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죽음

 

 

 

"여호와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소중하게 보신다”(시편 11615, 현대인의 성경).

 

 

고 안덕일 전도사님, 지난 주 토요일(2016년 11월 19일) 오후 12시에 하나님께 임종 예배를 드린 후 가족 식구들이 있는 가운데서 고이 잠드셨습니다. 따님인 진경 자매가 오후 3시 14분에 저에게 카카오톡으로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숨 거두셨어요 편안히 하나님 곁으로 …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경 자매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고이 잠드셨으니 감사하자.” 저는 그 소식을 접한 후 우리 교회 식구들 카톡 방에다가 전도사님의 잠든 소식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약 10분 후 선교지에 계신 원로 목사님께서 고 안덕일 전도사님을 생각하시면서 교회 카톡 방에 이렇게 글을 남기셨습니다: “조가 480장 조시 시편 116편 15절 많은 위로주소서(살전 4장 13절로 18절).” 그래서 저는 오늘 고 안덕일 전도사님의 입관예배 설교 본문을 원로 목사님이 주신 조시인 시편 116편 15절로 정하고, 설교 후 찬송을 원로 목사님이 말씀하신 조가인 480장(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은 하관예배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제가 그리한 이유는 저보다 원로목사님께서 안 전도사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위하여 멀리서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엊그저께 안 권사님과 진경 자매가 장례 준비하러 여기 한국 장의사를 왔다가 교회에 잠깐 들리셨습니다. 그 때 저는 안 권사님을 통해서 언제, 어떻게 안 전도님과 권사님이 저희 교회에 나오시기 시작했는지 등을 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희 교회에선 원로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면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신학교에 안 전도사님과 권사님이 다니셨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분이 저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22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고인을 “안 전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안 권사님을 통해서 고 안 전도사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 의식이 있으셨을 때 하신 말씀 중에 전도사님이 사랑하시던 저희 승리장로교회를 생각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는 오늘 고 안덕일 전도사님의 입관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시편 116편 15절 말씀 중심으로 “성도의 죽음”이란 제목 아래 고 안 전도사님이 사랑하시는 유가족 식구 분들과 우리 승리 식구들과 여러분 조문객들에게 우리가 명심해야 할 3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전도서 7장 2절을 보십시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으니 살아있을 때 이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현대인의 성경). 이 진리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마음에 깊이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살기에 급급해서인지… 심지어 우리는 죽음을 좀 가볍게 여기는 경향도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사망의 위험”과 “무덤의 공포”를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시 116:3). 그 좋은 방법이 바로 전도자가 말한 것처럼 잔치 집보다 초상집, 즉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가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례식을 참석할 때 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서 입관예배 때는 제 자신이 관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과 하관예배 때는 무덤에 묻히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그리 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이 땅에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시편 기자처럼 “내가 이 생존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리라”라는 결심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소중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116편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소중하게 보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소중(귀중)하게 보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눈에 성도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사 43:4). 어떻게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이 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존귀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고 의롭다 칭하시사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께서 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내가 어떻게 보답할까?(12절)라고 고민하면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신실하게 섬겨야 합니다(16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로 경배를 드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받쳐 헌신하여(17절)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9절).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다시는 죽음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21장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현대인의 성경). 고 안 전도사님은 약 22년 전인 1994년부터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 분은 투석을 시작하셨다가 약 11전에 콩팥 이식수술도 받으셨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질병으로 아프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 금요일 점심 즘에 전도사님이 의식이 있으셨을 때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으로 전도사님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주님의 품안에 안기시며 더 이상 아픈 것이 없으시고 고통에서 자유를 누리실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도사님이 숨을 거두신 후 따님인 진경 자매가 카카오톡으로 … “마지막 아빠에 모습, 평화로운 모습이었어요”라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진요. 이집트에서 선교하고 계시는 김창민 집사님은 교회 카카오톡 방에 이렇게 글을 남기셨습니다: “승리장로교회 모두 존경스러우신 분이지만, 안 전도사님 병과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천국의 소망을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고 안덕일 전도사님은 이젠 시편 기자가 자신에게 “내 영혼아, 이제 너는 안식하여라. 여호와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푸셨다”(7절)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의 죽음은 귀중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 후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1절)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2절) 너의 등불 밝혀있나 기다린다 신랑이

천국 문에 이를 때에 그가 반겨 맞으리

(3절) 기다리던 성도들과 그 문에서 만날 때

참 즐거운 우리모임 그 얼마나 기쁘랴

(후렴)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만나보자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새 찬송가 480장, “천국에서 만나보자”)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성도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