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기회입니다.

 

 

 

저는 2008년 1월에 벌써 장례식에 두 번을 참석했습니다. 그것도 일주일 사이로 말입니다. 저는 두 장례식을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전도서 7장 2절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결국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이것을 산 자인 제가 유심하는 가운데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사랑하는 셋째 삼촌이신 김창혁 목사님께서 담당 의사에 의하면 2-3주 남았다는 소식을 접한 후 다시금 전도서7장 2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산 자로서 유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드는 마음은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도전입니다.

 

왜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유익이 있겠지만 3 가지만 나눕니다.

 

첫째로,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인간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인정하므로 더욱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저는 두 장례식 다 참석하면서 다시금 느꼈던 것은 인간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약4:14). 죽음 앞에서 우리 인간이 무능력해 보이고 무기력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장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유명하고 부자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저 같은 젊은 사람은 더욱더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 그래야 좀 인간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노력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저는 제 힘을 좀 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제 힘을 빼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서 장례식에 가고 싶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좀 초라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좀 철저히 초라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가오는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면서 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사화복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장례식을 통해서라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주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죽음의 관점으로 자기 자신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송가 342장(“어려운 일 당할 때”)을 종종 즐겨 부릅니다. 그 찬송가 1절 가사와 후렴은 이렇습니다: (1절)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후렴)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즘 사랑하는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통해서라도 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저로 하여금 더욱더 주님만을 의지케 하고 계십니다. 저는 세월 지나갈수록 늙어가고 병이 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접하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욱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인생을 뒤돌아보길 원합니다.

 

둘째로,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순간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 손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채우려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 참여하게 되면 다시금 자극을 받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우리는 장례식 때 마음먹고 결심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다시금 우리 손에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쉼이 없는 분주한 생활을 합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빈손으로 무덤에 들어갈 것인데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장례식을 통하여 죽음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앞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 땅 위에서의 사는 날 동안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 것을 생각하기보다 위에 것을 생각하게 되며 순간적인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님을 깨닫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그 천국을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죽음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볼 때에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세상 것들이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자 솔로몬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다 지나간 후에 오직 영원한 것만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모하며 추구하던 순간적인 것들에게 더 이상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내려놓기를 배웁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진정으로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위하여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영원한 말씀대로 영원한 사랑으로 영원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고자 다시금 결심하게 됩니다.

 

저는 흙으로 왔다가 다시금 흙으로 돌아가는 사랑하는 이들의 시신이나 그 시신을 담은 관을 보면서 제 자신의 죽음과 장례식을 생각하곤 합니다. 과연 성경 전도서 7장 1절 말씀처럼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낮다고 전도자 솔로몬 왕은 말하였는데(1절) 과연 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사람들의 마음에 “김지원” 또는 “제임스 김”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게 느껴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과연 그들의 마음에 제 이름을 생각할 때 ‘김지원/제임스 김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다가 그가 사모하는 영원한 곳으로 갔다’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 있을까도 상상해 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도 다가오는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있는 자 같이 삽니다(엡5:15). 그 한 예로 지혜로운 사람은 술 취하면서 방탕한 것을 좇지 않습니다(18절). 그 이유는 그는 그러한 삶이 어리석은 삶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7절). 그는 때가 악함을 알고 세월을 아낍니다(16절). 그리고 그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힘씁니다(17절). 그러기에 그는 성령 충만하여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19절). 또한 그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20절).

 

흘러가는 세월은 너무나도 빠르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깨닫는 것이 삶의 이치인가 봅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실을 무시하고 허송세월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세월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아낄 수 있습니까? 장례식에 참석하여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평생 살 것처럼 분주하게 살다가도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해서는 적어도 한 번쯤은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의 종착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끝마쳐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장례식도 그리 멀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도토리 키 재기 차이일 뿐입니다.

 

제 나이 벌써 40이 되었습니다. 평균 삶 수명이 7-80이라면 저는 이미 반은 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언제 저를 불러 가실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왠지 저는 요즘 하루하루 살아감에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내일 일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오늘 허락해 주셨으니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드리도록 힘쓰고 내일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또 오늘과 같은 자세로 살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너무나 과거에도 집착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또한 너무나 미래를 위하여서 산답시고 이러쿵저러쿵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저는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동행하는 삶이 좋습니다. 그리할 때 오늘 밤 죽어도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흘러간 세월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땅에서 남겨두신 세월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필요도 없음) 그저 하루하루 주님을 의지하면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김창혁 목사님, 지금 육체적으로 너무나 연약한 가운데 계십니다. 스스로 소파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 하셨던 목사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김 목사님께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찬송가 40장 후렴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힘차게 찬양하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심히 연약한 가운데 있지만 그의 영혼은 창공을 향하여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시는 목사님의 영혼은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길 원하시는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에 심히 부족하나마 동참하면서 저는 이러한 고백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서 합니다: ‘살아도 죽은 자처럼 살고 싶습니다.’ 저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더욱더 전도자 솔로몬 왕의 권면을 받아들여 장례식에 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장례식에 가서 산 자로서 이 세상에서의 인생의 끝인 죽음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피부로 느끼고 싶습니다. 심비에 적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죽음의 관점으로 이 남은 삶을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면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할 때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아멘.

 

 

 

내 영혼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한 후,

 

 

 

제임스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