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는 기회의 장소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종종 광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광야를 지나 우리는 진정한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천국에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이 와도 참고 견디며 인내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우리는 가끔 너무나 힘들고 괴로울 때 세상 사람들을 질시할 때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고난을 당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고난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 속에서 세상을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 볼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데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어떻게 저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데 저렇게 이 세상에서 성공에서 풍부하게 살아가는지 우리는 의아해 하면서 그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섞여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본받아 그들처럼 이 땅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닌데도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 집인 것처럼 땅에 것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을 광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을 천국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성경 민수기 20장 4절을 보면 광야의 40년 생활 가운데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다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옵니다(민20:1-3). 이들은 모세에게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하였도다”(3절)라고 말하면서 ‘왜 우리들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들과 우리들의 짐승으로 다 죽게 하였는냐(4절)고 하면서 원망의 소리를 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고 불평했습니다(5절).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감사하기는커녕 이렇게 불평 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더 이상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쳐 가야 할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광야”(4절)를 “악한 곳”(5절)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 곳(광야)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5절). 그들이 원하는 이것저것이 없기에 광야는 그들이 보기에 악한 곳이었습니다. 과연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악한 곳입니까? 결국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를 들은 후 총회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렸습니다(6절).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6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아론의 지팡이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셨습니다(8절). 그러나 모세는 총회를 반석 앞에 모으고 그들에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10절)고 분노와 원망의 소리를 내면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10절) 손을 들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11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많은 물을 솟아나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물을 마셨습니다(11절). 그리고 “이를 므리바 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기 때문입니다(13절). 그러나 모세와 아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곧, 모세와 아론의 범죄는 불신과 불성결이었습니다(박윤선). 그 결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다(12절). 이렇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인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광야란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악한 곳입니까?
광야란 곳은 절대로 악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란 곳은 선한 곳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광야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며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또한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광야라는 곳에서 먼저 우리의 죄악들이 들춰져야 합니다. 우리의 불신이나 불성결이 들춰져야 합니다. 우리의 다툼과 원망 및 대적한 죄악 된 행위도 들춰져야 합니다. 또한 탐심과 욕심의 죄도 들춰져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하박국 3장 17-19절과 같은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
우리는 광야에서 이것저것 없는 것에 대한 악평을 할 것이 아니라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찬송가 102장). 우리는 광야에서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광야만큼 이 비결을 배울만한 좋은 곳은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찬송가 82장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 나의 진정 사모 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우리는 광야에서 우리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님뿐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참 기쁨이요 소망이요 생명이 되심을 우리는 광야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고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스스로 광야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반가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광야만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배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신8:3).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즐기는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이 살고 또한 소성케 돼야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의 넘치는 생수의 강을 체험해야 합니다(요7:38). 우리는 광야에서 성령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우리는 진정한 약속의 땅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더 이상 궁핍함이 없고 또한 더 이상 목마름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살 것입니다.
광야에서 빚어지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