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힘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을 때에도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시지 않았던 것처럼(행16:6, 7)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을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으시기도 하셨지만 마게도냐로 인도하셨던 것처럼(10절) 동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문을 닫으실 때도 있지만 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분명히 열어주시는 문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언젠가 저희 교회 교육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막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원리를 제 삶과 또한 교회 가운데 적용케 하시는 은혜입니다.
먼저 막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깨달음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을 건축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는데(삼하7:13) 그 이유는 다윗이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대상22:8).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이 (간절히) 있었던 다윗을 막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성전건축 문을 막으시므로 그에게 열어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 열어주신 것은 바로 소망의 문이었습니다(호2:15).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던 다윗의 그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막으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다윗을 향하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소원이란 바로 다윗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해 주시는 것(삼하7:5-7)과 또한 다윗에게 크신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8-16절).
하나님께서 다윗이 원하는 성전건축을 막으시므로 다윗의 마음에 열어주셨던 것은 바로 크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셨으며(6절) 또한 그는 어느 지파에게도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7절). 그 이유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솔로몬)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이기 때문입니다(대하6:18).
하나님께서 다윗이 원하는 성전건축을 막으시므로 다윗의 마음에 열어주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었습니다. 그 크신 축복 중에는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있어 그의 모든 대적을 그의 앞에서 멸하시고(삼하7:9) 그들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해 주시겠다(11절)는 약속의 말씀과 다윗의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9절)도 있지만 더 큰 축복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어 하는 다윗을 막으셨던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었습니다(11절). 다윗이 죽은 후 그의 몸에서 날 자식(솔로몬)을 그의 뒤에 세워 이스라엘 나라를 견고케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12절). 또한 그 자식(솔로몬)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케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13절). 하나님께서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솔로몬)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14절). 그리고 솔로몬이 죄를 범하면 사랑으로 징계하시겠지만(14절) 사울처럼 솔로몬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15절). 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더 큰 의미는 바로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왕 중의 왕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은 건축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 막으심 뒤에 더 큰 축복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막으심에 다윗이 불평, 원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걷고자 하는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지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데 길을 막으시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고 그의 뜻을 찾고자 기도하며 기다리곤 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고자 소아시아로 가고자 했을 때 성령님께서 막으셨지만 마게도냐로 가는 문을 열어주시므로 결국 유럽을 복음화시키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큰 뜻이 있으셨음을 우리가 배웠기 때문입니다(행16장). 하나님은 길을 막으실 때 또 다른 준비해 놓으신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신 줄 우리는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 분명히 열어주실 문이 있다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으시는 큰 뜻은 무엇입니까?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요한복음 6장1-15절 말씀(오병이어의 역사)을 성취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데 왜 아직도 성취해 주시지 않으시고 막으신다는 느낌을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오늘 주신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심을 깨닫게 해주시므로 말미암아 저의 지극히 작음을 들춰내시고 인정케 만들고 계십니다. 또한 그의 크신 축복들이 분명히 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소망하여 확신케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우리 승리장로교회에게 적용해 볼 때 왜 하나님께서는 승리장로교회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자 하는 길을 막으시고 계시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교회 지역에 사는 히스패닉(라티노) 영혼들을 복음화 하시길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행11:19ff).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길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승리장로교회가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므로 예수님의 참된 사랑의 공동체로서 지역 사회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대로[“…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16:18)]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그러한 교회로 세우고 계십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저희 교회에게 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사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승리하는 교회로 세우실 것입니다(18절). 그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계속해서 세우실 것입니다. 세우시되 기원하는 것은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은 어떠한 선교 사역입니까? 저는 사도행전 16장 6-10절 말씀 중심으로 두 가지로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첫째로,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은 성령님께서 막으실 때에 중단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16장 6-7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 바울은 그의 동역자 실라와 함께 제2차 선교 여행 중 루스드라 라는 지역에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예수님의 제자 디모데를 만나(1-3절)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이방인 형제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므로(4절)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5절). 그런 후 오늘 본문 6절에 와서는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선교사역을 감당하고자 아시아로 향하려고 하였지만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돌아다니다가(6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습니다(7절).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7절).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시아나 비두니아에서 전하고자 애썼는데 성령님께서 전하게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 분명히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성령님께서 막으셨는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아니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막으셨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우선순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막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나 비두니아에서 전하는 것보다 먼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이미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다른 곳이란 바로 마게도냐를 가리킵니다(10절).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실 리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지역의 우선순위가 그의 섭리 가운데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때에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분별하지 못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는 좋은 의도(motive)도 있지만 무엇이 먼저 있고 무엇이 그 다음인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할 때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찾고자 고민하여 기도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우선순위와 맞춰져야 한다는 것을 …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을 향하신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아시아나 비두니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바로 마게도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몰랐던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선교지를 찾아 열심히 나섰지만 아시아나 비두니아 모두 성령님께서 막으셨던 (허락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아시아니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에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성령님께서 막으셨을 때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하지 않고 그 성령님의 막으심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정지케 하실 때 우리는 브레이크(Break)를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성령님께서 “멈추라”하면 “예”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마치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너무 깊게 밟아 속도를 너무 빨리 내느라 브레이크 페달을 갑자기 잘 밟지 못할 때가 있는 것처럼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라 성령님께서 ‘멈추라’고 막을 실 때에 우리의 영적 브레이크 페달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는 멈춰야 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앞을 보고 달리기에만 바빠서 멈춰야 할 때를 분멸 못하고 무심코 달려서는 아니 됩니다. 성령님이 달리라 하면 달리지만 성령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면 멈춰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영적 민감함(spiritual sensitivity)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항상 민감해 있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령님은 주님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흐지부지하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성령님이 아니십니다. 흑백이 분명하게(clearly) 하시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님의 막으심(허락지 않으심)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인드(mind)를 날카롭게(sharpened)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은 성령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때 순종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16장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성령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으로 하여금 아시아나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막으시므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관문인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8절). 거기서 거하고 있었을 때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는데 그 환상에서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9절). 그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환상을 본 후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10절). 우리 성령님은 우리가 가고자 애썼던 문을 막으셨을 때에는 꼭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고자 애썼던 문은 바로 아시아(Asia)와 비두니아였지만 성령님께서 그 문을 막으셨지만 결국 환상을 통해서 그들을 마게도냐, 즉 유럽(Europe)로 가는 문을 열어주시고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환상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는 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환상으로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환상은 보이는 형상이 그 중점으로 생각되는 계시라고 말했습니다(박윤선).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님께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사도 바울 시대와 달리 환상을 통하여서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뜻을 알려주신다고 믿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심령에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시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꿈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오늘 본문에서 생각하며 고민하는 부분은 10절에 나와 있는 “인정함이러라”는 단어입니다. 영어 NIV나 NASB 성경을 보면 “conclud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들을 부르신 줄을 “인정” 또는 “결론”을 내렸다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s라는 주석에 의하면 ‘인정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함께 가도록 만들다’, ‘하나로 되다’, ‘결합시키다’, ‘이것저것에 동의하므로 결론을 내리다’입니다(to make go together, to coalesce or knit together, to make this and that agree and so to conclude).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에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바울의 환상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이성(reason)을 사용하여 논한 결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함께 동의하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빌리자면 바울과 그의 일행은 환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그의 뜻을 계시해 주셨음에 충분히 설득을 당했다(being fully persuaded)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롬12:2). 그러므로 영적 민감한 가운데서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과 열어주시는 문을 분간해야 합니다. 그는 분명히 한 쪽 문을 닫으시며 또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점은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져가는 이성을 사용하여 함께 동의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에 평강과 믿음과 담대함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이끌림을 받아 선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여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과 열어주시는 문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막으신다는 결론이 내려질 때에 성령님께서 그럼 다른 문을 열어주실 것은 믿고 기도하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애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때에 성령님께서는 그의 방법으로 새로운 선교 사역지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막으시는 하나님의 크심과 큰 축복을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