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함은 기회입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엉뚱한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 보았습니다. 그 엉뚱한 질문이란 ‘과연 아기 예수님도 보통 아기들처럼 두 손을 꼭 움켜지고 태어나셨을까?’였습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성경 디모데전서 6장 7절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도 듣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공수래공수거)는 말과 유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아기들을 보면 다들 두 손을 꼭 움켜지고 있고 그 아기들이 자라나 아이들이 되어서 말을 하기 시작할 때를 보면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It’s mine”(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더 자라나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자 무던히도 노력하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결국 노인이 되어서는 죽을 때에는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결국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무엇을 얻고자(gain) 참 애를 쓰고 노력하지만 왠지 신앙생활이란 버리고(lose) 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기의 욕심도 버리고 교만도 버리고 등등 인생을 끊임없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두 손을 벌려 못 박혀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죽을 때에 두 손을 벌려 아무 것도 움켜지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성경 디모데전서 6장 8절은 이렇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먹을 것과 입을 것 외에 이것저것 없어서 불만족하십니까? 왠지 우리는 마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이것저것 없다고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족한 줄을 모르고 부 하려고 하는 가운데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 미혹을 받아 믿음을 떠나 많은 근심으로 우리 자신을 찌르고 있습니다(딤전 6:9-10).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서한즉 사망을 낳는데 말입니다(약1:15). 제 자신을 이 말씀에 비취 보면 먹을 것도 많아서 오히려 음식을 남겨 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요6:12) 입을 옷들도 너무나 많아 얼마 전에서 쓰레기 여러 봉지 안에 안 입는 옷들을 넣어서 다 Goodwill이라는 비영리 단체에 기증했습니다. 한 마디로,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게 먹고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에게 ‘저는 과분하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족하지 않으면서 있는 것들 외에 자꾸만 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불만족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은 저의 양심에 찔림이 됩니다. 참 한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고 있는 풍족함으로 인하여 제 마음과 양심에 지방(fat)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살찌워져 가야하는데 육적으로 살찌워져 가고 있으니 만족해하기보다 불만족해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으로 저에게 살 좀 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과 양심에 붙어 있는 지방을 빼라고 교훈해주고 계십니다. 운동도 해야 하고 먹는 것도 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골고루 잘 먹고 그 먹은 말씀을 소화시키고자 신실하게 순종하여 제 마음과 양심의 지방을 빼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양심이 건강하여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는 것(이미 은혜로 주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자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 그리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옷이 해어지지 아니했던 것처럼(신8:4) 하나님께서 저의 옷을 해어지지 않게 하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덤으로 주신 것인 줄 알고 족한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성경 룻기 1장 1-5절을 보면 선택에 기로에 서 있었던 세 사람이 나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엘리멜렉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유대인으로서(룻1:1) 그는 풍족한 가운데 있었는데(2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흉년이 든 유대 땅에 계속 살던지 아니면 흉년이 들지 않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던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다른 지방으로 이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인 기룐과 말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 갔습니다(1절). 그리고 엘리멜렉은 모압 지방에서 오래 살려고 이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단어 “우거”라는 히브리어 언어의 뜻 가운데는 “잠시”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엘리멜렉은 잠시 위기를 모면하고자 살고 있던 유다 베들레헴을 등지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 간 것입니다. 그의 실용적인 선택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모압 지방에서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첫 번째 사람 엘리멜렉을 생각할 때 한 마디로 그는 흉년에 자신의 풍족함을 지키려다가 결국 자기 생명을 잃고만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더불어 저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하시는 “흉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의 “흉년”이 필요하다는 믿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접하는 삶의 “흉년”이 경제적인 “흉년”이든 환경적인 “흉년”이든 실제적으로 자연적인 “흉년”이든 하나님께는 그 “흉년”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분명히 뜻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가지고(눅15:12)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그는 먼 나라로 갑니다(13절). 그리고 그는 거기서 이미 아버지께 받은 재물을 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합니다(13절). 그 재산을 다 없앤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결국 탕자는 비로소 궁핍해 집니다(14절). 우연 이였을까요? 탕자가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다 없앤 후에 그가 거하던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던 게 우연 이였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탕자가 거하는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탕자를 궁핍케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탕자로 하여금 풍족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게 하시므로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속에도 “흉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흉년”이 왔다고 하여 엘리멜렉처럼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리고 자신의 풍족함을 지키고자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오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여(잠3:5)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은 그 위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 속에 오는 위기인 “흉년” 뒤에 숨겨져 있습니까? 바로 회개의 축복입니다. 우리 삶 속에 찾아오는 “흉년”은 우리로 하여금 궁핍케 하므로 풍족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궁핍함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풍족한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만듭니다. 그 때에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의 풍족했을 때를 그리워하면서 그 과거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 과거의 풍족했을 때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부딪칩니다). 부딪치데 그는 왜 자신에게 이러한 궁핍함이 임했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몸부림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할 때 그는 성령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탕자의 이야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이 회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풍족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찬송가 338장)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물론 모든 “흉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한 예로 우리는 창세기 42장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 수가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살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창42:5). 가나안 땅만 기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굽 왕 바로의 꿈대로 (그리고 요셉의 꿈 해석 되로) 각국에 기근이 있었습니다(41:54). 애굽 온 지면에도 기근이 있었습니다(57절).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55절). 점점 심해지는 기근으로 말미암아(57절)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알게 되어(42:1) 자기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2-3절). 그리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당시 애굽의 총리는 바로 요셉 이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젓과 꿀이 흐르는 풍족한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게 하셨을까요?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미워하여(37:8) 그들 죽이려다가(20절)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판(28절) 그의 형들의 죄를 회개케 하시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기근도 사용하셔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을 다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과 후손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시고자(45:5, 7) 요셉의 삶에 역사하시고 섭리하시사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왠지 하나님께서 야곱이 살고 있었던 가나안 땅 뿐만 아니라 애굽의 온 지역에도 기근을 들게 하신 이유는 요셉의 형들을 회개케 하시고자 하셨다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셔서 거기서 약 400년 거주하게 하시고 핍박과 환난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번성케 하시므로 결국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사(구원해 내시사)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리신 기근의 목적은 회개라기보다[물론 요셉의 형들은 회개하는 것 같아 보임(42:21-22)] 구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접하는 “기근”으로 말미암은 궁핍함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사실이 …. 어느 누가 점점 심해지는 “기근” 가운데 하나님의 큰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자들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 “흉년”이란 위기를 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엘리멜렉처럼 그 위기를 모면하여 자기의 풍족함을 지키고자 자기의 뜻대로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많은 궁핍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또한 우리 마음에 확신도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록 우리가 왜 우리 삶 속에 “흉년”이 와서 우리가 궁핍해 졌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인생의 “흉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탕자처럼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려고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요셉처럼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영적 가족 식구들을 구원케 하시려고 하시는 것인지 그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엘리멜렉과 같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의 “흉년”과 궁핍함을 부딪혀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풍족함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궁핍함이 훨씬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이미 준비해 놓으신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승리!

 

 

 

 

궁핍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풍부함을 경험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