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은 기회입니다.

 

 

 

교회 분쟁,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랑해야 할 교회가 왜 서로 다투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교회의 분쟁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다양성을 인정 못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부부의 분쟁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당신과 나는 그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부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좀 다를 뿐이다’(We are just different)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당신은 틀렸다 (잘못됐다) (You are wrong)라고 할 때가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결과 부부는 다투게 되고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관계가 ‘당신이 잘못됐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싸우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인간관계를 보면 다투며 싸우는 이유는 ‘그저 다를 뿐인데 당신은 틀렸다’라는 생각과 자세로 서로를 대하므로 말미암아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자세 가운덴 ‘나는 맞는데 …’라는 교만함의 쓴 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나는 맞는데 당신은 틀렸다’라는 뿌리 깊은 생각이 도사리고 있기에 상대방을 비판하고 결국은 비방하기까지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국 분쟁의 깊은 원인은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로마서 12장 16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는 원인은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난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난 지혜롭고 당신은 미련하다’는 자세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입니다(약3:15).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14절). 만일 자랑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14절).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다면 교회 안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로서(약3:18) 우리에겐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 은사’ 기준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판단하며 비판한다면 우리 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회의 분쟁이 있는 것은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고전3:1) 우리 가운데 시가와 분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자들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분쟁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지 않습니다(2:13). 육신의 속한 자들은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합니다(2:14). 그 이유는 성령님의 일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14절). 또한 육식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일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14절).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교회 가운데 행하시는 일들에 동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성령님의 일들 중에 하나는 바로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입니다(엡4:3). 분명히 바울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육신에 속한 자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고전3:3). 사람을 따라 행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은 마치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요즘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교회 안에 있는 육신에 속한 자들은 ‘나는 모 담임 목사님에게,’ ‘나는 모 부목사님에게’’라고 말합니다. 담임 목사님이나 부 목사님은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그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일 뿐인데도 말입니다(5절). 더 큰 문제는 평신도가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바울과 아볼로처럼 주님께서 각각 주신대로 맡겨주신 양떼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사역자들뿐일진대 우리는 이 사실을 종종 망각하여 양 떼들을 갈라놓는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교회 사역자들은 바울과 아볼로처럼 심고 물을 주는 자들일 뿐인데(6절), 즉 “아무것도 아니”데 (nothing)(7절) 뭔가가 된 것(something)처럼 착각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심고 물을 주는 것뿐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7절).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뭔가가 된 줄 착각하며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everything)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망각하므로 말미암아 교회의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결국은 육신에 속한 평신도보다 육신에 속한 우리 교회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교회의 분쟁과 분열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쟁을 막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신령한 자들”이 돼야 합니다(1절).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들이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13:11). 우리는 더 이상 젖을 먹는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고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2:10).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십니다(12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은혜들을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13, 14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로서(16절) 주님의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해야 합니다(찬송가 246장, 1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의 교회를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비록 겸손히 주님을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을 수 있으나 구세주 되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찬송가 347장, 1절).

 

교회는 하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받은 지체들이 모여 주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은 바로 우리 모두가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모두가 서로 마음을 같이 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2:5). 자기를 비우며 자기를 낮추는 마음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로부터 온 지혜로 서로 관용하며 화평한 가운데서 각자에게 주어진 다양한 은사들을 충분히 사용하여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엡4:3).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힘써 지켜 나아가길 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