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자들에 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21절]
영국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앨래나 프랜시스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인터넷). 프랜시스는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과 장례 계획을 이야기한다고 말하면서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중 대다수는 실질적으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프랜시스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불평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죽음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에 관한 또 다른 밝고, 희망적인 관점이 있다. 죽음은 많은 것들의 종말을 맞이하게 하겠지만,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랜시스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죽음 이후 약속된 삶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약속받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앞둔 존재로써,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죽음은 실제로 영생으로 인도하며, 죽음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일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이미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희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번역을 비교하면 개역개정은 “자는 자들에 관하여”라고 말씀하고 있고 현대인의 성경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번역이 원어 헬라어의 뜻에 더 맞는가하면 바로 “자는 자들에 관하여”입니다. 그런데 왜 현대인의 성경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라고 번역을 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자는 자들”이란 바로 “이미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1장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가(3절) 죽은 줄을 아시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음: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현대인의 성경)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리 말한 이유는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생각했던 것입니다(13절).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밝히”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13절). 이렇게 성경에선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자를 가리켜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 외에도 몇몇 성경 저자들도 죽은 자를 가리켜 자는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그리 표현하는 것을 사도행전 7장 60절에 볼 수가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서 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외친 후 숨을 거두였다”(행 7:60). 사도 베드로도 죽은 자를 가리켜 자는 자라고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말하였습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현대인의 성경) “예수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소? 우리 조상들이 죽은 이후로 세상은 창조된 그대로 있지 않소?' 하고 말할 것입니다”(벧후 3:4). 죽은 자를 자는 자라고 제일 많이 표현한 성경 저자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 6, 18, 51절에서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현대인의 성경) “그 다음에는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도 망했을 것입니다. … 내가 이제 한 가지 비밀을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지 않고 모두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죽은 사람들을 잠자는 자들로 여러 번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자는 자들”이라고 말하였지만 16절에 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4장 9-12절에서는 “형제 사랑에 관하여” 말한 후 오늘 본문 4장 13-21절에서는 “자는(이미 죽은) 자들에 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5장 1-11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때와 시기에 관하여”, 즉 예수님의 재림 시기에 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자는 자들” 즉 이미 죽은 자들에 관하여 편지를 써내려간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울은 그들이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4:13하).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망 없는 다른 이”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외에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죽은 사람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소망 없는 다른 이들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비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성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소망(희망)없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비신자들처럼 슬퍼하지 않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비신자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합니다(고전 15:32). 그래서 그들은 홍수 시대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눅 17:27) 평안히 쉬고 즐거워합니다(12:19). 그 이유는 그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신자들은 죽음이 끝이고 죽음 후의 세계를 믿지 않기에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죽으면 소망이 없는 슬픔을 겪는 것입니다(살전 4:1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들에게는 소망이 없는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본문 14절부터 왜 슬퍼하지 말아야할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21절 말씀 중심으로 “자는 자들에 관하여”란 제목 아래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지 한 2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진리를 믿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15:12).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13, 15, 16절).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바울이나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은 헛것이요 또한 여러분들의 믿음도 헛것입니다(14, 17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그 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입니다(15절).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죽은 사람들)도 망했을 것입니다(18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제일) 불쌍한 자들입니다(19절). 그러나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3-4절).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거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17장 1-3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평소의 습관대로 회당에 가서 세 주간 동안 안식일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고 증거하였다”(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그들 중 몇 사람이 믿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으며 또 수많은 경건한 그리이스 사람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믿었”습니다(4절).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나 데살로니가전서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나 모두 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미 죽은 사람(성도)들로 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지 않는 소망 없는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13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현대인의 성경) “그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국민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계약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어(고전 15:3-4)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습니다(롬 6:23). 그러므로 이젠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란 바로 “우리 몸의 속량(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롬 8:23).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고전 15:51).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52-53절을 보십시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사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우리는 모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몸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로마서 8장 24-25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마지막 둘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24).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25절).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소망의 인내”,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였습니다(살전 1:3).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렸습니다(10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5절) 이르기 전(예수님 믿기 전)에는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9절). 그러한 우상 숭배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사 선택하시어(1:4) 부르사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2:12). 그러므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 예수님의 강림하실 때 주 예수님 앞에서 바울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19-20절).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의 인내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이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성도의 죽음을 접할 때 소망 없는 불신자들처럼 슬퍼하지 않습니다(5:13). 그 이유는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14절). 더 나아가서 재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성도들이 슬퍼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죽은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14절).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습니다(롬 12:12).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소망의 인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간구하였습니다(3:13). 바울이 이렇게 간구한 이유는 “너희의 거룩함이”(4:2)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3절).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심이기에(7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4:3-5).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해야 합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바울은(1:2-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4장 13-14절에서 이미 죽은 성도들에 관하여 소망 없는 모든 비신자들처럼 슬퍼하지 않게 하고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로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 부터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할 것(16절)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 주님의 재림 때에 먼저 부활한 후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그 부활한 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까? 성경 요한복음 14장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이유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먼저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셔서(14절)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7절). 그리고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산 자들이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이나 모두 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힌 산다는 것입니다(17절).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18절).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있을 때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도 홀연히 변화 받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임을 믿으십시다. 이 확실하고 분명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 약속된 삶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앞둔 존재로써,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성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죽은 성도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살아있는 성도들도 홀연히 변화되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에서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년 6월 3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이미 잠든 형제, 자매님들과 재회하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