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 당할까봐 두려워한 이삭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창세기 266-7).

 

 

어제 미국에 와서 제일 먼저 알게 된 친구의 아들이 암 투병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놀랬습니다. 그 친구의 아들이 아직 어릴 텐데 이렇게 암에 걸려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중환자실에 있었던 제 첫째 아기도 생각이 나서 저는 그 친구에게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감사했던 것은 그 친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므로 귀한 신앙 고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혼자 기도하는 시간에 이 친구의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제 친구와 제 친구의 부인 자매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든 생각은 지난주에 찾아뵌 암 투병 중인 노회 선배 목사님의 아버님도 생각났습니다. 제가 병원에 찾아뵈었을 때 그 아버님은 누워계신 아드님 목사님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시면서 또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는데 그 아버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버님이 하신 말씀 중에 현대 의학이 많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암은 극복을 못하는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든 생각은 암 수술과 치료 후 회복 과정에 있는 사모님이 생각나면서 선교사님이셨던 부모님도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는데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자매는 지금 검사를 확실하게 받아봐야 하겠지만 암 증상들이 있는데 부모님과 인연을 끊고 산지가 오래되어 아무 식구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암으로 죽음 앞에까지 가 보신 사랑하는 선배 목사님이 지난주에 카카오톡으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가 죽음 앞에 서 보니까 명예, 높은 직책, 돈, 큰 숫자 … 별거 아니더라고요. 큰 목회, 큰 목사, 목회성공이라는 용어자체가 너무 잘못인 것 같아요. 가치 있게, 깊이, 행복하게 살고 일하고 가는 게 최고란 것을 암을 통해 선물로 주셨어요.”

 

만일 저와 여러분이 암이 걸려 죽음 앞에 서 본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여러분은 그 와중에서도 제 친구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창세기 26장 6-7절을 보면 죽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이삭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왜 그는 죽임 당할까봐 두려워했냐 하면 그 이유는 자기 아내 리브가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7절). 아니 어떻게 아내가 아름다워서 남편인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는지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남편인 이삭의 입장에서 그 당시 상황을 좀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때 이삭과 리브가가 살고 있었던 곳은 그랄이란 가나안 땅 남쪽 경계선의 서남쪽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6절, 인터넷). 그리고 그 도시는 불레셋 왕 아비멜렉이 다스리던 도시였습니다(8절). 이삭이 리브가와 함께 그랄로 이주한 이유는 바로 흉년 때문이었습니다(1절). 흥미로운 점은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때에도 흉년이 들었었는데 이삭 때에도 또 흉년이 들므로 이삭은 그랄로 이주한 것입니다(1, 6절). 그런데 흉년이 들었을 때 이삭은 처음부터 그랄로 이주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절). 이 말씀을 보면 아마도 이삭은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명하시면서(2절)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3-4절).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께 이 축복의 약속 말씀을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로 이주에서 거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아내인 리브가가 아름다우므로 그 곳 사람들이 그녀를 탐내서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리브가를 자기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7절). 그래서 그는 그 곳 사람들이 자기 아내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 “내 아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녀는 “내 누이”라고 말했습니다(7절). 아니, 이삭은 리브가는 분명히 자기 아내인데 어떻게 “내 누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가 그랄에서 오래 거주하였던 것을 보면(8절) 이삭은 오래 동안 그 곳 블레셋 사람들을 속여서 자기 아내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 아내를 누이처럼 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좀 알 수 있는가하면 8절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 말씀은 이삭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걸리기 전까지는 그랄에서 오래 거주할 동안 그곳 사람들이 못 보게 자기 아내를 껴안고 아내처럼 대하였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자기 누이처럼 대하였던 것을 좀 짐직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모습을 생각하면 아니 어떻게 남편이 되어가지고 아리따운 자기 아내가 그녀를 탐하는 그곳 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가 성폭행 당하던지 강간당하던지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자기가 자기 아내 때문에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말입니까? 그 정도로 이삭은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와 한 몸인 리브가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랄에 사는 블레셋 사람들을 속여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면서 오래 동안 이중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를 껴안았다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걸린 것입니다(8절). 그래서 아비멜렉 왕은 이삭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9절). 그 때 이삭의 대답은 “내 생각에 그(녀)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 이로라”(9절).

 

이것이 바로 이삭의 생각 이였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3-4절) 이삭은 그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신 언약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의존하여 죽지 않고 살고자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면서 살다가 아비멜렉 왕에게 들통이 난 것입니다(8절). 아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4절) 하나님께서 이삭이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 때문에 그랄에 사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은 그 일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생각대로 아름다운 리브가를 탐하여 이삭에게 뺏고자 이삭을 죽이려고 한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는 보고만 계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삭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하고 죽을까봐 두려워하여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좋아하는 거짓말을 하면서 오랫동안 그랄에 거주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속이면서 살았을까요? 그것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할 말이 없는 것이 그 또한 그랄에서 자기 아내 사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생각하여(20:11)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2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부전자전인가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는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므로 그 해에 백배의 결실을 얻었고 점점 번창하여 마침내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12-13절, 헌대인의 성경). 그에게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아진 것입니다(14절). 그곳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할 정도로 말입니다(14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의지하여 거짓말을 하고 다른 이들을 속이면서 오랫동안 살았던 이삭에게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신 하나님은 불신하고 불성실한 이삭에게도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우리도 이삭처럼 죽임 당할까봐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삭처럼 거짓말을 하며 다른 이들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랫동안 말입니다. 결국 우리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진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잠 3:5). 또한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고후 5:7). 만일 우리가 우리 명철을 의지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암이라는 질병이 걸렸을 때 이 질병으로 죽을까봐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들이 암이 걸린 제 친구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므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주위 사람들에게도 고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삶에 흉년(기근)과 두려운 상황에 우리가 놓인다 할지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히 12:2)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말하고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탄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