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괴로울 때 어떻게 하십니까? 복음성가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라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1절)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2절)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후렴)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그러나 과연 우리는 괴로울 때 주님을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아니면 우리는 괴로울 때 괴로운 환경을 바라보면서 낙심과 실망과 아픔 가운데서 하나님께 오히려 원망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성경 이사야 53장 7절 말씀을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8절에도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 어떻게 하셨는지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괴로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괴로울 때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 침묵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두 번이나 반복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 어떻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입을 열어 변명하지 않고 침묵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면 입을 열어 변호합니다. 이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잘못이 없는데 누명을 쓰게 되면 법정에 서서 변호사를 통하여 우리를 변호합니다. 근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7절).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기도의 삶”에서 이러한 솔직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저주의 말이나 내가 쓸모없다든지 모자란다든지 하는 말을 듣기가 너무 두려워, 다시 입을 열어 계속 말하고 싶은 유혹에 금방 넘어간다. 두려움을 이겨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써서 곤욕을 당하므로 괴로울 때에 두려움 속에서 또한 억울함 속에서 입을 열어 계속 말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입을 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은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이사야 30장 15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 괴로울 때 우리의 힘은 하나님을 잠잠히 의지(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헨리 나우웬이 그의 책 “기도의 삶”에서 한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은 침묵으로 이끌고 침묵은 말씀으로 이끈다. 말씀은 침묵 안에서 태어나고 침묵은 말씀에 대한 가장 깊은 반응이다.” “침묵은 말씀에 대한 가장 깊은 반응”이라는 말이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잠잠히 신뢰하는 가운데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음성들이 들릴 것이고 또한 많은 말을 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괴로울 때 침묵해야 합니다. 침묵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들으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침묵 속에 들어가 세상의 시끄럽고 귀찮은 잡다한 음성을 따돌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작고 친밀한 음성을 가려듣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과감히 고독을 끌어안고 침묵을 벗 삼는다면 우리는 그 음성을 알게 된다.” 우리는 과감히 고독을 끌어안고 침묵을 벗 삼아야 합니다.

 

둘째로, 괴로울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8절을 보십시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이미 묵상한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4절)고 생각(착각)하였지만 오늘 본문 8절에 와서는 바른 생각이 나옵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한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침묵 가운데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성경적 생각을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괴로울 때 바른 생각, 즉 성경적 생각을 하지 못할 위험이 많기 때문에 더욱더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침묵 속에서 말씀에 입각하여 성경적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괴로울 때 침묵하지 못하고 불평이나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우리는 논리적 생각 (이성)이 앞서기보다 감정이 앞서서 분노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말씀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감정에 이끌려 생각의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괴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침묵 가운데서 예수님의 고난과 그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괴로울 때 우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 53장9절 말씀 을 보십시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우리는 괴로울 때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 있으며 또한 행동으로도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괴로울 때 범죄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괴로울 때 그분의 입에 궤사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괴로울 때에 입술로 죄를 범치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강포도 행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울 때 언행으로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기까지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비록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고 그 묘실이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우리 예수님은 입술로나 행동으로나 어느 면으로나 하나님께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가능한 예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욥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언행으로 죄를 범치 않았습니다. 같은 사람으로 가능했기에 우리도 가능한 것입니다. 욥기 1장22절과 2장10절 말씀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학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2:10). 오히려 욥은 괴로울 때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1:20).

 

그러므로 우리도 괴로울 때 입술로나 행동으로나 하나님께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괴로울 때 침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의 세미한 음성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머물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괴로운 환경에서 감정에 이끌림을 받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생각으로 괴로운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므로 우리의 괴로운 환경을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승리!

 

괴로울 때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를 기원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