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은 기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스트레스가 한계선을 초과할 때 자신에 대한 환멸, 자기비하, 냉소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알리는 위험 신호를 한 일곱 가지로 정리한 글이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인터넷): (1)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한다, (2) 너무 많은 일을 시도해 정작 중요한 일을 처리할 시간이 부족하다, (3)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가혹한 압박을 가한다, (4) 항상 자신이 뒤쳐져 있고 최고가 되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을 느낀다, (5) 습관적으로 오래 앉아 일한다, (6) 일을 일찍 마치고 귀가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7) 집으로 걱정거리를 가지고 간다 등입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알리는 위험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일을 하면 결국은 탈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탈진이란 무엇입니까? 탈진이란 문자 그대로 힘과 기운이 완전히 빠져 정서, 신체,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피로와 무력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탈진상태에 이르면 사역에 대한 의욕을 잃고 신체의 질병과 부부간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탈진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성경 열왕기상 19장1-14절 말씀을 보면 탈진의 주님의 종 엘리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갈멜산에서의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의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18장) 아합 왕의 부인인 이세벨이 사자를 보내어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니까(19:2) 엘리야는 두려워 일어나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 우리는 엘리야에게서 더 이상 갈멜산에서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탈진 현상에 대하여 한 4가지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첫째 탈진 현상은 두려움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의 위협의 메시지를 받고 두려워했습니다(2-3절).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은 열왕기상 18장의 엘리야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열왕기상 18장 1절을 보면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담대하게 아합에게 보이려고 나아갔던 엘리야(18:2)가 열왕기상 19장에 와서는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갔던 것입니다(19:3). 엘리야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습니다.

 

엘리야의 이 첫째 탈진 현상은 갈멜산의 위대한 승리 후에 나타났습니다. 왠지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은혜 받은 후에 그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에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은혜 받은 후에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처럼 사람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하는 회피 또는 도피 현상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탈진 현상은 절망입니다.

 

엘리야는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3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얼마나 낙망하고 절망하였기에 죽기를 간구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라고 기도하였는데 이 말씀은 “It is enough”(NASB), 즉, ‘이젠 되씁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더 이상 선지자로서의 사역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치고 낙심하여 쓰러져 하나님께 이젠 됐으니 자기 생명을 취해 달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있어 낙망이나 절망은 참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왠지 피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어떠한 사역자라 할지라도 사역 속에서 낙망과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야처럼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아직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왠지 목회 가운데 한번은 엘리야처럼 절망을 경험하지 않을까 예상하는 것입니다.

 

셋째 탈진 현상은 육신의 연약함입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고 있었을 때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깨워서 “먹으라”고 권면하면서(5절)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명을 주었습니다(6절). 엘리야는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고(6절) 또 다시 사자가 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7절) 엘리야는 육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먹고 마신 후 “그 식물의 힘”(the strength of that food)을 얻었습니다(8절).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육신적으로 지쳐 쓰러져 결국은 이런 저런 병에 걸려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습니까. 할 수 없이 사역을 잠시 내려놓고 쉴 수밖에 없는 이 목회자분들을 생각하면 엘리야가 육신적으로 지쳐 연약한 가운데서 탈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넷째 탈진 현상은 극심한 외로움입니다.

 

엘리야는 천사가 공급해 준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8절) 굴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두 번이나 반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 14절).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오직 자기만 남았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왠지 그는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굴 안에서 혼자 있는 엘리야를 생각해 볼 때에 그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탈진 현상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4).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잠잠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사역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마르다처럼 일하기에 분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좀 복잡한 생활환경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나 홀로 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 멈추고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 시간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육체적 안식이 필요합니다(5-7).

 

탈진 현상의 하나인 육신의 연약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쉴 때는 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다 같은 일 지향적인 사역자들은 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될 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일하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잠잠히 앉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을 자야할 때 잘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육체적으로 지쳐 쓰러지고 병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엘리야처럼 좀 광야로 들어가 잠을 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잘 먹어야 합니다. 청지기로서 우리는 우리 건강관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실하게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든 몸을 주님께 받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육신의 장막은 점점 더 연약해 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건강관리를 잘하여서 주님이 주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분히 살아드리기 위해선 건강관리 철저히 잘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12).

 

엘리야 선지자는 육체적으로 힘을 얻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가서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잠잠히 머물러 하나님의 말씀 묵상과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이 없습니다(찬송가511장). 우리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힘을 얻어 일어나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잠24:1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탈진하여 쓰러져 있을지라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는 일어나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오뚝이와 같습니다. 쓰러졌다가도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사 우뚝 서는 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떤 일로 두려움과 낙망 속에서 외로워하며 육신적으로 지쳐 쓰러질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육체적 안신과 더불어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다시금 재충전 받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전심전력하십시다. 승리!

 

 

 

 

광야의 영성을 추구하고 싶은,

 

 

 

제임스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