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왕은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에 못 이겨 성문 위에 있는 누각으로 올라가서 울며 부르짖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이고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사무엘하 1833).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자녀를 바라보고 있노라 하면 가엾고 불쌍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랑하는 자녀 대신 고통을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 자녀 대신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 자녀 대신 힘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8장 33절을 보면 마음이 심히 아파하는 다윗 왕이 나옵니다. 그의 마음이 심히 아팠던 이유는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28, 31-32절). 그래서 다윗은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에 못 이겨 성문 위에 있는 누각으로 올라가서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이고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33절,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들은 다윗의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을 겪어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 첫째 아기 Charis (헬라어로 ‘은혜’라는 뜻)를 중환자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품에 앉아보고 통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통곡하다가 제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너무 마음이 슬퍼서 큰 소리 내어 울고 또 울었습니다. 특히 저는 제 아이가 저의 죄 때문에 제 대신 죽었다(12:14, 18)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죄책감이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그 아이가 아니라 제가 마땅히 죽었어야 할 죄인이었는데 말입니다. ㅠㅠ 아버지 다윗은 가슴을 찢는 듯 한 슬픔에 못 이겨 이렇게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이고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18:33, 현대인의 성경). 다윗은 자기가 아들 압살롬을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부모의 심정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평생 우리 마음에 그 자녀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면서 아직도 너무나도 생생한 그 때 그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추억들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 ‘그 때 차라리 내가 그 자녀 대신 죽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는 다윗의 이 울부짖었던 내용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관계에서 다윗이 무엇을 어떻게 했더라면 압살롬이 이렇게 죽는 일이 안 생겼을까?’ 그래서 저는 이번 주 내내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다윗과 압살롬에 관한 성경 말씀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아버지 다윗이 그 때 그 때 이 3가지를 잘했더라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이렇게 죽기까지는 안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로, 만일 아버지 다윗이 그 때 공의롭게 행했더라면입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 암논이 다른 아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강간했을 때(13:14, 현대인의 성경) 심히 노하기만 했지(21절)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암논은 다말을 욕되게 하는 어리석은 일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12절) 다윗은 아버지로서 암논에게 아무 사랑의 책망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러한 죄악을 범한 아들 암논에게 아무 책망도 하지 않은 것일까요? 만일 그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더라면 그를 징계해야 하지 않았나요?(히 11:7) 그것이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었나요? 강간을 당한 다말의 입장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다윗을 어떻게 생각했었을 까요? 특히 자기의 딸을 다말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14:27) 자기 여동생을 사랑하였던 압살롬의 입장에서 자기 여동생이 배 다른 형제 암논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자기 집에서 처량하게 지내는 모습(13:20)을 보고 있었을 때 그의 아버지 다윗을 어떻게 생각했었을까요? 혹시 그는 ‘아니 아버지가 되어가지고 내 여동생이 이런 엄청난 충격적인 일을 당했는데도 아버지는 그냥 심히 노하기만 하고 암논에게 아무 징계도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가정의 가장이면 가정에서 공의를 행하므로 가정의 질서와 평화를 지켜 나가야 하지 않나요? 왜 다윗은 심히 노하기만 하고 암논에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그는 자기가 과거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동침한 죄가 생각나서 그랬을까요?(11:4) 자기도 목욕을 하고 있었던 밧세바가 심히 아름다워 보여(2절) 그녀가 유부녀인줄 알면서도(3절) 동침하였기에(4절) 자기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13:1) 다말을 자기의 센 힘으로 그녀를 덮쳐 강간하였는데 불구하고(13:14, 현대인의 성경) 아무 말도, 책망도 하지 못한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다윗 자기 입장이고 강간을 당한 다말의 입장이나 그의 오빠인 압살롬의 입장은 어떠했겠습니까? 처량하게 오빠의 집에서 살고 있었던 다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을 강간하여 악을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쫓아 보내는 더 큰 악을 범한 암논(16절)을 미워하여 그와 일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 미움 속에서 압살롬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복수였습니다. 압살롬은 2년 동안이나 암논을 죽이려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23절). 누구 책임입니까? 제 생각엔 아버지 다윗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다윗이 자기의 아들 암논이 자기의 딸 다말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기만 하지 않고(21절) 공의롭게 행했더라면 압살롬이 암논을 향하여 2년 동안이나 그를 죽이려고 복수의 칼을 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내 여동생을 강간한 암논에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의 책망도 하지 않으므로 암논은 같은 왕궁에서 아무 일 없었듯이 평안히 사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면 그 때 압살롬의 마음은 어떠했었을 까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세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그들이 어렸을 때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It’s not fair”(공평하지 않아요)였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저희 집 막둥이가 저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 아이만이 저에게 직설적으로 할 말을 하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ㅎㅎ 얼마 전에도 막둥이는 저에게 언니는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자기도라는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막둥이의 핵심은 아빠가 언니와 자기에게 공평하게 대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제 생각엔). 그래서 제가 그 아이의 언니에게 허락했듯이 막둥이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했습니다. 아빠인 제 입장에서 될 수 있는 데로 세 자녀들을 동일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특히 막둥이 딸이 어릴 때 제가 그림 성경책도 읽어주고 그랬는데 첫째 딸에게는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요즘은 첫째 딸하고 많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딸들을 균형 있게 사랑케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는 맏아들은 제가 금요일과 주일에 학교에서 아들을 데리고 오고 또한 데려다 주면서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토요일 오후에는 아들과 그의 친구들과 같이 농구할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세 자녀들을 균형 있게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세 자녀들 각자는 저의 그 마음과 노력을 달리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세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제가 세 자녀들을 함께 징계한 것입니다. 누구는 징계하고 누구는 그냥 넘어가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리했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달리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 속에서 만일 아버지 다윗이 암논을 속히 사랑으로 징계했었더라면 압살롬의 마음이 그리고 2년 동안 암논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복수의 칼을 갈지 않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암논을 향한 압살롬의 미움의 싹이 마음에 자라나지 않도록 아버지 다윗이 공의롭게 대처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둘째로, 만일 아버지 다윗이 그 때 좀 일찍 찾았더라면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쫓아 내버린 암논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결심)하고(삼하 13:32) 2년 동안이나(23절) 복수의 칼을 갈다가 결국에 가서는 암논을 죽입니다(23-29절). 그리고 나서 압살롬은 도망하여(34절)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가서 그술에서 살았습니다(37절). 거기서 산지 3년이 되었을 때(38절, 현대인의 성경) 요압 장군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이 압살롬을 향하여 그리워하는 것을 알고(39절, 14:1) 지혜로운 여인 하나에게 다윗 왕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2절, 현대인의 성경) 그녀로 하여금 다윗 왕에게 나아가게 하여 말하게 하므로(4-20절) 결국에는 다윗 왕이 요압에게 가서 압살롬을 데려오는 것을 허락 받았습니다(21절). 그런데 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분명히 성경은 다윗 왕의 마음이 아들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였고(13:39) 또한 그에게로 향했다(14:1)[그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그리워하고 있었다(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다윗은 압살롬이 그술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3년째 살고 있었는데 그 때에도 찾고 있지 않고 있다가 마음으로만 그를 그리워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망간 자식을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면 아버지로서 그 자식을 속히 찾았어야 했지 않았나요?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면 모든 힘과 능력과 사람들을 동원해서 도망간 자식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는 마음으로만 도망간 자식을 그리워하였을까요? 결국 그술로 도망간 압살롬을 3년 만에 찾은 것도 다윗 자신이 아니라 요압 장군이 먼저 나서서 다윗 와의 허락을 받아 찾은 게 아닌가요? 어느 아버지가 집 나간 자식을 찾지 않고 마음으로만 그리워할까요? 혹시 그 아버지는 마음으로 그 자식을 용서하지 안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암논을 죽인 압살롬이 마음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아서 다윗은 그를 안 찾은 것이 아닐까요? 자기는 목욕하는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유부녀 밧세바에 대해서 알아보게 하려고 사람을 보냈던 다윗이 어떻게 자기 동생을 강간하고 쫓아버린 암논을 미워하여 죽이고 그술로 도망간 압살롬은 3년이나 사람을 보내 알아보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을까요? 자식을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으로만 그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는 충분히 그 자식의 마음에 상처와 쓰라림과 아픔을 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하는 첫째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 지금 대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차로 한 45분 거리에 있는 학교래서 제가 금요일마다 아들을 데리러 학교에 갔다가 주일 저녁에 다시 학교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처음에 아들이 대학교 기숙사로 떠났을 때 저는 집에서 그 아들의 빈방을 보면 제 마음이 좀 허전(?)했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집에서 지냈던 기간이 18년이나 되어서 그런지 18면 만에 독립하여 집을 떠난 아들을 생각할 때 이런 저런 그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특히 아들이 대학 기숙사로 들어간 다음부터 집에는 여자 세 명(아내와 두 딸들)만 있으니까 아버지로서 아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ㅋㅋ (실제로 저는 막둥이 딸에게 아내 앞에서 그리 말했음. 첫째 딸도 거실에 있으면서 제 말을 들었음 ㅋㅋ). 만일 제 아들이 대학교를 가느라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기 여동생 중 한명을 죽이고 도망갔다면 저는 아버지로서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그리 상상해 본 이유는 아버지 다윗의 심정을 좀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 다른 형제라 할지라도 자기 형제인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간 압살롬을 향하여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아버지 다윗처럼 저 또한 도망간 제 아들을 마음으로 그리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저는 다윗처럼 제 아들을 그리워만 하고 찾지 않을까 아니면 찾을 것인가 라고 생각해 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3 비유 중 잃어버린 양 비유나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를 보면 저는 도망한 아들을 간절히 찾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아들 비유(탕자 비유)를 생각하면 저는 아들을 찾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도 들긴 합니다. 물론 이 기다림의 전제도 잃어버린 아들을 아버지가 찾고 찾다가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마음은 죄를 범하고 도망간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자식을 찾고 찾는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 찾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이 알 때에 아버지를 향한 그 자식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내 아버지가 나를 찾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자녀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충분히 그 자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와 쓰라림과 아픔을 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만일 아버지 다윗이 그 때 용서했더라면입니다.

 

2년 동안 암논을 죽이고자 복수의 칼을 갈았다가 마침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갔었던 압살롬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14:23). 그런데 아버지 다윗은 3년 만에 돌아온 아들 압살롬을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24절). 즉, 다윗은 압살롬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어느 정도로 다윗은 압살롬을 보고 싶지 않아했냐면 그는 압살롬을 2년 동안이나 보지 않았습니다(28절). 아니 아무리 자식이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할지라도 3년 동안 못 보던 그리워하던 자식이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는데 허락했으면 즉시 아들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얼마나 압살롬의 얼굴이 보기 싫었으면 예루살렘에 있는 압살롬의 얼굴을 2년 동안이나 안보고 살 수가 있습니까? 도합 5년이 아닌가요?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에서 3년 살 동안도 다윗은 압살롬을 보지 못했는데(‘안했는데’ 란 말이 더 적합한 듯)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 아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2년 동안이나 못 보게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왜 그리도 자식의 얼굴을 보기 싫어했던 것일까요? 말이 5년 동안 자식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지 실제로 요압이 압살롬을 향한 다윗 왕의 마음을 알고 그의 허락 아래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5년 보다 더 오랫동안 자식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가 요압의 밭을 불 질러서라도(30절) 요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2년 만에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요압에게 “내가 차라리 그 곳(그술)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좋을 뻔하였소”라고 말한 것입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아들 압살롬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잔인한 조치입니까? 3년 만에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자기 아버지 다윗이 자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2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보게 하였으니 말입니다. 아니, 자식의 얼굴을 보기 싫었으면 뭐 하러 그술에 살고 있었던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리고 온 것입니까? 그럴 바에 압살롬을 그냥 그술에서 계속 살도록 내버려두던지 말입니다. 왜 다윗이 마음으로 압살롬을 그리도 간절히 그리워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신하 요압이 알 정도로 다윗이 그리도 압살롬을 그리워한 것을 보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것 같은데 자식을 찾을 생각도 안하고, 만일 했다 할지라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고 있었던 아버지 다윗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압살롬을 보지 않을 것이면 왜 요압에게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허락한 것일까요? 아예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압살롬은 계속해서 그술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리했다면 2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자기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는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다윗이 제일 값을 많이 치른 죄는 아들 압살롬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피터슨). 다윗은 같은 예루살렘 왕궁에 있으면서도 약2년 동안 자기 아들 압살롬과 거리를 두고 그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이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12;13) 자기도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즉시 용서했었더라면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고까지(16:11)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2년 만에 자기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보고 그 뒤로 4년 동안(15:7)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여(6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의 인심을 다 자기에게로 돌려(13절) 이렇게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자식을 용서하지 않는 죄의 결과는 결국 자식의 생명을 잃게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부모는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자녀를 바라볼 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듭니다. 그 자녀가 가엽고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고통당하는 자녀 대신 부모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라도 부모는 자기 자식이 더 이상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또한 부모의 마음은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것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특히 그 자녀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죄책감의 고통은 각자 겪어본 부모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다윗의 마음은 심히 아파 슬픔을 못이길 정도였습니다(18:33). 그 이유는 그는 그 자녀의 죽음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슴을 찢는 듯 한 슬픔에 못 이겨 이렇게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이고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33절, 현대인의 성경). 아버지 다윗은 아들 압살롬 대신 자기가 죽었더라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압살롬이 죽은 후이기에 다윗은 아무리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겠지만 그는 자신과 아들 압살롬과의 관계를 뒤돌아보면서 적어도 이 3가지 생각은 했어야 했습니다: (1) ‘내가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을 당하고 내어쫓김을 당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심히 노하지만 말고 공의롭게 암논의 죄악을 징계했더라면 압살롬의 마음이 나를 향하여 불만이 없었을 텐데’, (2) ‘내가 그술로 도망간 아들 압살롬을 좀 더 빨리 찾았더라면 그가 3년 동안 나를 향하여 상처와 쓰라림과 원망 가운데 살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3) ‘내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2년 동안 그로 하여금 내 얼굴을 2년 동안 못 보게 하지 않고 돌아왔을 때 즉시 용서를 했다면(그리고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그가 4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나를 죽이려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버지 다윗의 군대와 전투하다가 죽은 압살롬을 향하여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 아이고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33절)라고 울부짖었던 다윗을 생각할 때 저는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마27:46, 막15:34).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 죄인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영원히 죽어야 하는데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그 부르짖음을 듣고 계셨던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었을 까요? 그리 부르짖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혹시 ‘내 아들 예수야, 내 아들 내 아들 예수야, 내거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이고 예수야,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에 못 이겨 울 으시면서 부르짖지는 않으셨을까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년 4월 14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세 자녀들에게 공의와 공평을 행하며, 부지런히 찾으며 또한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듯이 그 세 자녀들을 용서하며 또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가 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