측 불가능한 일을 마 음에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에 소원을 아룁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예측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기도의 사람이요 흥왕케 하는 사람인 느헤미야가 마음의 근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포착하여 아닥사스다 왕에서 마음의 소원을 말합니다. 저는 오늘 “흥왕케 하려는 사람 (2)”제목 아래 느헤미야의 마음의 계획과 행동을 생각해 보는 가 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음의 계획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 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 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존 화이트 목사님은 그의 책 “탁월한 지도력”에 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기도는 바로 계획이 시작되는 곳이다.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제일가는 목표는 큰 능력을 받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발견하는 일이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만든 계획은 단순히 기도에 의해 차후 ‘뒷받침을 받는’ 계획보다 훨씬 낫다.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은 이뤄지지 않을 수 없다” (화이트).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저는 양극단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극단은 기도하지 않고 마음대로 계획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의 극단은 기도는 열심 히 하는데 계획이 없는 사람들입니다(이동원).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왜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는 것입니까? 한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 첫째 이유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 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 둘째 이유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한다면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안 된다 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렸으면 하나님께 맡겨야지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셋째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느헤미야처럼 기도의 책임을 지고자하는 헌신과 결심이 없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책임을 지길 원했던 느헤미야는 약 4개 월 동안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진리는 고린도전서 14장40절 말씀입니다: “모 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 기에 느헤미야처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자 하는 목표 속에서 어떻게 그 목표를 이루어 나아갈지 기도 중에 미리 계획해 둔 것은 그의 질서 정연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무턱대 고 기도한 다음 멍한 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우 리의 최선을 다해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느헤미야의 마음의 계획은 무엇이었습 니까? 한 4가지였습니다:

 

  •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다가가기 가장 좋은 때 접근하였습니다오늘 성경 느헤미야 2장 6절을 보면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고 말 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페르시아에서는 왕비가 공식 석상에 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화이트). 그런데 지금 느헤미야가 왕에게 다가 갔을 때에는 왕비가 왕하고 같이 있었던 때인 것으로 보아 공식 석상이 아닌 비공식 상황, 즉 친근하고 도 사적인 상황을 틈타 왕에게 느헤미야는 접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느헤미야는 가장 좋은 때에 의도적으로 슬픈 안색을 왕에게 보여주었습니다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 1장2-4절에서 느헤미야가 유다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느헤미야는 고국을 형편을 듣고 슬퍼했을 탠데 왜 그 때가 아니라 2장 1 절에 와서 4개월 후에 슬픈 기색을 왕에게 보였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왜 갑자기 4 개월 후에 슬픈 기색을 왕에게 하였냐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회를 엿보 다가 왕비가 왕하고 같이 있는 친근한 분위기에 느헤미야는 자기 소원을 왕에게 아뢰고자 슬픈 안색을 의도적으로 보인 것이 분명합니다(2:2).

 

  • 느헤미야는 마음에 기한을 정해 놓았습니다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 에 돌아오겠나 냐”하고 물었을 때(2:6) 느헤미야의 대답은 “내가 기한을 정”했다고 왕에게 답변하였습니 다. 그는 무턱대고 대충 답변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 봐야 알지요. 주께서 원하 시는 대로 머물다가 오겠습니다.’ 이 말이 왕에게 통했겠습니까?

 

  • 느헤미야는 왕에게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아뢰었습니다그것은 다름 아닌 “조서”(letters)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어떠한 조서를 부탁했습니까? 2 가지입니다.

 

  • 유다까지 통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7 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 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 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느헤미야는 자 기가 있는 메데 바사에서 유다까지 800마일 정도 가는 여정에 대적들(에스라 4:9-10; 5:3) 을 예상하고 왕에게 유브라데 강 서편 총독들에게 유다까지 가도록 허락하는 왕의 편지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 들보 재목을 느헤미야에게 주게 하는 조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8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 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느헤미야가 요 구한 두 번째 조소는 왕의 삼림 감독인 아삽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문을 재건하는데 필요 한 재목들과 자기의 거할 집을 위한 재목을 아삽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도록 허락하는 편 지입니다.

 

이 얼마나 철저한 계획입니까?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마 음에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때, 혹은 그에게 주시는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담대하게 아닥사스다 왕에게 관리들의 도움 과 물질적인 원조까지 받는 것에 관한 조서를 청원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조소” (들)을 청한 결과 느헤미야는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기를 도우 심을 경험하였습니다(8절). 주님의 강한 손을 경험한 느헤미야는(1:10) 하나님의 선한 손을 경험한 것입니다(2:8). 이 말씀은 저로 하여금 로마서 8장28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 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 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한 시편34편8절 상반 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 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성경 잠언16장3절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철저 한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계획을 세운 느헤미야는 그 마음의 계획조차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경영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잠언 19장21절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 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둘째로, 마음의 행동을 생각해 보십시다.

 

느헤미야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일단 왕으로부터 자신의 계획에 대한 승 인을 얻자마자 필요한 물자를 얻어 내고 안전한 여정을 마련해 놓을 뿐만 아니라, 더 세밀 한 계획을 세우고 많은 인력을 가동시키며, 하나의 방대한 공공사업 계획을 앞에 놓고 운영 하기 좋도록 작은 단위로 쪼개 놓습니다. 이는 우리가 앞서 만났던 경건한 기도의 사람 느 헤미야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한 유능한 감독자가 분주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화이트).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이제는 행동의 사람 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잠잠히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렸던 느헤미야가 기회가 주어지자 마음의 계획을 펼치고자 분주히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로 향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드디어 유브라데 강 동편에 있는 수산 궁을 떠나 유브라 데 강 서편에 있는 유다를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렀 습니다(9절). 그 때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구해서 얻는 조소[“저희로 나를 용 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하는 조서(7절)]를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닥 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그가 요구한 조소뿐만 아니라 그가 요구도 하지 않은 “군대 장관 과 마병”까지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를 보호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아닥사스다 왕이 경의하기를 기뻐하는 자임을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왕의 모든 종들 중 강 서편 총독들까지도 느헤미야를 존경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행동에는 아무 장애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 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10절을 보십시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 라.” 여기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함에 있어서 두 대적들이 나옵니다. 19절에 가서는 또 한 사람의 대적이 나옵니다. 이 셋 중에 주동인물은 “호론 사람 산발랏”이였습 니다. 그의 이름은 바벨론 이름인데 그 뜻은 ‘신(달 신)은 생명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느 헤미야의 대적 자들은 느헤미야를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하려는 사람”이라고 말하 였습니다. 즉, 그들은 느헤미야를 목표를 삼고 실행으로 옮기려고 하는 자로 보았다는 말 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근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느헤미야로 하여 금 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할까 그 때부터 자기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 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다를 지속적으로 컨트롤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37년 후에 산발랏은 ‘사마리아의 총독’이라고 어느 고문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느헤미야의 대적 자들, 특히 주동적인 인물 이였던 산발랏은 자기들이 컨트롤하고 있는 유 다에 느헤미야가 와서 예루살렘 성 등을 재건하므로 주도권을 빼앗길까바 질투하여 느헤미 야를 대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또는 흥왕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Opposition(대적)은 Opportunity (기회) 입니다.’ 어떠한 기회입니까? 바로 기도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 혹은 목표를 다시 점검하는 기회입니다. 인내 혹은 견딤을 시험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 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입니다. 제임스 패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일 이 우리 기도의 질을 반영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 일의 질을 결정합니 다’(패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준비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전도 집회가 있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는 태신자의 영혼을 위하여 중보 기 도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그에게 다가가 교회 전도 집회로 인도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전도 집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천국잔치 가 되도록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마음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해야 합니다. 개인 적으로 태신자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며 교회적으로 전도 집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위기는 기회인 줄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