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 준비를 해야 할까요?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사도행전 2036-38).

 

 

“암은 힘든 게 아니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병이다”라고 고 김자옥 권사님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이별 준비를 해야겠다.’ 제가 그리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는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제 저를 불러 가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 자신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할 때 항상 이별 준비를 조금씩 해놓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 준비를 해야 할까요?

 

성경 사도행전 20장 36-3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밀레도란 곳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17절) 고별 설교(18-35절)를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장로들과 함께 기도하니까 그들이 다 소리 내어 울면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과 사도 바울의 고별 설교 말씀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 식구와 이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7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 식구에게 항상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18절을 보십시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현대인의 성경)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3년(31절)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이 항상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18절). 과연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으면서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적어도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신실하게 살아왔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있는 3년 기간 동안 그 교회 성도들에게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알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8절). 저는 이 말 속에서 “항상”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도 잘 알 정도로 바울은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있으면서 “항상”, 변함없이, 일관성 있게 또는 신실하게 행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가족 식구와 언제 이별할지 모르겠지만 그 날 그 순간까지 사도 바울처럼 신실하길 원합니다. 진실하신 주님께서 저 같은 불성실한 죄인에게도 행하시는 것처럼 저 또한 그 은혜의 힘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신실하게 살아가되 제가 죽고 나서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저를 생각할 때 ‘내 남편/우리 아빠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항상 일관된 모습으로 살아오셨어’라고 저의 삶의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물론 사랑하는 식구가 저의 불성실함을 제일 많이 보게 되겠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내 남편/우리 아빠가 그나마 일관되게 살아왔는지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도, 내일도, 죽는 그날까지 사랑하는 식구에게 일관된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세상을 떠나도 그들 마음에 저를 통하여 조금이나마 나타난 주님의 신실함 모습을 그들이 기억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19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현대인의 성경) “유대인들의 음모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면서도 나는 언제나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겨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가운데 3년 동안 거하면서 항상 신실하게 행하였던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19절). 그는 주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그 사실을 에베소 교회 장로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18절).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되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가운데 3년 동안 있으면서 어떻게 신실하게 섬겼는지 상기시켜 준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다고 말했습니다(19절). 그는 겸손히 섬겼을 때 괴로운 일이 많았을 텐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일깨워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31절). 그의 눈물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보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이 3년 동안 흘렸던 그 눈물을 보고 기억하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여 신실하게 3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섬겨준 바울의 그 귀한 눈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나 그의 가르침과 훈계는 잘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흘린 그 눈물은 평생 잊지 못하고 마음에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견디는 가운데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섬기므로 주님을 섬겼던(19절) 바울을 생각할 때 작별하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7절을 보면 성경은 그들은 다 크게 울며 바울을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각 사람을 훈계하였던 바울을 떠나보내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다 크게 울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이러한 눈물을 흘리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1987년도 5월 승리장로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흘렸던 세 종류의 눈물인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그리고 헌신의 눈물을 더욱더 흘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도 그 눈물을 보고 성령님의 감동, 교통, 인도하심 따라 눈물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더욱더 결심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할 때 주님 안에서 이러한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이별을 사랑하는 가족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가 저의 죽음을 생각할 때 ‘내 남편/우리 아빠는 평생 주님만을 섬겼어요. 주님을 겸손히 섬기면서 괴로운 일이 많으셨을 텐데도 오래참고 견디시면서 흘렸던 모든 눈물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저도 내 남편/우리 아빠처럼 평생에 주님만을 섬기고 싶어요’ 라고 결심을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큰 은혜요 유익한 죽음입니까?

셋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의 유익을 구하고 싶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20-21절을 보십시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나는 무엇이나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했으며 또 대중 앞에서나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것을 가르쳤고 유대인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3년 동안 있으면서 주님을 섬기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으면서 섬겼습니다(19절). 특히 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20절). 그가 거리낌이 없이 전하고 가르쳤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21절).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한 것입니다(24절). 즉,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27절). 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했을까요? 왜 그는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거리낌이 없어 전하고 가르쳤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랑은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였기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유익을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어느 남편/아버지가 가족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을 더 구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하고자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부양은 저는 남편/아버지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사랑하는 가족 식구를 양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세 자녀를 양육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성경 에베소서 5장 29절과 6장 4절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저는 어떻게 저의 가족을 양육해야 할까요? 저는 제 아내와 세 자녀를 제자 삼아야 합니다. 저는 가정의 영적 교사로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마 28:19). 그렇게 하는 목적은 그녀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물론 그 이전에 제 자신이 매일 매일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돼야겠지요). 그리할 때 저희 부부는 거짓이 없는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벧전 1:22). 또한 저는 제 세 자녀들의 영적 교사로서 그들에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양육하되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엡 6:1).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가(2절) 다른 어른들도 공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제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의 영혼이 범사에 잘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요삼 1:2). 저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제 아내와 세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명에 이끌림을 받고 있는 삶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주 예수님에게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했습니다(22절). 그는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자기에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23절). 리고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자기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24절). 그는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마치려(완성) 함에는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우리가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주님께 두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약속의 말씀은1987년도 승리장로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주님께서는 강사 목사님을 통해서 저에게 주신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고 성령님께서 제 마음을 감동, 감화하셔서 저로 하여금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와 같이 턱없이 부족한 제 인생을 항복하고 주님께 바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목사가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제가 받은 두 번째 약속의 말씀은 2003년도에 한국 교회갱신목회자협의회(교갱협) 수련회 때 주님께서 강사 목사님을 통해서 저에게 주신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입니다. 그 때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I will build my church)란 주님의 말씀을 받은 후 새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를 찬양할 때 승리장로교회를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피 흘려 주님이 사신 사랑하는 승리장로교회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그 해 11월 말에 한국에서 섬기던 서현교회를 사임하고 12월 3일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12월 21일에 승리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까지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을 생각할 때 저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요 6:1-15)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마 16:18).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저의 비전은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가진 일꾼을 세워 파송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저는 가정에서 지도자로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세워야 하며 또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랑하는 교회 식구들을 세워야 합니다. 이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하게 끝까지 잘 감당하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이 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남편/우리 아빠가 주님께 받은 사명에 이끌림을 받아 겸손히 신실하게 잘 감당하다가 그가 그리워하던 주님의 품안에 안겼어요.’

 

다섯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겠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2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현대인의 성경) “이제 내가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고 모든 성도들이 얻는 하늘나라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28절). 그가 그들에게 이리 말한 이유는 바울은 자기가 떠난 후에 외부적으로 사나운 이리들이 에베소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성도들을 아끼지 아니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9절).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내부적으로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 중에서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알았습니다(30절). 그랬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31절). 그런 후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주님과 및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겼습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그가 그리한 이유는 그 말씀이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32절). 상상이 됩니까? 교회 장로들(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인 장로)이 하나 은혜의 말씀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고 있다면 그 교회 양 떼(성도)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외부적으로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믿음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하려는 극심한 유혹 가운데서 온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저는 종종 제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종종하게 된 이유는 한국 서현교회에서 젊은이들 사역을 하다가 미국 승리장로교회로 다시 돌아와 노인 사역을 하면서 그 어르신들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관점을 더욱더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관점으로 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장차 어떠한 죽음을 맞고 싶은지를 깊이 생각하게 될 때에 저는 주님이 주신 사명에 이끌림을 받아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다가 주님 앞으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제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과연 제가 이 세상을 떠나면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의 삶은 어떠할까? 그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텐데 등등 이런 저런 생각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로 사랑하는 제 가족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말씀하고 있듯이 저의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제 가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족을 맡기되 특히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라는 교훈을 받습니다(32절). 그러기 위한 저의 책임은 제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24절)을 전하고 가르침으로 제 식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제가 이 세상을 떠나도 저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든든히 세움을 받아 모든 성도들이 얻는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여섯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탐심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3-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현대인의 성경) “나는 그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나와 내 일행이 필요한 것을 손수 벌어서 썼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나는 그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나와 내 일행이 필요한 것을 손수 벌어서 썼습니다”(33-34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탐심을 자극하는 물질의 유혹이 많아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혹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하게 한 은장색 데메드리오(19:24)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돈으로 유혹 할까봐 바울이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을까요? 혹시 그것이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 있으면서 받았던 “여러 가지 시험”(20:19) 중에 하나는 아니었을까요? 만일 그러한 시험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있었더라면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든든히 서 있으므로 자기처럼 그러한 탐심의 유혹에 넘어가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지 말라(골 3:5)고 충분히 권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에베소 교회 모든 성도들도 자신들의 장로들의 탐심이 없는 모습을 보고 탐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바울처럼 열심히 일해서 손수 벌어서 쓰는 것이 아니었을까요?(행 20:34) 무엇보다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진정으로 자기들의 이웃인 에베소 교회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모세의 십계명에 명하고 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처럼 부지런히 일을 하여 손수 돈을 벌어서 썼을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돈에 탐심이 없이 깨끗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귀한 모범된 신앙생활입니까?

 

약 19년 전 아버님에게 상담을 요청하여 저의 고민을 나눴을 때 아버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물질을 초월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내와 장모님과 함께 결혼 예물인 가구들을 사려고 보러 다닐 때였습니다. 장모님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맏딸인 아내의 결혼을 약 10년 동안 기다려 결혼시키려고 준비하셔서 저희 부부에게 결혼 예물로 가구를 좀 비싼 것으로 사주시길 원하셨는데 제 아내가 너무 비싸다고 하면서 저렴한 가구를 사고 싶다고 하여 두 모녀가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두 자매님 사이에 제가 끼어 어찌할 바를 몰라 제 아버님에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쭙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결국에는 장모님이 이기셔서(?) 저희 부부에게 과분한 가구를 사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서 아내가 어떻게 전도사가 갈비를 먹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저에게 말한 것입니다 ㅎㅎ. 아마도 아내 입장에서는 전도사가 비싼 갈비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그렇지만 결국에 저는 갈비를 먹었습니다. 검소하게 산다는 것, 물질을 초월해서 산다는 것, 물질의 유혹에서 자유를 누리는 마음, 탐심이 아닌 주님 한분만으로 자족하며 살아가는 삶, 바울처럼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고 싶습니다(빌 4:11-12). 그러므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주님 한분만으로 자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욕심을 내지 않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제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가 ‘내 남편/우리 아빠는 탐심(욕심)이 없이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면서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시다가 잠드셨어’라고 생각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일곱째로, 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모본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현대인의 성경) “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열심히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모본을 보여줬습니다. 그가 탐심을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은 주 예수님의 말씀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심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35절). 그랬기에 바울은 탐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손으로 열심히 일하여 자신과 자신의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4절).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35절). 이러한 모본을 보였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들도 자신의 모본을 본받아 열심히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35절).

 

저는 제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복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앞모습보다 뒷모습으로, 말보다 행동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인지 사랑하는 저의 세 자녀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아빠의 뒷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진리의 모본”(롬 2:20)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저는 눈을 감아도 사랑하는 자녀들은 영의 눈을 뜨고 저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벧전 2:21). 특히 일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열심히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므로 사랑하는 가족 식구에게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가족 식구의 마음의 새겨진 저의 발자취로 말미암아 그들도 그 발자취를 따를 수 있길 기원합니다.

 

이번 주 TV 뉴스에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소식 하나를 접했습니다. 9/11 사건으로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한 미국 여자(Josephine Smith)가 아버지가 죽은 13년이 지나서야 자기의 아버지의 발자국(her father’s footsteps)을 따라서 시험과 고된 훈련 과정을 다 마치고 뉴욕시 소방관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두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그 Smith라는 소방관이 소방관 모자와 옷을 입고 어느 빌딩 사닥다리 위해서 환하게 미소를 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장면은 그 여자의 죽은 아버지의 사진입니다. 그 아버지의 인상이 참 좋아보였습니다. 47살 때 9/11 사건으로 사망했으니까 그 때 Smith라는 그의 딸은 고등학생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때 사춘기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했으면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를 이어서 자기도 소방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본받아 소방관이 되어 뉴욕시를 섬기는 Josephine Smith란 여인을 생각할 때 저 또한 제 사랑하는 세 자녀들에게 더욱더 본이 돼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 습관화함으로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모든 탐심을 계속해서 버리면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한 주님이 주신 사명에 이끌려 겸손히, 신실하게 오래 참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뒷모습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에게 유익되길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면서 주님 부르시는 그 날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므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좇을 수 있는 아름다운 발자취를 그들의 심비에 남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인 딜런과 예리와 예은이를 생각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11월 21일. 나에게 본이 되시는 양가 부모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