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기회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오늘도 심히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뉴스를 인터넷 CNN 뉴스를 통해서 접해 듣게 되었습니다. 34살 난 아버지가 자기의 8살 난 딸과 9살 난 딸의 친구 여자 아이를 칼로 각각 20번과 11번 찔러서 죽인 사건이 시카고에 좀 떨어진 소도시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나 잔인한 것은 이 아버지란 자가 딸의 양 눈까지도 칼로 찔렀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악 중의 악이 아닌가 생각하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저 사람이 인간인가?', '과연 아빠의 자격이 있는가?'
자동차 운전하려면 운전 면허증을 따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되는 일에는 자격증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특별히 공부하는 것도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는 자기의 딸의 머리를 때려 거실에서 죽도록 이틀을 놓아두었다는 엄마, 결국 예쁜 딸아이의 목까지 잘려서 버려진 사건을 뉴스로 접한 기억이 오늘 이 밤에 또 납니다. 과연 우리 부모님들은 부모의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의문을 던져 봅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과 6장을 보면 우리 남자들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아내(엡5:29)와 자녀들(6:4)을 "양육"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육하다'란 헬라어 의미는 'narrow', 즉 '좁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우리 남편 또는 아버지들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길을 고의적으로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의 아픔과 고통 외에 고난의 유익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고난의 유익들을 경험해 보지 못하였기에 믿음으로 고난의 통로를 인내하면서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 시편 119편 65-72절 말씀 중심으로 "고난의 유익"이란 제목 아래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고난의 유익은 나의 그릇 행함을 깨우쳐 준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시편 119편 6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우리는 고난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릇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그릇행할 때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때에 우리는 영적 장님과 귀머거리가 되어서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우왕좌왕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허락해 주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마치 잘못된 길로 가는 양을 양치기 소년이 막대기로 쳐서 바른 길로 걷게 하듯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고난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시사 비뚤어가는 우리를 바른 길로 걷도록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 "(사53:6). 우리는 미련한 양이래서 제 길 가기 바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좁은 길이 아닌 세상의 넓은 길 말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그릇 행함을 깨우쳐 줍니다.
마지막 둘째로, 고난의 유익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합니다.
성경 시편 119편 6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6 가지로 어떻게 고난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을 믿게 합니다.
성경 시편 119편 6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의 그릇 행함을 깨우쳐 주는 고난은 우리고 하여금 U-turn을 만들게 하므로 주님의 계명만이 참된 길임을 믿게 합니다. 우리는 매일 둘 중의 하나의 길을 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좁은 길과 세상의 넓은 길.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좇던지 아니면 사탄의 말 또는 세상의 말을 좇던지 둘 중의 하나의 선택을 매일 순간 순간하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인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 주님의 길, 주님의 계명을 믿고 그 계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2) 고난은 우리에게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 시편 119편 6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명철 즉 선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무지한 가운데서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 분별력의 상실이란 확신(conviction)이 아닌 혼동 (confusion)을 가지고 옵니다. 결국에 가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의 길을 일관성(consistent)있게 걷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영적 분별력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길, 혼동의 길을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우리의 무지함과 선한 분별력의 상실의 늪에서 건져주십니다. 결국에 가서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영적 분별력과 주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십니다.
(3)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합니다.
성경 시편 119편 6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 고난을 통하여 맛보는 주님의 선하심(34:8) 중 우리에게 제일 큰 유익은 고난을 포함한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롬8:28) 선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제일 힘들고 괴롭고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극심한 고통과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더 밝게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도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하고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한 자의 거짓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시편 119편 6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 우리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교만한 자의 거짓이 우리 귀에 너무나 분명하게 잘 들려서 그 교만한 자의 거짓된 길을 걷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교만한 자들의 거짓, 너무나 진리같이 생각되어 그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릇된 길을 선택하는 혼동된 우리 그리스도인들, 우리는 지금 그 거짓된 길을 분주하게 달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세상의 교만한 자들이 보여주는 거짓된 성공과 명예와 물질 만능주의의 길, 그러나 고난을 당한 후에 우리는 그 모든 교만한 자의 거짓된 길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참된 길, 주님의 길을 밝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의 길은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이 얼마나 세상의 길의 결국과 다릅니까? 여러분은 영적 매력을 느끼십니까? 우리의 가는 좁은 길의 클라이맥스(climax)가 죽음이라는 것에 우리는 영적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십니까? 이러한 진리는 아무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에 이러한 진리를 사수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이 진리를 심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 심는 과정에서 고난을 통하여 교만한 자의 거짓을 미워하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5) 고난은 마음에 살찐 지방을 제거합니다.
성경 시편 119편 7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저희 마음은 살찐 지방 같으나 …." 요즘 미국에서는 비만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 빼겠다고 다이어트 하고 운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살찐 지방"(fat)을 제거하고자 수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살찐 지방을 제거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살찐 지방을 제거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육신의 "살찐 지방"이 붙어있으면 얼마나 이런 저런 불편함과 더불어 결국 이런 저런 성인병까지 걸립니까? 그러나 마음의 살찐 지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죄악 된 결과를 낳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죄악 된 결과를 가볍게 여기며 누리는 더 큰 죄를 낳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난이란 이러한 영적 상태에서 우리 마음에 살찐 지방을 제거하는 데 필수적인 최고의 약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마음에 살찐 지방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6)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최고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해 줍니
다.
성경 시편 119편 72절을 보십시오: "주의 입의 법이 내게 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40년 고난을 통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신 8:3). 이와 같이 우리 또한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많고 다양한 고난들을 접하면서 결국 그 고난 중에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말씀의 가치가 우리 생명보다 귀한 것임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과 우리 인간의 이 땅에서의 생명 연수가 어떻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재물보다 이러한 말씀의 소중함과 말씀의 최고의 가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이 세상, 점점 종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 세상,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의 좁은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과거나 현재보다 더 큰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고난의 유익들을 고난당하는 그 때 그 때마다 경험하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전보다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올지라도 오히려 고난의 유익을 누릴 줄 아는 고난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시편 119편 65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선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심을 경험하며 그의 선하심을 맛보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 주어지는 고난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한 네 가지로 반응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를 가리켜 하나님과 춤을 추는 스텝 네 가지라 말합니다. 하나님과 춤을 추는 첫 번째 스텝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울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아플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아뢰야 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인정하기보다 부인(deny)하려고 하던지 무시(ignore)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려고(suppress)하려고 합니다. 만일 그리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을 당할 때마나 원망하며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할 확률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춤을 추기 위한 두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마비시켜 부정과 수치와 죄책이라는 옥에 가둔 은밀한 상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원인이 뭔지 알아야 우리가 그 원인을 직시하던지 안하던지 할 텐데 많은 때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할 뿐더러 설상 우리가 그 원인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본능은 그 원인을 직시하기보다 피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피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주어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춤의 세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나 막대한 에너지를 부정하는 데 쏟아 부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리혀 우리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가운데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의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어둡고 무서울 수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그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터널에 들어가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춤의 마지막 네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의 터널에 들어가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고통과 상처에 치유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움을 받아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 요나 2장 1절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가 겪은 고통은 한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의 고난은 큰 물고기 뱃 속이였습니다(1절). 다시 말하면, 요나의 첫 번째 고난은 스올의 뱃속 이였습니다(2절). 어두컴컴한 동굴처럼 바다 깊은 곳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는 동서남북을 다 돌아보아도 아무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쳐해 있었습니다. 그는 갇힌바 된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바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물론 이것은 바로 왕의 생각이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이였지만). 찬송가 539장 3절 가사처럼 이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모두 끊어진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절망 상태에 놓였을 때에야 우리는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둘째로, 요나의 고난은 주님의 파도였습니다(3절). 여기 ‘파도’란 실상 깨뜨리는 자들(breakers)이라는 뜻으로써 곧 자신을 깨뜨려 부수는 파도를 이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강퍅한 마음을 깨뜨려 부서트리고 계셨습니다.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사 요나가 타고 있었던 배만 깨뜨리시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1:4)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강퍅한 마음을 깨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던 요나의 강퍅한 마음을 주님께서는 깨뜨리시므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님의 명령에 순종케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셋째로, 요나의 고난은 주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 이였습니다[(4절) “… 내가 주의 목전에 쫓겨났을지라도…”]. 요나가 이러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3). 다시 말하면,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자기에게 멀리 떠나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듭니까? 우리가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멀리 도망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기도 응답이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22편 1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신음하며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응답이 없고 아무 도우심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육신적으로 큰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과 주님의 파도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아버지께 징계를 받을 때 어두운 방안에 갇혀 있는 것과 아버님으로부터 몽둥이로 엉덩이나 종아리를 맞는 것보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더 괴로운 것처럼 어떠한 징계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제일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십자가상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란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시는 독생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언하며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요나의 고난은 그의 영혼이 그 속에서 피곤해 갔다는 것입니다[(욘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 여기서 ‘피곤하다’란 단어의 뜻은 ‘쇠퇴해가다’입니다. 이 단어는 요나는 극도의 낙심 지경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요나에게 임한 고난의 지경은 전적 무능력함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혹은 구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러한 상황이 삼일이나 되었다는 것은 극도의 낙심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적 무기력함과 전적 무능력함을 경험하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구원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하여금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큰 유익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접하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특히 요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대풍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춤을 추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유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71편).
춤추시는 하나님과 스텝을 맞추는 것을 배우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