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1)
[느헤미야 1장1-4절 말씀 묵상]
2003년 12월 21일 주일 오후,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따라 승리장로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2004년 1월, 저는 성경 66권 중 느헤미야서를 택하여 하 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느헤미야서를 택한 이유는 “다시 세우다” 또는 “재건”(Rebuilding)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느헤미야를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승리 장로교회를 다시 세우시는 역사를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길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 문입니다. 특히 저는 기초는 있지만 무너진 성벽들, 혹은 무너져야 할 우리의 “벽”들을 주 님께서 무너트려 주시는 가운데 다시금 “벽”을 세우주시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무너진 혹은 무너져야 할 “벽”들을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 것일까? 제임스 패커(J. I. Packer) 목사님은 그의 책 “신앙의 열정: 느헤미야의 지혜”(A Passion for Faithfulness)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통하여 (예루살 렘 성) 벽을 세웠고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도들을 세웠습니다’(패커). 이 말은 우 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교훈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분의 인도하심 따라 승리장로교회의 “벽”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교훈 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통하여 성도들, 즉 사람을 세우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 은 우리 교회는 교회 건물이나 프로그램(program)보다 한 사람, 한 사람(people)을 세우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통하여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과연 느헤미야는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느헤미야 1장1-4절을 보면 우리는 기도의 사람인 느헤미야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기도의 사람 (1)” 느헤미야를 묵상하는 가 운데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각자의 기도 생활에 동기부여가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까? 이 엠 바운즈(E. M. Bounds)의 “기도의 필요성 (Necessity of Prayer)”이란 책을 보면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믿 음의 청원과 (2) 순종의 기도. 믿음의 청원(the petition of faith)은 말씀 중심의 기도를 말 합니다(롬10:17). 이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습니다. 순종의 기도(the prayer of submission)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기도자의 영혼이 원하는 것을 겸 손하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그 분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바운즈). 이 복종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는 기도는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느1:1, 7)를 생각 해보면 이 엠 바운즈가 말한 두 종류의 기도 중 두 번째인 복종(부탁/의뢰)의 기도인 것 같 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조상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인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대 바사 왕궁 중 수산 궁에서(1절) “왕의 술 관 원”(11절)으로서 섬기고 있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왕의 술 관원이라 함은 지금 말 로 하면 국무총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왕에게 드려지는 술에 독이 들어 있는지 없는지 술을 미리 맛을 보는 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생명을 책임을 지고 있는 중요 한 직책을 가졌던 자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술 관원이라 함은 왕과 같이 앉아서 왕과 국정을 논할 수도 있었던 직책 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 느헤미야 1장 2절을 보면 자기의 형제인 하나니와 유다에서 온 “두어 사람”에게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그가 자기 고향인 이스라엘과 남은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 소식에 대 하여 이렇게 들었습니다: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3 절). 흥미로운 점은 느헤미야의 형제인 “하나니”란 사람의 이름의 뜻은 ‘주님은 은혜로우 시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니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소식을 느 헤미야에게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목사님의 느헤미야 강해(Be Determined) 책을 보면 한 3가지로 느헤미야가 들은 소식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 Remnant(남은 자): 출애굽의 사건의 주인공인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들이 다 살고 있었 던 가나안 땅에는 이젠 다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자들 밖에 없다는 소식, (2) Ruin(황폐):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에 탔다는 소식, (3) Reproach(치욕): 그 남은 자들은 환난을 당하여 능욕을 당하였다는 소식(위어스비).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 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4절). 그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고국의 아픈 소식을 듣고 울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우리는 2 가지 교훈 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얻는 교훈은 고국에 대한 사랑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인 유대 백성들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예루살렘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중심지였던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에 대한 관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에 유다에서 메대 바사로 온 하나니와 두어 사람에게 형편을 물었던 것입니다. 관심 이 없으면 기도가 진실 되게 하나님께 드려지기보다 습관적으로 드리게 될 확률이 많습니 다. 관심을 갖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등등을 알면 좀 더 적 극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마음을 실어 중보기도하게 됩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기 동족들의 모든 형편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자기만 잘 살고 잘 먹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 바로 느헤미야였습니다(이동원). 이 말은 느헤미야는 그 당시 강대국 이였던 메대 바사의 왕의 술 관원으로서 왕이 거하고 있는 수산궁(그 나라의 수도였던 수산에 있었던 여러 궁중에 제일 좋은 궁)에서 왕의 곁에 서 아무 부러움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계속 그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는 이렇게 합리화 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조국의 현실을 걱정해 보았자 뭐 가 달라지겠는가? 나는 여기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등등.’ 그러므로 느헤미야에게는 약 800마일이나 떨어진 고국의 소식을 무시 할 수도 있었습니다(이동원). 그는 충분히 자 기의 지위에 만족하면서 고국의 현실을 외면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는 고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느헤미야는 고국을 사랑하여 중보 기도하 는 기도의 사람 이였기 때문입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조국을 위하여 중보기도 합니다. 기도하되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에 관심을 같고 마음을 실어서 기 도합니다. 그리고 고국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는 사람은 안타까운 고국의 소식을 듣고 그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며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아파하면서까지 조국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상처를 내가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이동원). 느헤미야는 고국인 유다 백성들의 상처를 품고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였습니다.
둘째로,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얻는 교훈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대 사람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앉아서 울고 여러 날 동안 슬퍼하 면서(4절) “아닥사스다 왕”(1절)에게 나아가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4절)에게 나아갔습니 다.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최고의 힘을 쥐고 있었던 나라가 바로 메대 바사였습니다. 그리 고 느헤미야가 모시고 있던 아닥사스다 왕이 전 세계에서 최고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왕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고국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하나님에게 나아가기보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나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 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으로서 아닥사스다 왕보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사람인 느헤미야 는 보이는 그 당시 최고의 힘과 세력을 자랑하는 메대 바사의 왕을 바라보기 보다는 그에게 그 힘과 세력을 허락해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하나 님께 기도로 나아간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은 자가 자신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합니다’(패커). 기도의 사 람이었던 느헤미야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면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왕에 먼저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께 먼저 호소하였습니다. 그 이 유는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을 움직일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셔야 가능하다 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이동원).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자요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국을 사랑하였던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국 예루살렘 성의 황폐 소식과 남은 동족 유대인 들의 능욕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의 상처를 품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을 기도로 움직였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기도의 사람들이 되야 합니 다. 또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아픈 소식을 듣고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 므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의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역사가 시작되길 간절히 기원합니 다.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요나처럼 도망갔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와 인도하심 따라 다시금 승리장로교회로 돌아와서 느헤미야 강해설교 묵상하고 설교하기를 시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